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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76화 (76/184)

76화

모든 일은 미리 상의한 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샬롯만이 제 역할을 잊고서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샬롯 부인?”

에드윈이 샬롯에게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샬롯은 아까부터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이 서 있었다. 진즉 디아나를 달래러 갔어야 하는데 넋이 나간 사람처럼 에드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샬롯 부인.”

재차 불러도 소용이 없었다. 샬롯은 천천히, 걸음을 떼서 딜런이 제압한 수녀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샬롯은 다가와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금 떨리는 손으로 그 뺨을 만졌다.

“엠마……?”

수녀는 그런 샬롯을 평온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어떻게, 네가…… 어떻게.”

샬롯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금세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그렁그렁했다.

“엠마, 너는 그때 죽었을 텐데…….”

그러자 수녀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샬롯을 응시했다.

“그래요. 엠마 레스턴은 그때 죽었습니다.”

에드윈과 딜런은 두 여인의 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둘의 눈빛 사이로 무수한 세월이 스쳐 지나갔다. 타인은 끼어들 수 없는 유대감과 회한, 어떤 감격이 존재하는 순간이었다.

“잠깐. 레스턴이라고……?”

뒤늦게 에드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아 수녀원의 악명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이름이었다. 공국으로 팔려 가기 전, 남편이 될 사람의 요청으로 시아 수녀원에 검증을 받았다가 자결한 비운의 영애는 분명 레스턴 백작가의 막내 영애였다.

“전하. 이분을 풀어 주세요.”

샬롯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요청했다.

“이분의 신원은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에드윈 이상으로 디아나를 위하는 샬롯의 말이다. 에드윈은 어쩔 수 없이 딜런에게 눈짓을 했다. 곧 자유를 찾은 수녀는 두 남자에게 묵묵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자신을 거칠게 포박한 이들에게 조금도 원망의 기색이 없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영애를 만나야 해요.”

수녀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샬롯은 그녀와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단둘이선 안 된다.”

에드윈이 단호하게 막아섰다.

“둘이 아니어도 됩니다. 당사자인 영애가 계시고, 그 영애가 허락한 분이라면…….”

진작 그 말을 했으면 험한 꼴까진 안 봤을 텐데. 에드윈이 드물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보다 디아나를 볼 면목이 없어졌다.

“딜런, 경호를 맡긴다.”

“예.”

딜런이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샬롯은 손수건을 꺼내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잠시 후, 디아나와 샬롯 그리고 에드윈이 한자리에 모였다. 디아나는 에드윈을 슬며시 노려본 후에 샬롯과 수녀의 기류를 살폈다.

“아가씨, 이분의 신원은…… 제가 보증할 수 있어요. 그 이유는.”

“부인. 우선, 저의 의무를 다하게 해 주시겠어요?”

수녀의 말에 샬롯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가의 디아나 영애가 맞으시지요.”

“그래요.”

디아나가 푸른 눈동자로 수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두 사람의 기류에 신경이 쓰였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일이었다.

“저는 예상하신 대로 시아 수녀원에서 보낸 자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제가 먼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녀는 감사의 뜻으로 눈짓을 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전 무력으로 제압을 당할 뻔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태도였다.

“시아 수녀원은 얼마 전, 드노아 반 테스 경의 요청으로 황태자비 검증을 위해 수도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표면적 요청일 뿐, 수녀원에 선택권은 없습니다. 언제나 그래 왔지요.”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는 세상을 등지고 신의 가르침을 따라 침묵하고 복종하며 자신을 수련합니다. 그런 검증 따위…… 우리 신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시아 수녀원은 그런 곳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상황은 어떤가요? 예전에는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제게 주어진 일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다고 말씀드린 것은 오늘, 황실에서 연락이 왔기 때문입니다. 황실에선 어차피 해야 하는 검증, 더욱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 영애를 불시에 데려와 검증을 하도록 명했습니다. 즉, 황실 근위대도 개입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부분에서 수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에드윈을 봤다.

“저희에게 사람을 붙이셨다는 건 압니다만. 황실 근위대가 개입하면 영애를 데려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감히, 공작영애를 납치라도 해서 검증을 시키겠단 건가? 진정 황실에서 그런 짓까지?”

에드윈이 서늘한 목소리로 분노를 뱉었다.

“그렇다면 왜 여기에 온 거지? 더욱 이해가 안 가는군.”

“영애의 뜻을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뭐라?”

에드윈이 눈썹을 찡그렸다. 디아나는 그런 에드윈의 팔을 살짝 잡아 제지했다. 이것은 자신의 문제였다. 에드윈의 보호를 받아서 끝날 일이 아니다.

“시아 수녀원에 이런 요청이 올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흔한 일은 아니지요. 정략결혼 상대를 두고 이미 마음을 준 이가 있다던가…….”

“레스턴 백작가의 막내 영애처럼요?”

“……네.”

수녀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영애는 어떻게 됐나요. 먼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그 영애에겐 따로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습니다.”

수녀가 디아나와 에드윈을 번갈아서 바라봤다. 이 일에 개입했다는 것, 그리고 이 자리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가 그 둘의 관계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죠?”

“시아 수녀원이 도착했을 때, 영애는 울면서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아마 두려웠겠지요.”

마치 남의 일을 말하는 것같이 태연한 어투였다.

“그 영애는…… 밀회를 가졌던 사내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그때문에 자신이 죽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 했지요.”

디아나는 마음 한구석이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금 디아나의 마음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겨우 눈물이 나려는 것을 참는 디아나의 손을 에드윈이 잡아 왔다. 그도 숨길 생각은 없다는 뜻이었다.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숨겨 봐야 의미도 없었다.

“시아 수녀원은 외진 곳의 작은 예배당이나 이미 버려진 예배당을 사용해서 검증을 시행합니다. 미리 장소를 알려 주지 않으며, 그렇기에 공정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영애는 우리 자매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의 사랑을 맹세했습니다.”

어떤 사랑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디아나의 사랑도 다르지 않았다.

“검증엔 당사자인 영애와 수녀원밖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신성입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 후의 이야기예요.”

“디아나 영애의 검증은 이 저택 북쪽의 잡목림에 버려진 예배당에서 치러질 겁니다. 내일 황실 근위대가 영애를 모실 테고, 우리도 그쪽으로 갑니다. 전 그 사실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수녀가 가만히 손을 모았다.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군요.”

“우선, 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소명이었으니까요. 이제 나머지 이야기를 해도 좋겠군요.”

모두의 시선이 담담한 수녀의 말에 쏠렸다.

“……예, 검증이 끝나고 레스턴 백작가의 막내 영애는 죽었습니다.”

수녀가 가만히 한 손을 제 가슴에 얹었다. 그 모습이 너무 고요해서 누구도 말을 끊지 못했다.

“검증이 있던 예배당엔, 전날 밤부터 그녀의 연인이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어떤 선량한 자들의 귀띔이 있었던 거겠죠.”

디아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시아 수녀원은 신의 가르침대로 소명을 다했습니다. 가엾은 영애의 눈물을 닦아 주고, 사랑하는 연인들을 신의 제단 앞에 세워 신성한 부부의 인연을 맺게 했습니다. 비록, 법적으로 부부가 될 수는 없을지언정 신성한 혼인 예배를 치른 이들이기에…… 그들은 신의 이름이 허락하신 부부가 된 것입니다.”

“그런…….”

놀란 나머지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태 디아나가 생각했던 시아 수녀원의 모습이 아니었다. 냉정하고 엄격한 수녀들이 와서 은밀한 곳을 들추고 처녀성을 따질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신의 교리더라도 비인간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속세와 완전히 인연을 끊은 자들이기에 연인의 사랑을 이해할 리가 없다고 믿었는데.

“그렇게 검증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세간에 발표하기 전, 영애는 죽고 말았습니다. 엠마 레스턴은…… 이 세상에서 죽은 겁니다.”

그녀 자신의 이야기였다.

“남은 것은 가문의 이름이 사라진 엠마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따라 제국 밖으로 도망쳐서 소박하지만, 행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그 행복은 진실이었다.

“그리고 신께서 남편을 먼저 데려가셨을 때, 갈 곳이 없어진 엠마는 시아 수녀원에 두 번째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자매들은 노아라는 이름을 주고,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던 남편의 장례를 치러 줬지요.”

과거의 엠마 레스턴, 그리고 현재의 노아 수녀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우리 시아 수녀원이 섬기는 신의 가르침입니다.”

샬롯은 잠자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어째서…… 악명에 잠자코 있었던 거죠? 그것 때문에 드노아 경의 부름을 받게 됐잖아요.”

디아나의 질문에도 노아의 미소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세간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처녀 검증을 받아야 하는 여인을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신을 섬기는 자의 의무가 아닐까요.”

잠시, 정적이 고였다. 잔잔한 노아 수녀의 이야기엔 차마 쉽게 입을 뗄 수 없는 경건함과 진심이 담겨 있었다. 디아나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그들이 믿는 것은 어떤 선량함이었다. 디아나도 그것을 믿고 싶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제 소임은 여기까지입니다. 북쪽 잡목림의 버려진 예배당은 과거 이름이 치노라고 했던가요. 아마 건장한 사내분이 하루 정도 버티기엔 충분할 곳이라고 여겨지네요.”

그 말은 명백히 에드윈을 바라보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굳이 비밀 혼인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영애가 원하는 결론을 내 드릴 겁니다. 신께선 영혼의 깨끗함을 원하시지, 어린 영애의 치마를 들추는 파렴치한 짓을 원하지 않으시니까요.”

디아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노아 수녀를 보았다. 샬롯과 같은 또래인 그녀는 눈가에 고운 주름이 있었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정도의 차림이었지만, 그녀 주위엔 은은한 빛이 있었고 무척이나 평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당신의 삶은…… 행복했나요?”

의외의 질문이었다. 노아 수녀는 다정한 눈으로 아직 어린 디아나를 보았다.

“엠마 레스턴은 불행했습니다만, 엠마라는 여인은 무척이나 따스한 나날을 살았답니다.”

사랑은 틀리지 않았다. 세간에 비운의 여인으로 남은 엠마 레스턴은 죽었고, 엠마라는 여인은 사랑하는 이와 생을 보낼 수 있었다.

디아나가 찾던 답이 노아 수녀의 고요한 눈동자에 은은히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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