84화
디아나의 백금발이 전부 풀어진 채로 에드윈의 어깨를 간질였다. 온몸의 맥이 풀려 버린 듯이 침대에 늘어진 팔 위로 에드윈이 제 팔을 겹쳤다. 한쪽 팔에도 넉넉하게 디아나의 나신이 안겼다.
하얀 나신엔 에드윈이 남긴 붉은 흔적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아직도 디아나의 가슴이 불규칙하게 오르내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할딱이는 숨소리가 다시 한 번 에드윈의 혈기왕성한 남성을 자극했다.
“디아나…….”
에드윈이 낮게 중얼거리며 다시 디아나 위로 올라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서로의 살갗이 닿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디아나의 원망 가득한 눈동자에 에드윈은 머쓱하게 그 목덜미에 고개를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도 일렁이는 디아나의 백금발이 가득했다. 디아나 특유의 싱그러운 체취가 더 짙어졌다.
“전하는…….”
디아나의 목소리가 죄 갈라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에드윈의 아래에서 하도 울어 댄 탓이다. 에드윈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디아나의 상체를 일으켜 침대에 기대곤 물을 가져와 입술을 적셔 주었다.
그러고 보면 에드윈이 누군가의 수발을 이렇게 드는 것도 디아나가 처음이었다. 디아나가 느끼기엔 퍽 서툴고 거친 시중이었다. 무작정 자신을 일으켜 앉히고 말없이 물을 들이대는 시중이라니. 하지만 그게 에드윈이라서 좋았다. 그로서는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니 묘하게 웃음이 나오곤 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웃을 기운이 없었지만 말이다.
“전하는…… 나빠요.”
달콤한 물을 넘기고 나자 겨우 목소리가 제대로 나왔다.
“그래.”
에드윈은 너무도 당연하게 대꾸했다. 이러면 디아나가 할 말이 없어진다. 에드윈은 지극히 단순한 남자 같으면서도 어떨 때는 그 속을 다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어차피, 나쁜 놈이 됐는데 한 번 더…….”
찰싹, 디아나의 손이 에드윈의 맨가슴을 때렸다.
“나쁜 놈이라고까지 한 적은 없어요.”
에드윈은 퍽 아쉬운 눈치였지만, 조금 전까지 제가 했던 일을 생각해서 얌전히 디아나의 어깨만을 안고 나란히 앉았다. 같은 침대에서 살갗을 맞대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그대에겐 더한 말을 듣는대도 괜찮은데.”
“그런…… 취미는 없거든요. 그리고 어떻게 전하에게.”
“어? 아까부터 그대의 눈빛은 나쁜 놈이라고 말하는 것 같던데.”
특히 에드윈이 집요하게 디아나를 몰아붙일 때 그렁그렁 눈물까지 어린 눈동자로 백번은 말했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 인정은 한다.”
“……정말요?”
그럼 정말 나쁜 놈이다. 디아나가 그렇게 사정했는데, 조금만 봐 달라고, ‘제발’이라고도 했는데 에드윈의 격정은 멈출 줄을 몰랐다. 디아나의 좁은 아래에 그 무자비한 페니스를 박아 넣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할딱이는 디아나의 음부를 더듬고 엄지로 집요하게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던 에드윈 때문에 디아나는 몇 번쯤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군.”
흥, 디아나가 코웃음을 쳤다. 이쯤 되면 에드윈은 시선으로 욕을 먹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난 평소에 변명을 치졸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 자기변호를 하자면…… 그대가 원인 제공을 자꾸 해.”
“그게 더 변명 같은데요.”
“아냐. 난 본래 절제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대가 내 눈앞에 있으면 모든 게 사라져. 그러니 그대 자체가 원인을 제공하는 셈이지.”
에드윈이 능청스럽게도 말했다. 디아나는 가끔 에드윈에게 속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이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의 에드윈은 귀족적인 풍모에 신사의 모범 그 자체였는데,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왜, 사실만을 말한 거다.”
“그 변호는 기각하겠어요. 전하는 좀 더 신사적인 분인 줄 알았는데.”
“내 입으론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픽, 에드윈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디아나의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에드윈은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봤을 땐 매사에 무심하고 누군가 조각으로 빚어 둔 것처럼 반듯한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지금 디아나의 곁에선 한시도 제 손을 가만두질 못하고 디아나가 닳아 없어지도록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짐승이 된대도, 그건 전부 그대가 원인 제공을 한 거야.”
나직한 목소리가 디아나의 귓가를 울리며 끈적하게 귓불을 물었다. 대공이나 되는 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짐승으로 자처할 정도면, 조금 전의 정사를 짐작할 만했다. 그러나 실제로 입에 담는 것은 달랐다. 디아나가 내심 놀란 것과는 달리 에드윈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전하, 그런 말은 좀…….”
“왜?”
너무 당당한 반문에 디아나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대공이라서?”
“그게 가장 큰 이유죠.”
에드윈이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꽤 묘한 표정이었다. 그의 흑안이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자 디아나는 괜히 얼굴이 따가웠다.
“그만 보세요.”
“내가 내 여인을 보는 데도 제한이 있나?”
에드윈이 너무 태연하고 뻔뻔해서 오히려 디아나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난 대공이 아니다.”
시선을 피한 디아나의 뺨을 감싼 에드윈이 눈을 맞췄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곧게 디아나를 봤다.
“적어도 그대 앞에서는 그 무엇도, 누구도 아닌 그대의 남자일 뿐이다.”
그래서 그 시선을 피할 수가 없다.
“나쁜 놈이 되어도, 짐승이라도 상관없어.”
제국의 반역자여도, 도망자라도. 에드윈은 남은 말을 삼켰다.
“그대를 가졌으니 난 뭐가 되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상대가 그대라면…… 그래, 난 뭐든지.”
두려울 정도의 애정이었다. 그 말은 반대로 하면 디아나가 아닌 사람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는 뜻이었다. 디아나는 이미 에드윈이 그은 선을 넘은 존재였다. 이제야 그 무게가 조금씩 느껴졌다.
“전하 때문에 전 정말 나쁜 사람이 되는군요.”
디아나가 손을 뻗어서 에드윈의 얼굴을 만졌다. 이토록 강인한 남자가 디아나에게 한없는 애정을 쏟아붓고 있었다. 동시에 디아나의 손짓 하나에도 아직 감격을 느끼고 있었다. 침대에서까지 신사는 아니었지만, 그는 여전히 솔직한 남자였다. 디아나는 작은 감정 하나 숨기는 것에도 서투른 에드윈이 좋았다.
“난 짐승도 자처하는데, 그대도 조금 나쁜 사람이 되는 것 정도는 참지 그래.”
에드윈은 사탕발림 같은 거짓말로 디아나를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담담하게 제 마음을 보여 준다. 그것만으로도 디아나는 안심이 됐다.
“좋아요, 전하의 성의를 생각해서.”
디아나가 분홍빛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미안한 기색은 비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에드윈을 더 힘들게 할 테니까. 그 대신, 에드윈처럼 조금 뻔뻔하고 나쁜 사람이 되기로 했다. 상대가 에드윈이라면 디아나도 솔직해질 수 있다. 그가 먼저 제 속을 내보여 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자, 이제 들어 볼까.”
에드윈이 느긋하게 기지개를 켠 후에 말했다.
“우리의 나쁜 공작 영애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따스한 에드윈의 흑안이 디아나를 담았다. 그 안에서 디아나는 그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천진하게 웃을 수 있었다.
“음, 그 나쁜 공작 영애는…… 곧 사라지고 싶어 해요.”
에드윈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디아나는 어서 말을 이었다.
“나쁜 공작이 되기로 했거든요.”
“허.”
에드윈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무척 흥미로운 일이 되겠군.”
에드윈이 여전히 디아나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채로 나직이 뱉었다. 이 품에서, 디아나는 지금 두려운 것이 없었다. 디아나 카를의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보름이 흘렀다. 가득 찬 달이 기울 동안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황실에선 카를가를 상대로 했던 국혼을 파기했고, 샤리즈 후작가의 영애가 황태자비로 간택됐다.
한 번의 파혼을 의식한 것인지 그 절차는 무척 간소하고 빠르게 치러졌다. 사교계에선 카를 공작 영애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입방아를 찧어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차기 황태자비는 디아나 카를이 아니다.’
밝혀진 사실은 그것뿐이었다. 황실에선 그 이유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이 난 것은 살롱에 모인 부인들이었다. 더러는 그 꼿꼿하고 오만한 성정으로 황후의 미움을 샀다는 말이 있었고, 더러는 황태자인 루카스가 기가 센 여인은 싫다며 퇴짜를 놓았다고 말했다.
“사교계란 늘 말이 많다지만, 우리 아가씨를 뵌 적도 없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치곤 우습네요.”
“그러니 그런 헛소리를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들은 고귀한 신분과 미모를 모두 가진 공작 영애의 타고난 우아함과 좀처럼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신비로움을 질투했다는 것을 자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문이란, 쯧.”
“어차피 아가씨는 신경도 안 쓰실 것들이지만요.”
그레이와 샬롯은 이따금 바깥의 소식을 들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곧 화제가 새로운 황태자비로 넘어가면, 좀 나아질 거예요.”
샬롯은 간단한 해답을 내놓고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카를 공작저는 침묵했고, 비밀스러운 손님은 여전히 비밀스럽게 디아나의 침실을 넘나들었다. 그리고 오늘처럼 공식적인 손님은 당당히 대문을 넘어서 디아나의 집무실을 찾았다.
“오랜만이군요.”
책상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디아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시선의 끝에서 제롬 하이든이 예를 올리고는 특유의 묘한 미소를 지었다.
“국혼의 파기.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만, 영애께선 잘 극복하시리라 믿습니다.”
“경은 여전히 재기가 넘치는군요.”
제롬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공식적으로는 유감스러운 일이지요.”
“우린 비밀을 보장하는 의뢰인과 변호인의 관계가 아닌가요?”
“영애는 여전히 영명하시군요.”
아까의 말을 제롬이 그대로 돌려줬다.
“축하드립니다.”
이번엔 진심이었다.
“고마워요.”
디아나가 차분히 미소를 지었다. 제롬도 이 일에 관여했기에 디아나가 얼마나 어려운 고비를 넘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어떤 고귀하신 신사분의 도움이 크게 작용한 덕분도 있었다.
“저는 운이라는 걸 믿지 않습니다만, 영애에겐 어떤 축복이 따르는 것 같군요.”
당사자인 디아나의 의지와 영명함, 에드윈의 모든 것을 건 조력, 제롬과 저택의 사람들을 포함한 사람들의 노력. 시아 수녀원의 순수한 선의와 그들이 모르는 황실 내의 어떤 신경전. 어느 한 부분이라도 모자랐다면 지금의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그건 아닐 거예요.”
디아나 카를의 인생은 단순히 어떤 축복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뭘까요.”
“글쎄요. 이유를 밝히는 건 제롬 경의 일이 아닌가요?”
이번엔 제롬이 한 방 먹었다. 디아나는 여유롭게 제롬을 응시했다.
“난, 그저 조금 나쁜 사람이 되기로 했을 뿐이에요.”
“그럼 저는 나쁜 공작의 탄생을 돕는 건가요? 영광이군요.”
디아나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롬은 일어서 책상 위에 자신이 가져온 서류 전부를 펼쳤다. 자유를 얻었으니, 디아나의 것을 완전히 되찾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