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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80화 (80/184)

80화

시아 수녀원장의 밀서는 그대로 황후의 손에 전해졌다. 드노아 경이 일부러 시아 수녀원을 불러들인 덕분에 디아나 카를은 이제 공식적으로 정결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그러나 디아나에겐 그 사실보다 에드윈과의 언약이 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는 디아나에게 대공비의 자리를 강요하지 않았다. 이 지겨운 황태자비 검증이 끝나면 디아나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 볼 작정이었다.

“이젠, 정말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디아나가 은으로 된 단검을 매만지며 혼잣말했다. 누군가에겐 언제든 이 상황을 끝내고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이 큰 기회로 느껴지겠지만, 정작 그것을 겪어 본 디아나의 생각은 달랐다.

이전의 생에서 에드윈과의 추억은 오로지 디아나만의 것이었다. 만일 그때 더 깊은 정을 쌓았다면, 똑같은 에드윈을 만날 수 있다고 해도 허무함을 채우기 어려웠을 테다.

“두 번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성유물을 통한 회귀는 항상 지금 시점보다 이후로 돌아오게끔 되어 있었다. 그때도 에드윈이 있겠지만, 그건 지금 디아나와 비밀 언약한 연인이 아니었다. 다시 서로 사랑하게 된대도 지금의 둘이 사라지는 건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이생은 오로지 한 번뿐이다. 소중한 것을 갖게 되었으니 절대로 놓을 수 없었다. 디아나 카를의 인생이었다. 그리고 곧 그 인생은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며칠 후, 진짜 황태자비 검증이 시작됐다. 디아나는 샬롯과 함께 마차를 타고 황실로 향했다. 푸른 눈동자에 흔들림은 없었다. 디아나는 자신의 자유를 쟁취할 것이다.

***

같은 날, 에드윈도 입궁했다. 핑계는 황태자비 검증에 참석하는 어머니와 함께 들러 루카스의 안부를 살피는 것이었지만, 그의 목적 자체는 명확했다. 선대공비는 그런 아들의 속내도 모른 채 내내 말이 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스텔라를 상대로 자신의 승산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하고 있는 것이었다.

“검증은 내일 아침이라면서요.”

에드윈이 침묵을 깼다. 이미 오후가 지났다. 당사자들은 모두 황실에서 밤을 보낼 것이다.

“그래. 하지만 루카스 전하와 너는 참여할 수 없다.”

“외조부께서는…….”

이른 오전, 드노아 경이 입궁하면 그제야 검증을 시작할 수 있었다. 퍽 우스운 일이었다. 황후도 황태자도 아닌 드노아 경의 도착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지금 제국의 판도를 잘 보여 주고 있었다.

“아버님은 물론 큰 어른으로서 참여하시겠지만, 직접 검증을 하는 영애와 마주치진 못해.”

국혼을 앞두고 여인을 검증한다는 것 자체가 민감한 일이었다. 아무리 드노아 경이라도 여인들의 내밀한 장소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루카스 전하께서 괜히 초조해하실 수도 있으니, 네가 잘 달래 드려라.”

“……노력은 해 보죠.”

에드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차피 루카스가 디아나를 가지는 일은 없다. 디아나는 이미 에드윈의 여인이었다. 그날, 예배당에서 신의 이름으로 언약한 후로 에드윈은 더 강한 심지를 갖게 됐다.

신앙심이 깊어서는 아니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진심으로 하는 말엔 어떤 마력이 있었다. 둘은 서로를 평생의 반려로 맹세했다. 앞으로 여생 내내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황태자비 검증이라니, 아버님도 참 쓸데없는 짓을 하신다니까.”

“어머님은 황태자비 후보에 대해 확신하십니까?”

“물론이다. 그보다 완벽한 황태자비는 없어.”

에드윈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샤리즈 후작가의 영애를 지지하던 어머니는 디아나가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손바닥 뒤집듯이 의견을 바꿨다. 즉, 그레이스는 이 게임에서 처음부터 진 것이다. 디아나가 황태자비가 된대도 불임이 아니니 지는 것이고, 황태자비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도 지는 것이다.

“우리와는 크게 관계가 없는 일이죠.”

“너는 꼭 네 아버지 같은 소리를……. 아무튼, 사내들은 모른다. 이런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래서 그레이스는 패배했다. 드노아 경처럼 상대를 파악하고 이용하려고 한 게 패인이었다. 차라리 디아나의 순수한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텐데.

에드윈은 퍽 씁쓸한 눈으로 제 어머니를 봤다. 그레이스가 내막을 안다면 아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할 테다. 그러나 에드윈은 이것을 배신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저, 그레이스의 가르침처럼 비겁자가 되지 않고 옳은 일을 수호한 것뿐이니까.

“그럼, 난 내궁으로 가 보마. 넌 황태자궁으로 가서 전하께 인사를 드리렴.”

“예.”

마차가 황태자궁에서 멈췄다. 에드윈은 가볍게 예를 갖추고 마차에서 내렸다. 딱히 루카스를 만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 핑계가 아니면 입궁하기가 곤란했다.

“뭐…… 상대를 파악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에드윈이 심드렁하게 혼잣말했다. 곧 소식을 듣고 기다리던 시종장이 나와서 에드윈에게 극진한 예를 갖췄다. 황태자궁의 응접실은 여전히 화려했고, 무언가 인간적인 정취가 부족했다. 한때는 이런 곳에서 태어나서 자란 루카스를 동정한 적도 있을 정도다.

“대공 전하, 아뢰옵기 송구한 말씀이오나…….”

시녀가 차를 내오자, 시종장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에드윈이 대충 눈짓으로 되묻자 시종장은 어려운 입을 뗐다.

“황태자 전하께오선 지금 달리 분주한 일이 있으신 터라, 알현이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루카스에게 분주한 일이 있다는 소리는 생전 처음이었다. 루카스를 만나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좋았지만, 그 사유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분주한 일이란 게 뭔지, 내게도 가르쳐 주지 않겠나.”

“그것이…….”

시종장의 얼굴이 곤혹스러웠다.

“비밀에 부치겠다고 약조하지.”

시종장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늘 변덕이 죽 끓는 루카스와 달리 에드윈은 어릴 때부터 의젓하고 대범했다. 에드윈이 꽤 어릴 적부터 지켜본 시종장이기에 지금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시종장은 꾸벅 고개를 숙여서 양해를 구하고는 에드윈의 곁에 바짝 다가서 목소리를 낮췄다.

“국혼을 준비하면서 황후 폐하께서 시침 시녀를 선발하셨습니다.”

에드윈의 입이 묘하게 비틀렸다.

“아직도 그런 풍습이 있었군.”

황실에선 여전히 그런 역겨운 짓을 잘도 자행하고 있었다. 하위 귀족의 여식을 시녀로 속여 입궁시킨 후에 여인의 몸을 가르친다는 구실로 황태자가 범하게 둔 후에 쓸모가 없어지면 궁에서 소리도 없이 내보내는 것이다.

“아무래도 황실의 중대한 일인지라.”

그 변명도 우스웠다. 체스터 대공가에선 진즉 그런 풍습을 없앴다. 에드윈도 여인을 모르는 몸이었지만, 그 상대를 보자마자 나머지는 자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떤 의미론 루카스가 가엾기도 했다. 평생, 그런 소중한 기억은 가져 보지도 못한 채로 이 화려하고 텅 빈 곳에서 살아갈 나약한 제 사촌이.

“황태자비 검증이 당장 내일인 건 알고 계시는가?”

“예. 하오나, 전하께서 참여하실 일은 아닌지라.”

루카스다운 판단이었다. 자신의 비가 될지도 모르는 영애가 이미 입궁해서 긴장 속에 하룻밤을 보내게 될 텐데도 남의 일처럼 시침 시녀를 범하러 가다니, 과연 자기중심적인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어찌…… 더 기다리시겠사옵니까.”

“아니다. 이만 쉬어야겠다.”

“처소를 준비해 뒀습니다. 가시죠.”

시종장의 안내에 에드윈이 몸을 일으켰다. 성가신 만남을 피하다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오늘 밤, 에드윈의 심기는 유난히 불편했다. 자신의 디아나가 루카스 같은 한심한 인간의 비가 되려고 검증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웃기지도 않았다. 다만, 오늘은 참을 것이다. 그 또한 디아나의 당부였다.

“대공 전하의 입궁 소식을 듣고 급하게 준비했습니다만, 가장 좋은 별실을…….”

시종장을 따라서 기나긴 복도를 걷는 도중, 문득 귀에 요사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뚝 멈췄다. 시종장은 난감한 기색이었지만, 차마 대공에게 뭐라 할 처지가 못 되는지라 고개만 푹 숙였다.

“아윽, 전하…….”

하필, 에드윈이 멈춰 선 곳의 방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 살짝 틈이 벌어져 있었다. 황태자궁의 주인인 루카스로선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덕분에 엿듣지 않아도 적나라한 소리가 새 나왔다.

“흐어, 흐으윽! 전하, 거기는…… 아픕니다. 전하, 흐으어…… 흑!”

“아흥, 전하 자비를…… 윽, 아윽!”

“흑…… 전하, 제발. 아흑! 살려…… 윽, 으윽!”

에드윈을 놀라게 한 것은 여인의 목소리가 총 셋이라는 것과 환희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신음이었다. 약간의 통증과 쾌락에 젖어 흐느끼는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신음은 처참하고 고통에 차 있었다.

도대체 여인 셋과 무슨 짓을 하는 건지 호기심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에드윈은 벌어진 문틈 사이를 슬쩍 들여다봤다.

“전부 시끄럽다.”

나신으로 선 루카스의 등이 그대로 보였다. 얼핏 여인 둘이 그 앞에서 엉덩이를 내민 채로 엎드린 모습이 보였다. 루카스는 여인 한 명의 음부에 손 하나를 거의 다 담그듯이 넣은 채로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바닥에 뚝뚝, 피가 떨어졌다. 엎드린 나머지 한 명도 루카스가 내키는 대로 엉덩이며 항문까지 들추고 때론 내리치기까지 해서 발갛게 부은 채였다.

“더 세게 빨아라.”

나머지 한 명의 행방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루카스의 앞에 무릎을 꿇은 여인의 나신이 절반 정도 보였다.

“흐으, 흐으……읍.”

숨이 틀어막힌 사람의 소리였다. 그러다 루카스의 물건을 빨던 여인의 얼굴이 반쯤 보였다. 그 눈에는 핏줄이 발갛게 서 있었고 쾌락은커녕 비참함과 고통으로 가득했다.

“더 깊이!”

루카스가 여인의 고개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크흡.”

가득 찼던 여인의 눈물이 기어이 흘러내렸다. 루카스의 무자비한 손길에 이미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모양이었지만, 필사적으로 참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우연히도 그 여인과 에드윈의 눈이 마주쳤다. 에드윈은 당황했지만, 여인의 시야엔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못 본 것으로 하겠다.”

에드윈은 인간적인 동정심을 애써 외면하고 다시 걸음을 뗐다. 여인들의 신분이나 고용된 목적을 떠나서 신기한 장난감을 다루는 듯한 루카스의 태도가 역겨웠다. 루카스에게 있어 장난감이나 여인이나 모두 하찮고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특히 그 상대가 시침 시녀라면 제 호기심을 풀기에 제격일 테지.

“이곳이 처소입니다. 편안히…… 쉬십시오, 대공 전하.”

간신히 홀로 남은 에드윈이 혼잣말했다.

“구역질이 나는군.”

루카스와 혈연이라는 것이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여태 나약하고 한심하다고 여긴 적은 있었으나 이 정도로 혐오를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그게 에드윈의 본능적인 감정이었는지, 그 상대가 디아나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과민반응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왜 살인을 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야.”

만일, 그 여인 중 하나가 디아나였다면…… 아니, 그럴 가능성만 있다고 해도 에드윈은 그 밤이 오기 전에 루카스를 살해했을 것이다. 그게 황태자든 이종사촌이든 관계없이, 망설이지도 않았을 거다.

에드윈은 드물게 살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강렬한 살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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