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공작저는 고요한 기쁨에 잠겨 있었다. 곧 세간에 소식이 퍼지면 국혼이 파기된 카를가에 동정의 시선이 쏟아지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오늘 공작저의 주인인 디아나 카를은 고난을 넘어 간신히 제 자유를 쟁취했다.
“아가씨, 고생 많으셨습니다.”
“응, 고마워. 그레이도 여러모로 애쓰느라 고생 많았지?”
제법 어른스러운 디아나의 말에 집사장 그레이는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곤하실 테니, 그만 침실로 가서 쉬시지요.”
디아나가 살며시 샬롯의 눈치를 살폈다. 샬롯은 일부러 딴청을 부리며 다른 시녀를 찾으러 갔다. 아직은 비밀스러운 연인을 향한 배려였다. 그리 마음을 졸이며 백방으로 애를 써 준 에드윈에 대한 일종의 선심이기도 했다.
디아나는 더 망설이지 않고 층계를 뛰다시피 올라갔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에 금세 뺨에 발간 생기가 돌았다. 디아나가 벌컥, 제 침실의 문을 열자 내내 창밖을 보고 있던 에드윈이 등을 돌렸다.
“기다리고…… 있었다.”
에드윈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여러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디아나를 기다렸다. 디아나가 국혼에서 풀려나는 기쁨을 품은 채로 제 눈앞에 나타나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디아나는 그 무게를 알기에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순간은 침묵으로 더 많은 것을 나눌 수 있었다.
지금이 그랬다. 디아나는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어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이내 그에게 성큼 다가섰다. 에드윈은 그런 제 연인에게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렸다. 디아나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커다란 품이었다.
와락, 디아나가 에드윈의 커다란 품에 안긴 채로 한참 고개를 파묻었다. 그 아래로 쿵쿵, 에드윈의 심장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모든 것은 현실이었다.
“저도…… 기다렸어요.”
디아나가 에드윈의 품속에서 속삭였다. 그 간절함은 둘만이 알 것이다. 본래 디아나는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여겼다. 몇 번의 삶을 되풀이하고 참담한 죽음을 맞은 기억을 가진 디아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이 마음은,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그대와 나만이 알겠지.”
그러나 디아나만큼 간절한 사람은 있었다. 에드윈은 처음 본 순간, 디아나를 제 마음에 각인했다. 기어코 디아나를 안은 순간, 그는 자신에게 맹세했다. 여생, 이 사랑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디아나는 영원히 그만의 여인이라고도. 그 정도 각오가 아니었으면 황태자비 후보였던 디아나를 안을 수 없었다.
“내가 있는데도, 불안했나.”
에드윈은 이미 그때 결정을 내렸다. 어떤 방식으로든, 디아나를 다른 사내에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래. 어떤 방식으로든. 그게 설령 무력 충돌이 될지라도, 혹은 제국의 범죄자가 되더라도. 에드윈은 이미 자신의 여인이 된, 제 삶의 이유가 된 디아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내, 그대를 보내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디아나가 살며시 에드윈의 품에서 떨어져 그의 눈을 올려 봤다.
“불안했어요.”
“어째서?”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는 디아나를 볼 때만 이렇게 온화하고 부드러운 빛을 띠었다. 디아나가 무슨 말을 하든, 행동을 하든, 아니 그저 눈앞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대견하고 사랑스럽단 눈빛이었다.
“만일 일이 잘못되면…… 전하가 무모한 일을 벌이실 테니까요.”
디아나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에드윈은 디아나의 사소한 몸짓 하나에도 섬세하게 반응하고 늘 다정한 체온을 건네주는 사람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연인으로서였다.
대공인 에드윈 체스터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명성이 꽤 드높았다. 사교계의 좋은 평가도 그 일부였다. 하지만 당연히 그 이면도 있었다.
에드윈은 선대의 이른 죽음이 가져온 공백을 메우기 충분한 지도자였다. 그가 원하는 순간에는 얼마든지 냉혹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뜻이었고, 본래 대공가와 자신이 지닌 무력과 위압감을 휘두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제 말이 틀렸나요?”
에드윈은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디아나도 그 성정을 모르진 않았다.
“다 끝났으니 솔직히 말해 주세요.”
“무엇을?”
슬쩍 시선을 피하는 에드윈의 뺨을 디아나의 손이 잡았다. 에드윈은 그 작은 손 위에 제 손을 겹치더니 장난을 걸려고 했다. 에드윈이 만지작거리던 디아나의 손가락이 에드윈의 입술 가에 닿았다.
에드윈이 그 손끝을 살짝 깨물려는 순간, 디아나가 에드윈을 곱게 흘기며 제 손을 빼앗아 갔다. 그 대단한 위세를 가진 대공조차 이럴 때는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아쉬운 눈으로 디아나를 바라만 봤다.
“만일, 결과가 달랐다면.”
“역사에 만일이란 없어.”
에드윈의 회피가 제법이었다. 디아나를 상대하며 절로 말주변이 늘었는지도 모르겠다.
“전 바보가 아니에요. 전하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기다리고 계실 분이 아니라는 걸 잘 알죠.”
집요하게 추궁하는 디아나의 모습도 에드윈의 눈엔 귀여웠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졌으니 에드윈으로선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아니면 전하는 정말로 아무런 대책도 없는 분인가요?”
이건 도발이었다. 그 속셈이 빤히 보이는데도 에드윈이 넘어갈 수밖에 없는 도발이다.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에드윈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리 대책 없는 사내로 보이나?”
참 우스운 일이다. 고작 이 작은 여인의 한 마디에 제국을 뒤집을 만한 기밀도 순순히 말하고 싶어진다. 이른바, 사내의 자존심이라는 것이다. 에드윈도 결국엔 한 명의 사내였다. 그것도 아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연인을 둔 스물하나의 젊은 사내다.
“그대의 연인을 과소평가하면 곤란하다.”
에드윈은 자신을 곱게 흘기는 디아나를 장난스레 마주 보다가 이내 홱 끌어다 제 품에 가뒀다.
“역시, 뭔가 했군요.”
당사자인 디아나를 배려한 에드윈은 일절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의 결연한 시선에서 이미 눈치챌 수 있었다. 황실의 결정이 어떻든 에드윈은 디아나를 보내지 않았을 거다.
“이제 알려 주세요. 전하의 두 번째 계획을.”
굳이 에드윈이 같은 날 입궁했던 이유가 있었다. 루모스 기사단은 그런 에드윈의 명령을 기다렸다.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면 에드윈은 무력으로라도 디아나를 납치해서 루모스 기사단과 수도를 벗어날 작정이었다.
“그런 건 없어.”
에드윈이 이번에는 디아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굳이 자신이 어떤 희생을 치르려고까지 작정했는지 알리고 싶지 않았다. 오직 디아나만을 이유로 전쟁을 자초할 만한, 제국의 반역자가 되는 것도 각오했던 걸 알면 또 그 처연한 눈빛을 할까 봐.
“그대를 걱정시킬 일은 안 해.”
언제부턴가 에드윈은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늘 같은 색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항상 고요한 수면 같은 푸른 눈동자에도 때때로 슬픔이나 아픔이 묻어났다. 그건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디아나가 그런 눈을 할 때면 에드윈의 가슴에도 저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거짓말.”
디아나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에드윈은 태연히 모른 체했다.
“전하는 가끔 못됐어요.”
“그대는 항상 그렇다.”
예상과 전혀 다른 느긋한 에드윈의 답에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드윈은 그 모습에 당장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일부러 더 뻔뻔하게 디아나를 내려 봤다.
“왜? 사실이잖나.”
에드윈이 손을 뻗어 디아나의 뺨을 감쌌다. 그의 단단한 엄지가 디아나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이 눈빛 하나로 날 애태우지. 그것도 아주 잔혹하게.”
그만큼 설레게 한다는 점이 더 나빴다. 누가 알겠는가. 천하의 대공이 이 작은 여인의 눈빛 하나로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는 것과 어느샌가 그 자신이 그것을 즐기게 됐다는 것을.
“제가 언제…….”
디아나가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에드윈의 손가락이 도톰한 디아나의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이 입술은 더 못됐다. 아니, 아주 나쁘지.”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가 진득하게 디아나의 입술을 응시했다. 여태 이런 존재는 없었다. 장밋빛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뭐든 이뤄 주고 싶었다. 그건 마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는 무엇이든 달콤하게 에드윈의 귓가를 적셨다. 특히 에드윈의 아래에서 환희로 흐느끼는 울음 섞인 소리가 그를 미치게 했다.
덕분에 에드윈은 지금 제국에서 가장 미친 남자가 됐다. 상황에 따라선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각오까지 품었을 정도니 더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흐응.”
디아나가 에드윈을 노려보다가 제 아랫입술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을 냉큼 물어 버렸다. 그러자 에드윈도 참았던 웃음을 지으며 디아나를 제 품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렇게 못된 여인을 왜 품으시나요.”
디아나다운 항의가 담긴 뾰족한 목소리였다. 바둥대는 디아나가 에드윈의 품을 밀쳤지만, 그런다고 밀쳐질 에드윈이 아니라 한층 더 분한 것 같았다.
“그야, 난 관대하니까.”
에드윈이 아예 버둥댈 여지도 없이 디아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대에 한해서라면, 난 이 세상 누구보다 관대해질 수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고백이었다.
“그러다 더 나빠지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디아나는 그 솔직한 고백이 괜히 미안해지려고 했다. 젊은 대공의 앞에 놓인 탄탄대로는 디아나의 등장과 함께 달라졌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장 결혼을 원치 않는 디아나를 연인으로 둔 탓에 에드윈은 또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대공가의 명맥을 짊어진 그에겐 쉽지 않은 결정이리라.
“어쩔 수 없지, 내 버릇을 잘못 들인 탓이니.”
“저는 전하의 말이 아니거든요.”
디아나의 지적에 에드윈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품에 안긴 디아나에게도 고스란히 그 진동이 전해졌다. 그의 목소리처럼 낮고, 다정한 웃음이다.
“그러니 매번 날 이기는 거겠지?”
참 신기한 일이다. 어릴 때부터 승부욕이라면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는 에드윈인데, 디아나를 보자마자 무장이 해제된 것처럼 뭐든, 아무래도 좋아져 버렸다.
“사실, 난 그대가 위에 있는 것도 좋아한다.”
“제가 언제…….”
“글쎄, 언제일까.”
바로 대꾸하려던 디아나가 문득 말을 멈췄다. 에드윈의 은근한 말투에 예배당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땐 경황이 없어서 잘 몰랐지만, 기억만은 무척 선명했다. 너무 선명해서 괜히 디아나의 뺨이 달아오를 정도였다.
“모른다면 지금 재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에드윈이 디아나의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욕망이 서렸다. 마침, 침대도 멀지 않았다. 에드윈은 망설이지도 않고 디아나를 번쩍 들었다.
“아뇨, 기억났어요!”
“그래? 잘됐군. 뭐든 할수록 느는 법.”
“전하는 제가 피로 누적으로 기절하길 바라세요?”
그대로 침대로 향하려던 에드윈이 잠시 멈춰 짧은 고민을 했다. 정말 짧은 고민이었다.
“……그럼 내가 올라가지.”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디아나가 발을 버둥거렸다. 그러나 에드윈과 체격 차이가 너무 나서 마치 어린아이가 반항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에드윈은 그런 디아나의 엉덩이를 톡, 두드렸다. 이건 명백히 디아나를 놀리는 거였다.
“전하는…….”
디아나가 에드윈의 어깨에 올라탄 채로 분을 삭이지 못했다.
“정말로 정말로 못됐어요!”
그러나 디아나가 지르는 분노의 외침에도 무색하게 에드윈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침실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