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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81화 (81/184)

81화

이른 오전, 드노아 경이 입궁했다는 소식이 퍼졌다. 황후를 위시한 내궁에선 이미 황태자비 검증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후였다. 황후는 보란 듯이 드노아 경을 부축하며 입장하는 선대공비를 보며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시지요, 아버님.”

드노아 경을 향했던 미소는 이내 선대공비를 보는 순간 지워졌다.

“선대공비도요.”

“황후 폐하께서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그레이스의 위선적인 발언에도 황후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요.”

“황후 폐하는 이 일을 반대했다고 들어서 내 심려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봅니다.”

선대공비가 은근히 황후의 속을 긁었다. 황태자비 책봉이 있기도 전에 이런 소란은 좋지 않았다. 황후의 체면이 깎였을 텐데도 웃고 있는 속이 새까맣게 탔을 것이다.

“그럴 리가요.”

황후가 선대공비를 똑바로 응시했다.

“국혼은 중요한 일이니, 모든 것을 분명히 가리는 것도 좋겠지요. 안 그런가요, 아버님?”

“황후 폐하가 그리 생각을 고쳤다니 다행입니다, 그려.”

드노아 경은 그레이스의 부축을 받아 의자에 앉았다. 아무리 드노아 경이라고 해도 이 이상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황태자비 검증은 이 응접실 너머의 별실에서 은밀하고 확실하게 치러질 것이다.

“늙은이는 여기서 결과를 기다리지요.”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증의 주인공인 디아나는 이미 별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녀장이 예를 갖춰 황후를 안내했다. 선대공비도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쥐며 그 뒤를 따랐다. 드노아 경과의 은밀한 시선을 나눈 후였다. 드노아 경의 눈과 귀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별실의 커튼은 모두 내려져 있었다. 황후와 선대공비가 들어서자 별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앙의 의자에 앉은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다. 디아나는 황후와 선대공비에게 각각 예를 갖췄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수수한 드레스를 입은 채였지만, 청초한 아름다움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카를가의 디아나 영애.”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황후가 디아나 앞에 섰다.

“예, 황후 폐하.”

“지금부터 황태자비 후보 검증을 시작하겠다. 이는 국혼이란 중대사를 두고 내린 결정이니 서운한 점이 있더라도 이해 바란다.”

“저는 황후 폐하의 명을 삼가 받들 뿐입니다.”

차분한 대답이 썩 황후의 마음에 들었다. 황후가 손을 뻗자, 시녀장이 시아 수녀원이 보낸 밀서를 건넸다.

“보다시피, 시아 수녀원은 그대의 정결함을 증명했다.”

황후가 직접 선대공비에게로 밀서를 넘겼다. 선대공비는 그 밀서를 흥미롭게 읽어 내렸다. 소문의 은거 수녀원을 불러들인 건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들의 증명이야말로 디아나 카를이 황태자비에 부합한다는 증거니까.

“그러나 이 자리에서 검증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부분이다. 여기선 디아나 카를이 황실의 일원이 되어 후계를 생산할 수 있을지를 확인할 것이다.”

디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전의들이 나와서 고개를 조아렸다. 황후가 허락의 의미로 손짓하자 전의의 수장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소인들은 명령대로 어젯밤 입궁하신 디아나 영애를 자세히 진찰했사옵니다.”

“결과는?”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결과만 고해라.”

선대공비는 자신이 매수한 전의들이 제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황실의 전의는 기밀이었지만, 드노아 경의 위세와 선대공비의 정보력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우스운 일이었다. 이 검증에 이미 선대공비의 손이 미친 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디아나 영애께선…… 후계를 생산하시기에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황후의 미소가 멈췄다. 그건 별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이 중에서 태연한 것은 디아나뿐이었다.

전의들은 몇 번이고 증상을 되물었고, 디아나와 샬롯은 미리 준비한 대답을 했다. 오히려 시아 수녀원의 검증이 있어 다행이었다. 전의들은 시아 수녀원이 검증한 것을 감히 다시 확인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전의들이 모두 남성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확실한가? 이 문제는 그리 쉽게 다룰 문제가 아닐세.”

선대공비가 침묵을 깼다.

“한 영애의 장래가 달린 일이자, 국혼이 걸린 문제인데 그 목숨을 걸고 증명할 수 있냐는 것이다.”

“황공하오나 디아나 영애님 본인과 평생을 모셨던 시녀장의 이야기도 전부 듣고 어렵게 결정했사옵니다. 저희 전의들은…… 만장일치로 후계자 생산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합의했습니다.”

“만장일치?”

선대공비의 눈썹이 기울었다. 그러나 그녀가 매수한 전의들은 고개를 숙인 채 좀처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황후를 봤다. 오만하고 붉은 미소를 짓고 있는 제 여동생을.

“이리 중대한 사안이니, 만장일치여야만 하겠죠.”

“하지만…….”

“황태자비 검증입니다. 어찌 선대공비께서 그리 동요하시는지요.”

“그야, 아까도 말했듯이 한 여인에게 가혹한 판정이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야…….”

“선대공비께선 늘 그렇듯 참으로 관대하십니다.”

황후가 한 발짝, 그레이스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디아나 영애를 위해 비밀을 묻어 준 겁니까.”

나직한 목소리는 그레이스의 귓가에만 울렸다. 항상 여유 있던 그레이스의 눈매가 굳어졌다. 그 매서운 시선은 바로 디아나를 향했다. 디아나는 둘 사이에 오갔을 신경전을 짐작하면서도 그저 담담히 제 운명을 받아들이는 영애를 연기하고 있었다.

“시녀장의 증언만으로는 부족하지요. 무엇보다 혼인 전의 영애에게 후계자 생산이 불가하다는 판정을 정황만으로 내리겠다는 것이 너무 성급하지 않습니까. 우선 혼인을 하고 시간을 줄 문제입니다.”

“선대공비께서는 항상 옳은 말을 하십니다.”

픽, 황후의 붉은 입술이 비틀렸다.

“들어오라고 해라.”

“예.”

황후는 선대공비를 위해, 그리고 문밖의 드노아 경을 위해 하나의 카드를 더 준비해 뒀다. 선대공비가 더는 자신들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재빨리 깨달은 샤리즈 후작가에서 보낸 선물이었다.

곧,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시녀장의 안내를 따라 들어와서 예를 올렸다. 그러자 전혀 동요가 없던 디아나조차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트리샤 블랑이었다. 완전히 잊고 있던 존재이자, 이곳에 나타날 이유가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분명, 마지막에 들은 소식은 그녀가 샤리즈 후작 영애의 시녀로 고용되었다는 것…… 그 부분에서 디아나는 이 우스운 연극의 퍼즐을 전부 맞췄다.

“황후 폐하와 선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네가 누구인지, 네가 여기 온 이유를 전부 고해라.”

“예…….”

쭈뼛거리는 트리샤가 눈치를 살폈다. 디아나는 그런 트리샤를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행색이 조금 나아졌을 뿐, 디아나가 아는 그 트리샤였다. 붉은 눈동자가 재빠르게 굴러가다가 디아나와 눈이 마주치자 알 수 없는 빛을 띠었다. 일말의 죄책감과 사죄, 혹은 불편함이었다.

“어서!”

“예, 예…… 저는 트리샤 블랑이라 하옵고, 이 자리엔 디아나 카를 영애의…… 어릴 적부터 오랜 친구로서…… 왔사옵니다.”

친구라, 이 얼마나 기만적인 단어인가. 디아나는 냉소를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트리샤는 언제나 디아나의 운명을 가로막았다. 무슨 수를 써도 디아나는 그 흐름을 막지 못했다.

“전의에게 고했던 사실을 그대로 고해라.”

시녀장이 채근했다. 트리샤는 디아나를 향하던 죄스러운 시선을 애써 피했다.

트리샤는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 건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샤리즈 후작의 은밀한 제안이었다. 그제야 트리샤는 자신이 비비안의 인형 대용이 아닌 비장의 카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존재 이유를 채우지 못하면 제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도, 디아나는 이제 곁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다.

“디아나 영애는 아주 어릴 때부터 월경이…… 없었습니다.”

결국, 트리샤가 말을 뱉었다. 트리샤가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진 않았다.

“어른이 되면서 나야 할 체모도 나지 않았고, 올해까지도 월경을 못 한 것으로…… 압니다.”

디아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다른 이들의 눈엔 그것이 체념 혹은 비참함으로 보였다. 열여덟의 영애는 황태자비는커녕 아예 후계자를 생산할 수 없다는 낙인이 찍히게 될 것이다. 무척이나 가혹한 일이었다. 적어도…… 그들의 생각에는.

“소인들이 들은 바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결론도 같사옵니다.”

전의들이 못을 박았다. 황후가 손을 들자, 시녀장이 모두를 내보냈다. 트리샤는 나가면서 흘깃 디아나를 응시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이 죄책감도 잠시라는 것을 트리샤는 어렴풋이 알았다. 만일 디아나가 비비안처럼 곁을 내주고 황태자비가 되어서 함께 입궁을 시켜 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황태자비의 자리를 잃어도 디아나에겐 남는 것이 많았지만, 디아나의 곁을 잃은 트리샤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정당방위라고.

“마지막으로 디아나 영애 본인에게 묻겠다.”

황후의 목소리에 디아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푸른 눈동자였다.

“이 검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가.”

“……예.”

디아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황후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건 모두 제가 부족해서 생긴 일.”

차분하지만, 허망한 목소리가 울렸다. 디아나는 지금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제 지난 생 대부분을 차지하던 이 황실과의 작별이었다.

“제가 부족한 몸이라 황실의 기대를 저버린 것,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저런.”

황후가 다가와서 다정하게도 디아나의 손을 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황후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지난 생에서 제 따귀를 칠 때뿐이었는데, 조금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그대의 잘못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대가 정직하게 고하여 이 황실을 평안하게 했다는 것을 내 잘 알고 있다. 어린 나이에 참으로 속이 깊기도 하지.”

황후가 디아나의 손을 토닥였다. 선대공비는 그 장면을 굳은 미소로 보고 있었다.

“디아나 영애는 너무 염려치 말라. 이것은 국혼이기에 극도로 신중한 문제였다. 허나, 선대공비 전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화살이 선대공비를 향했다.

“예? 내, 무슨?”

그레이스가 황당하게 되물었지만, 황후는 여유가 넘쳤다.

“선대공비의 말씀대로 이것은 본래 혼인하고 시간을 줄 문제다. 어린 영애에게 성급한 판정을 내릴 수는 없지, 암. 다만, 이건 국혼이기에 어쩔 수 없었을 뿐이야.”

이것은 명백한 공격이었다. 그레이스는 처음으로 제 동생에게 제대로 된 반격을 맞았다.

“아까 분명 그리 말씀하셨지요?”

“그건.”

“역시 선대공비는 관대하시지요. 유감스럽게도 디아나 영애와의 국혼은 파기됐으나, 우리 황실은 선대공비의 뜻을 존중하여…… 공식적으로 디아나 영애가 문제없는 신붓감이라 공언하겠습니다.”

선대공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황후는 승리자의 오만한 미소를 지은 후에 먼저 별실을 나섰다. 선대공비는 그에 질까 빠른 속도로 황후의 뒤를 쫓았다.

“후…….”

이렇게 한차례의 폭풍이 디아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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