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노아 수녀가 주고 간 것은 안도감만이 아니었다. 디아나는 사랑의 가능성과 아직 남은 선량한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여태 디아나가 생을 되풀이하며 보았던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탐욕과 이기심, 집착과 기형적인 애정을 갖고 있던 루카스나 트리샤,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하려 했던 황후, 우아한 자태로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있던 선대공비…… 그 모두와 달랐다.
“어쩌면, 난 너무 일찍 절망했는지도 몰라.”
디아나가 작게 혼잣말했다. 노아 수녀가 디아나에게 준 것은 안전만이 아닌, 희망이었다. 이 세계에서도 사랑으로 따스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샬롯. 괜찮아?”
눈시울이 발갛게 물든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레스턴 백작가의 영애와…… 친구였지?”
마치 남의 일처럼 이야기했던 것은 디아나가 두려워할까 걱정해서였다. 아끼던 친구의 죽음을 무겁게 품고 살던 샬롯은 이제서야 한결 표정이 밝아졌다.
노아 수녀는 떠나기 전, 샬롯과 손을 한 번 꼭 잡았다. 그것뿐이었다. 지난 세월을 구구절절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그저 그것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했고 끌어안았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그녀가 행복했기에 다행이다. 눈앞의 디아나도 행복해질 수 있기에 다행이다.
“응, 정말.”
디아나가 차분히 말했다. 침실에선 에드윈이 디아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디아나와 디아나의 대답이었다. 아마 제법 초조할 테지만, 에드윈 나름대로 디아나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디아나와의 혼인을 원했다. 설령 법적으로 공인받지 않은 비밀 결혼이라고 해도, 그것이 신의 이름으로 치러지고 신을 섬기는 자들이 증인이 된다면 그것은 큰 효력이 있었다. 적어도 이 세상의 교리에선 그것만으로도 사랑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샬롯, 나 다녀올게.”
“결정……하셨어요?”
디아나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실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에드윈을 보고 싶었다. 그 감정이 다였다.
“샬롯은 어떻게 생각해?”
“아가씨가 행복하시다면, 뭐든…… 전 응원할 거예요.”
오늘 옛 친구와의 만남이 샬롯에게 더 큰 믿음을 줬다. 디아나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에드윈을 만나러 자신의 침실로 갈 시간이었다. 디아나는 일부러 똑똑, 노크하고 침실에 들어섰다. 그러자 에드윈이 저벅저벅 다가와서 디아나의 손부터 잡았다.
“기다리셨어요?”
“……그냥.”
절대 아니라고는 하지 않는다. 디아나는 굳은 에드윈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만 웃음을 삼켰다.
“그대의 말을 듣길 잘했다.”
에드윈은 순순히 인정했다. 무력으로 해결하려던 건 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너무도 선뜻 제 잘못을 인정하는 에드윈을 보자 디아나는 새삼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공이라는 지위를 가진, 스물하나의 혈기왕성한 남자가 이토록 쉬이 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디아나가 그를 좋아하는 수많은 이유 중에 하나였다.
“그냥 운이 좋았던 걸요. 만일 상대가 나빴다면 대화를 했어도 전하의 뜻대로 해야 했을 거예요.”
“운이라…… 내겐 그리 느껴지지 않아.”
“전, 다행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 레스턴 영애도…… 행복해져서 다행이라고.”
“그도 그렇군.”
디아나에겐 차마 남일 같지 않았던 사연이다. 자신 또한 몇 번이고 남의 이익에 휘둘려 목숨을 잃었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그 영애를 동정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도 숨겨진 결말을 들었으니 이젠 안심이었다.
“이제는 우리 둘의 문제인가.”
에드윈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 같아선 당장 예배당에 숨어 들어가서 며칠이고 버틸 수 있었지만, 그전에 디아나의 답을 먼저 듣고 싶었다. 디아나는 레스턴 영애와 경우가 달랐다. 굳이 자신의 죽음을 가장하지 않아도 황태자비 후보에서만 탈락하면 그만이니.
“그대의 말은 기억하고 있다. 자신의 인생을 살아 본 후에 내 비가 될지 결정하겠다고 했나?”
낮은 목소리 끝에 희미한 웃음이 배었다.
“네. 전, 결혼이 모든 것의 결말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것이 디아나가 겪은 생에서 배운 것이다. 에드윈에게는 다소 서운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렇군. 그대에게 무엇도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건 여전해.”
에드윈의 말끝이 퍽 씁쓸했다. 그의 결정과 마음은 별개의 문제였다. 당장 세상에 떳떳하게 알리고 대공비로 삼아 매일을 함께하고 싶은 것을, 이렇게 밀회로 참아 내는데.
“아까 노아 수녀의 이야기를 듣다가…… 깨달은 게 있어요.”
디아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가 온 신경을 집중해 그 입술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장 전하의 비가 될 수는 없어요. 황태자비 건이 끝나더라도요. 그 생각은 여전해요.”
“그래.”
에드윈이 애써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쉽진 않았다.
“하지만 이건 대공비가 아니라 전하의, 아니 전하가 아닌 에드윈.”
디아나가 고개를 들어서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를 올려 봤다.
“……당신의 부인이라면.”
순간, 그의 검은 눈동자가 커졌다. 디아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신을 믿지 않는 저지만, 평생 당신의 유일한 반려가 되겠다는 언약을 하고 싶어요.”
디아나는 이미 평생의 인연을 정했다. 당장 대공비가 되고 싶진 않았지만, 여전히 에드윈을 사랑했다. 앞으로도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 없었다. 마음이 이미 그렇게 정해 버렸다.
“너무…… 이기적인가요.”
“아니.”
살며시 걱정을 담아 묻는 디아나의 말에 에드윈이 즉답했다.
“난 그걸로 충분해.”
에드윈의 낮은 목소리에 다정함이 묻어났다. 커다란 손이 디아나의 뺨을 감싸고 사랑스러운 시선을 맞췄다.
“더…… 바랄 것이 없다.”
디아나를 놓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밀회를 나누는 연인으로는 그의 성이 차지 않았다. 그렇다고 디아나에게 대공비가 되는 것을 강요할 수도 없었다. 그가 사랑한 것은 새장 속의 여인이 아닌, 제 발로 걷는 환한 빛의 디아나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 한구석이 타들어 가고 있었는데, 이보다 더 기쁜 말은 없었다.
“일평생, 서로의 유일한 반려라면…… 그대가 영원히 나만의 것이라면.”
“전하도…… 그런가요?”
디아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난 이미 그렇게 맹세했다.”
그 말에 디아나의 입술이 분홍빛 미소를 지었다. 평생을 두고서 유일한 반려를 갖는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한 행복이었다. 에드윈은 그 사랑스러운 미소를 눈에 담다가 이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디아나의 가느다란 목선을 쓸어내리는 손가락이 감각적이었다.
한동안, 달콤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둘은 서로를 평생 독점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성대한 결혼이나 법적인 증명보다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것을 신의 이름 아래 언약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생은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다음 날, 디아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곧 들이닥칠 황실의 근위병을 기다렸다. 샬롯도 긴장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른 아침부터 디아나를 깨끗하게 씻기고 일부러 몇 겹이나 속옷을 갖춰 입힌 채로 무례한 자들을 맞이할 준비가 끝났다. 그러나 오후를 넘기고 해가 져도 그들은 오지 않았다. 비밀리에 시행되는 일이니 밤이 더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아가씨, 두려워하지 마세요.”
“응, 샬롯도 걱정하지 마.”
디아나의 미소를 보자 샬롯은 그제야 자신이 더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아 수녀원은 우리 편이야. 근위병은 날 거기까지 데려갈 뿐이고.”
“그래요. 저, 아가씨. 대공 전하는…….”
샬롯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쯤 버려진 예배당에서 쓸쓸히 기다리고 계시겠지.”
“그럼, 두 분 정말로 결혼을 하기로 하신 건가요? 물론, 그건 당연한 거지만요.”
“음…… 언약이라고 해 둘게.”
디아나가 싱긋 웃었다.
“하긴, 결혼식 때는 황금 마차를 보내고 온 수도에 축제를 열면서 모셔 가야죠. 그래도 부족해요.”
샬롯의 진심 어린 말에 디아나는 웃음을 꾹 참아야 했다. 마침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이제야 황실 근위병이 도착한 모양이다.
“샬롯.”
“네. 문제없어요.”
이제부터 집사장과 샬롯은 디아나를 데려가려는 무도한 황실 근위병을 향해 소란을 피울 것이다. 그들의 연기는 실로 훌륭해서 근위병들조차 꽤 애를 먹어야 했다.
“감히, 우리 영애가 어떤 분이신데! 못 들어옵니다!”
“지금 카를가를 능멸하려는 겁니까?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요!”
디아나는 몰랐다. 샬롯과 그레이는 처음부터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음을. 순진한 디아나만이 그들의 연기력에 감탄했다.
***
황실 근위병은 디아나를 정중하게 모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디아나는 죄인이 아닌 황태자비 후보로서 이곳에 있는 거였다. 다만, 그 장소가 북쪽의 잡목림을 헤치고 가야 나오는 버려진 예배당이었다. 미리 입구에 나와 있던 노아 수녀가 근위대의 마차에서 내리는 디아나를 부축했다.
“여기서부터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근위병을 향해 노아 수녀가 경고했다.
“검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영애가 검증을 통과하면 신의 의식으로 그 정결한 몸을 축복해야 하니, 아침까지 기다리셔야 할 텐데요.”
“상관없습니다.”
근위병의 딱딱한 태도에 노아 수녀는 아무 말도 않고 디아나를 부축해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돌로 지어진 예배당은 밖에서 볼 땐 폐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자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은은한 촛불이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제단은 깨끗이 정돈된 채로 꽃이 올려져 있었고 정복을 입은 수녀들이 디아나를 맞이했다.
“고된 걸음 하셨습니다.”
수녀들 중 가장 연로해 보이는 여인이 앞에 나서 디아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제가 시아 수녀원의 원장, 미리엄입니다.”
미리엄이 성호를 긋고 디아나의 머리 위로 축복을 뜻하는 성수 몇 방울을 뿌렸다.
“나머지도 우리 시아의 자매들이니, 이제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인자한 목소리와 눈가의 주름엔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언젠가는 꼭 보답을 하고 싶어요.”
디아나가 늦은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미리엄은 고개를 저었다.
“이것이 우리 신의 가르침일 뿐, 이 또한 우리의 수행입니다.”
속이 깊은 목소리에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엄이 눈짓을 하자 다른 수녀가 와서 하얀 베일을 디아나의 머리에 씌워 주고 옷을 단정하게 펴 줬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하얀 드레스는 언약을 암시하는 디아나의 마음이었다. 수녀들은 디아나의 단장이 끝나자 조용히 물러갔다.
“우리는 침묵을 규율로 삼습니다. 나와 노아 자매만이 이번 일에 대해 입을 열기로 했으니 나머지가 침묵하는 것을 양해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제단 근처에 수녀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모두 노아 수녀처럼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디아나는 미리엄의 안내를 받아 제단 앞까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주 작은 예배당이라 고작 몇 걸음만 옮기자 제단이 코앞에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