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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82화 (82/184)

82화

황태자비 검증이 끝났다. 국혼은 깨졌고, 드노아 경도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선대공비조차 감히 아버지에게 맞설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황후를 견제하고 있었지만, 제 아버지의 생각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드노아 경에게는 어느 자손이든 소중할 테고, 그것이 황위를 이을 혈통이라면 더 중요할 것이다.

“카를가의 영애는…… 안타깝지만.”

국혼은 티끌만 한 의혹도 없어야 했다. 지금 드노아 경이 구축한 세력은 황실과의 혈연에서 나온다. 그 정통성이 흐려지면 무너질 성이었다.

“후보였던 샤리즈 후작가의 영애가 있으니 다행이지요. 뭐, 샤리즈 후작은 분수를 아는 자고 밀레타 공국처럼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것보단 낫습니다.”

드노아 경의 결정은 황후의 예상대로였다. 밀레타 공국보단 샤리즈 후작가를 다루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아버님의 조언을 따르지요.”

황후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카를가의 영애도 국혼만 아니라면 부족한 아이는 아니지요. 장래를…… 살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바쁘신 황후께서 그럴 여유가 있겠습니까. 그런 부분은 제가 돕지요.”

선대공비가 바로 치고 들어왔다. 어쨌든 오늘은 황후의 승리였다. 스텔라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제 언니를 상대로 싱긋 웃어 보였다. 늘 한 수 앞서가며 스텔라를 비웃던 얼굴에 딱딱한 미소가 어린 것이 퍽 보기 좋았다.

“이제 국혼을 서둘러야겠네요.”

황후가 오늘의 승리자답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진짜 승자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무도 그 승리를 모르는 채였다.

“그럼, 영애님의 건강을 기원하겠습니다.”

모두 침통한 표정으로 처연한 카를가의 영애를 배웅했다. 그녀는 고귀한 신분답게 따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 심정은 무너질 것이다. 시종장은 일부러 마차의 문을 서둘러 닫았다. 가엾은 영애에게 눈물을 흘릴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마차의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디아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주 앉았던 샬롯도 그런 디아나의 손을 꼭 잡으며 디아나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 이제…….”

디아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 아가씨.”

샬롯이 디아나의 승리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늘 차분했던 디아나지만, 이 순간만큼은 뭐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깊었던 회한이 밀려 왔다. 황후의 마지막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졸였던 가슴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그리 치밀히 준비하고도 매 순간을 불안에 떨었다. 여태까진 단 한 번도 디아나의 의지로 큰 흐름을 바꾼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시도해도 디아나는 실패했다. 결국, 루카스의 비가 되거나 살해당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것 같았다.

“아가씨, 숨을 쉬세요.”

샬롯의 말에 디아나는 자신이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 디아나가 깊은숨을 내쉬자 그제야 이 순간이 생생하게 실감 났다.

“난…… 이제 자유야.”

분명한 말로 내뱉고 나자 뒤늦게 기쁨이 밀려왔다. 디아나의 눈에 투명한 물기가 고였다. 감격과 기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결과물이었다.

“드디어, 내가 해낸 거야.”

“맞아요, 아가씨.”

샬롯은 ‘드디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몰랐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디아나를 축복하고 있었다.

디아나는 드디어 루카스라는 주박을 벗어 던졌다. 반전은 없었다. 디아나의 의지는 이 세계의 강력한 흐름을 거스를 정도로 강해졌다. 언제나 마지막 순간 독살스럽게 나타나던 트리샤의 존재조차, 이번엔 오히려 디아나를 도왔다.

트리샤의 욕망과 비겁한 우정의 가면은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고, 뜻밖의 등장에서도 여전히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마지막 순간, 벼랑에 선 디아나를 배신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대공 전하는?”

바로 다음 순간, 디아나가 떠올린 것은 당연히 에드윈이었다. 그도 일부러 함께 입궁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감히 황실에서 밀회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난밤은 에드윈에게도 길었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순간이 디아나처럼 초조하고 불안했을 거다. 만나지 못해도, 그 마음만은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은 디아나에게 고요한 의지가 되어 줬다.

“글쎄요. 밤손님이 찾아오시기엔 아직 시간이 너무 이른걸요.”

“샬롯!”

짓궂은 샬롯의 말에 기운을 되찾은 디아나가 곱게 눈을 흘겼다.

“이미 소식은 전해졌을 거예요.”

“응……. 그야 그렇겠지.”

“그리고 결과가 나오자마자 출궁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디로 가셨으려나?”

샬롯이 일부러 딴청을 했다. 그간 긴장했던 디아나를 위해 일부러 분위기를 가볍게 풀어 주는 것이다.

“그만 놀리고 말해 줘.”

디아나가 샬롯을 향해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열여덟인데도 이럴 때면 하얀 볼을 부풀린 모습이 꼭 아기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샬롯이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는 디아나의 무기였다.

“그러고 보니 그레이가 아가씨가 외출하신 김에 환기한다고 침실 창을 열어 뒀다던데, 그 양반도 참 쓸데없는 짓을 해요. 그렇죠?”

“그레이가?”

나머지 말은 전부 생략된 모양인지 디아나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물론, 사려 깊은 시녀장의 충고 덕분이겠죠.”

“아…… 그야, 당연하지.”

그제야 디아나가 샬롯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샬롯이 그녀의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뭐든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점과 이렇게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샬롯은 에드윈을 못내 원망하는 체하면서도 항상 이렇게 디아나를 위해 둘을 이어 준다. 그게 디아나의 행복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빚은 곧 아가씨의 부군이 되실 그 비밀스러운 손님께 톡톡히 받아 낼 거랍니다.”

샬롯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리 애지중지 키운 제 아가씨를 냉큼 낚아채다니,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면서도 샬롯은 그 상대가 제국 제일의 신랑감으로 꼽히는 대공이라는 것에 만족했다. 과연, 아가씨의 마음을 얻기에 부족한 상대가 아니다.

“그런데 샬롯.”

“네, 아가씨?”

“난 당분간 결혼할 생각이 없는데?”

디아나가 태연한 얼굴로 엄청난 발언을 했다. 샬롯은 그대로 굳어서 디아나를 봤다.

“……네?”

“응.”

어디서부터 의사소통이 잘못된 거지. 샬롯은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 이제 황태자비 후보에서도 정식으로 제외됐으니 당연히 밤손님인 에드윈과 결혼하는 것이 순서였다. 비록 밀회에서 시작된 관계라고 해도 둘의 사이나 신분을 고려할 때 정식 결혼을 미룰 수는 없었다.

“설마, 대공 전하가 싫어지신 거예요?”

“그런 건 아니야. 그 반대도 아니고.”

“그 반대는 원래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샬롯의 눈동자가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두고 활활 불탔다. 만일 에드윈이 디아나를 배신했다면 샬롯의 손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그럼 왜…… 아가씨, 곧 겨울이에요. 아가씨도 열아홉이 되시는 거죠.”

“알아. 그래서 더 잘된 것 같아.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렇죠, 열아홉이면 아직.”

디아나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곧 열아홉인 디아나는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 루카스의 곁이 아닌, 트리샤의 독기가 없는 새로운 삶을 살기에 아름다운 나이였다.

이제부터의 삶은 디아나의 의지였고 그 결말도 디아나가 찾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지금부터는 그 책의 끔찍한 흐름에서 벗어나서 진정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샬롯.”

“……네?”

벌써 결혼식을 위해 준비할 것들을 떠올리던 샬롯이 뒤늦게 대답했다. 공작 영애와 대공의 결혼은 국혼에 버금가는 경사가 될 것이다. 비록 밀회로 먼저 채어 가긴 했지만, 에드윈은 좋은 부군의 자질이 있었다. 이 모든 것도 샬롯 혼자 앞서가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난, 너무 설레.”

디아나의 뺨에 생기가 어렸다. 푸른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곧 연인과 정식으로 부부가 되고 사랑의 결실을 이루는 행복의 정점이니 그럴 만도 했다.

“당연히 설레실 때지요. 좋은 거예요. 좋은 게 너무 많아서, 참…… 아가씨는 뭐부터 하고 싶으세요?”

“으음, 나는.”

샬롯의 전제는 결혼식의 예복과 꽃장식, 혹은 연회장에 대한 것이었다.

“역시 공작이 되고 싶어.”

깜박, 샬롯이 굳은 채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건 샬롯이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다.

“공작령에 가서 직접 내 영토를 통치하겠어.”

“그리고 또…… 뭔가 있지 않을까요?”

샬롯의 눈동자가 강력하게 결혼을 외치고 있었다. 물론, 지금 새로운 세상을 만난 디아나의 눈엔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그건 말이야.”

디아나가 씩, 한결 밝아진 미소를 지었다.

“그때 가서 생각해 보지, 뭐.”

참으로 해맑은 한 마디는 샬롯의 마음에 폭탄을 던졌다. 그래도 아직 이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샬롯은 그렇다 쳐도 에드윈이 남았다. 이 세상에서 눈이 제대로 달린 사내라면 이토록 사랑스러운 연인과 당장 결혼식을 올리고 싶을 것이다.

여태까진 그 대상이 너무도 완벽한 나머지 국혼의 대상이 되어 불가능했지만, 이젠 자유였다. 조금 시간을 뒀다가 결혼식을 올리면 된다. 그래, 에드윈도 눈이 제대로 달렸으니.

“하지만, 대공 전하는…….”

샬롯이 슬쩍 에드윈을 끌어왔다. 말로는 원망스럽니 못된 밤손님이니 해도 썩 마음에 든 모양이다. 사실 샬롯의 마음에서 이미 두 사람은 부부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그 부분을 조금 걱정했는데.”

디아나가 밝게 말했다.

“전하도 내 의견을 존중해 주신대!”

“아…….”

디아나가 아무리 영명해도, 그 속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모정을 닮은 샬롯의 마음은 모를 것이다.

“그거 참 정말이지…….”

“좋은 소식이지?”

샬롯은 드디어 인생의 자유를 찾고 생명력으로 빛나는 디아나에게 차마 제 속내를 꺼내지 못했다.

“좋은…….”

겨우 따라서 중얼거리는 샬롯의 손을 디아나가 한층 더 세게 잡아 왔다. 샬롯이 여태 본 것 중에서 가장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마치 보석 같았다.

“대공 전하는 이해심이 넓으셔.”

결국 샬롯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너무도 해맑은 디아나의 말과 미소, 눈동자…… 모든 것이 어여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요.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러셔야죠.”

샬롯은 잠깐, 결혼식이라는 멋진 단어에 홀려서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가씨의 행복이에요.”

이토록 행복과 기대에 찬 디아나의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제야 샬롯은 알았다. 제 작은 주인이 그토록 찾던 것은 단지 사랑만이 아니었음을.

“응, 나 이번엔 반드시 행복해질 거야.”

디아나는 누구나 그렇듯이 행복을 원했다. 그 행복의 조건은 자신의 의지와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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