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황후의 입술에 물린 가느다란 파이프에서 뿌연 연기가 흘러나왔다. 붉은 입술은 모처럼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언제나 자신만 똑똑한 줄 알았지만, 언제까지나 스텔라만 당하라는 법도 없었다. 실제로 황후가 된 것도 스텔라고 제국의 후계자를 낳은 것도 스텔라였다.
“멍청하긴. 언제까지나 어린 시절과 똑같을 줄 아는 건가.”
픽, 황후의 입에서 실소가 새 나왔다. 선대공비 그레이스는 연막에 능했다. 이번에도 그 연막이 통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을 꼴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쩐지 샤리즈 후작가의 영애에 대한 말이 쏙 들어가더라니.
“그래 놓고서 아버님이 검증을 하자니 찬성하는 꼬락서니란.”
그것도 연막이다. 드노아 경에게 거스르지 않으며 일부러 스텔라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면 반발심에서라도 스텔라가 카를가의 영애를 택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오만.
“후……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걸 꼭 내가 가르쳐 줘야 하나.”
그레이스에게 뒤통수를 맞는 건 질렸다. 이번엔 스텔라의 차례였다. 둘 다 영애일 무렵엔 한 저택, 그리고 아버지의 위세라는 틀이 있었다. 그곳에선 늘 그레이스가 승리했지만, 이젠 달라졌다. 배경은 황실이고 변수는 너무 많았다. 그래, 마치 카를가의 영애처럼.
“황후 폐하, 전의들을 소집했습니다.”
시녀장의 목소리에 황후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스텔라가 지배하는 황실이었다. 전의들의 의견을 미리 정하는 것은 손가락을 튕기는 것보다 쉬웠다. 개중엔 그레이스가 매수한 자들이 있겠지만, 그래 봐야 황실에선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없었다.
“도착하는 대로 들라 해라.”
“예, 폐하.”
황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황태자를 낳은 것도, 황태자비를 결정하는 것도 황후의 권력이었다. 남은 것은 그레이스가 이용하려던 카를가의 영애를 대공비로 떠밀고 그 표정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스텔라는 참으로 오랜만에 순순한 기쁨을 느꼈다.
“참, 시아 수녀원을 잊고 있었군. 아무래도 내가 살짝 돕는 게 좋겠지.”
본래 스텔라는 무슨 수를 써서든 그 수녀원의 검증을 막고 싶어 했다. 결과와 상관없이 고귀한 신분의 영애가 시침 시녀처럼 처녀성을 검증받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오히려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런 검증을 받으며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대공비가 되면, 아주 기쁘게 축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 꾀에 제가 빠지는군.”
훗, 황후가 꽤나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늘 그 말을 하며 자신을 무시하던 것은 그레이스였는데 이제야 그 말을 돌려주게 됐다. 그레이스의 패인은 카를가의 영애를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거다. 설마, 그런 말을 제 입으로 루카스에게 고할 것이라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언니는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다들…… 본인처럼 체면에 목숨을 거는 줄 안다니까.”
드디어 스텔라가 반격할 차례가 왔다.
***
수도에 어둠이 내리자 시아 수녀원에서 이탈해 먼저 들어왔다는 수녀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카를 공작가였다. 미리 감시를 붙이고 기다리던 에드윈은 만류하는 딜런을 제치고 직접 암행을 했다.
평복으로 가장한 중년의 수녀는 다른 길로 새지 않고 밤이 되자마자 카를 공작저에 도착했다. 카를 공작저에도 이미 소식을 보낸 터라, 우선은 그 수녀를 저택에 들이는 것이 계획이었다.
“저어, 실례합니다.”
오늘 밤, 문지기로 가장한 것은 집사장 그레이였다.
“누구요. 여긴 카를 공작저입니다.”
그럴싸하게 연기를 한 그레이도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긴 에드윈도 그 대답에 주의를 집중했다.
“카를 공작저와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들여보내 주신다면 소개장으로 증명하겠습니다.”
“아무나 들일 수 없습니다.”
“우선 확인하시고 쫓아내셔도 좋습니다. 야밤에…… 여인의 몸으로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그레이가 잠시 뜸을 들였다. 뒤에 숨은 에드윈의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다. 에드윈은 그레이에게 통과시켜도 좋다는 신호를 내렸다. 그녀의 말대로 여인의 몸이었다. 여차하면 에드윈이 제압할 수 있었고, 제 발로 온 목적 또한 알아내야 했다.
“그럼, 들어가서 시녀장을 만나 보시오.”
“예…… 감사합니다.”
로브를 깊숙이 뒤집어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성이 꾸벅 인사를 하고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드윈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익숙한 나무를 타고 올라 공작저의 창문을 넘었다. 저 손님의 목적에 따라 오늘 에드윈이 할 일이 달라질 것이다. 어느 쪽이든 에드윈은 망설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잠시 후, 저택에 들어선 수녀는 아직도 로브를 쓴 채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속세와 분리되어 엄격한 수도의 삶을 사는 자들은 대개 얼굴을 가린 채 침묵을 하며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화려한 공작저의 응접실에 선 수녀의 행동이 조금 어색했다.
“전하.”
옆방에서 미리 내 둔 구멍으로 응접실을 엿보던 디아나가 작게 속삭였다. 아직은 저 수녀가 어떤 말을 할지 몰랐지만, 호의적으로 대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막연히 그들이 오고 있다는 생각과 직접 찾아오는 것은 전혀 달랐다.
에드윈은 안심하라는 말 대신에 디아나의 손을 꾹 잡았다. 만일을 대비해 응접실에서 탈출할 곳은 전부 막았다. 유일한 통로는 딜런이 막고 있으니 장정이라도 혼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무 걱정 하지 마라.”
“아뇨, 전하. 그보다…… 먼저 저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디아나의 말에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먼저 나선 게 아니라 드노아 경이 불러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디아나는 그들이 적이라는 증거를 확실히 알기 전까진 해치고 싶지 않았다. 나약한 마음이나 싸구려 동정이 아니었다.
“가능하면 손을 잡을 수 있도록.”
“그래. 가능하다면이다.”
최선은 대화를 통한 합의였다. 그들을 제거하면 의심받는 것은 디아나이고, 또 다른 수녀원이 오지 말란 법도 없었다.
“교섭엔 내가 나설 테니, 그대는 이곳을 벗어나지 않도록.”
그게 에드윈이 내건 조건이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시아 수녀원을 몰살하고 싶을 정도인데, 디아나가 직접 나서지 않겠다는 조건 하에 교섭을 시도하기로 했다. 물론, 상대의 의견이 어떻든 에드윈은 그따위 검증에 디아나를 내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켜보고 있을게요.”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에드윈의 굳었던 입가가 조금 풀어졌다. 곧 엿보는 틈새로 샬롯이 나타났다. 수녀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고 샬롯은 일부러 그녀에게서 가장 먼 자리에 앉았다.
응접실의 끝과 끝자리에 앉은 두 여인의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에드윈은 다시 한 번, 디아나에게 눈빛으로 약속을 받고는 걸음을 옮겼다.
한편, 응접실로 들어선 샬롯은 손짓으로 수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제야 수녀는 가장 끝의 가장 작고 초라한 의자에 앉았다. 보통은 손님의 시중을 드는 시종들이 앉는 곳이었다.
“카를가와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인사조차 생략하고 바로 본론이었다. 하긴, 샬롯에게도 기꺼운 존재는 아니었다.
“……예, 정확히는 카를가의 영애께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샬롯의 눈동자가 냉랭하게 굳어졌다. 확인이라는 단어에선 평정을 잃을 정도였다. 감히, 그리 귀하게 키운 제 아가씨에게 그런 짓을 하려고 하다니.
“영애를 뵙게 해 주십시오.”
“불가합니다.”
차가운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반드시 영애를 뵙고 물을 것이 있습니다. 꼭 만나야 합니다.”
“안 된다고 했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우선, 이것을 확인해 주십시오.”
수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낡은 은십자가는 그 세월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가운데에는 시아 수녀원을 뜻하는 문양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저는…….”
“압니다. 시아 수녀원에서 왔지요? 그래서 더 안 된다는 겁니다. 난 그들이 몇십 년 전에 한 영애에게 했던 끔찍한 일을 알고 있거든요.”
샬롯이 수녀를 매섭게 노려봤다. 비록 그녀가 후드로 얼굴을 가린 채라 눈을 마주칠 수는 없었지만 불쾌감을 전달하기엔 충분했다.
“감히, 무슨 자격으로 우리 아가씨를 검증하겠단 겁니까? 같은 여인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나요. 당신들의 신이 그리 가르쳤습니까.”
“영애를 해치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바로 만나야 해요.”
“내가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아뇨, 당사자에게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을 섬기는 자로서의 맹세이기에.”
수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당분간 이 저택에 당신을 가둬야 합니다.”
“제가 어떻게 되는 것은 상관없지만, 영애를 만나야 해요. 시간이 없습니다!”
대화에 접점은 없었다. 수녀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고, 샬롯은 그런 수녀를 노려봤다. 문밖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에드윈은 진전이 없자 제 차례가 온 것을 알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갑자기 건장한 남자가 등장하자 수녀는 놀라서 몸을 움찔했지만, 에드윈은 아랑곳 하지 않고 수녀의 곁에 섰다.
“내가 누군지 밝힐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대로 널 침묵하게 할 수도 없는 자다.”
에드윈의 낮은 목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수녀는 긴장해서 손을 꼭 쥐었지만,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시간이 없다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 마지막으로 묻겠다.”
위압감 있는 말이었다. 허리에 찬 그의 검이 당장이라도 뽑힐 것 같았다.
“영애에게 무엇을 고하려고 온 건지, 이 저택에 찾아온 목적은 무엇인지…… 지금 고해라.”
단순한 위협이 아닌 진짜 협박이었다. 샬롯은 젊은 대공에게서 살의를 읽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렇게 같은 편이 되자 든든한 사내였다.
“침묵인가. 그것도 하나의 답이지.”
에드윈이 담담히 말하고선 샬롯에게 눈짓했다. 둘은 처음부터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수녀를 겁박할 생각이었다. 지금 샬롯의 역할은 옆방에 가둬 둔 디아나를 달래는 것이었다.
“딜런.”
그의 목소리에 기다리고 있던 딜런이 나타났다. 딜런은 주저 없이 수녀의 목덜미를 뒤에서 제압한 채로 일으켰다. 수녀는 두려운 듯이 몸을 떨었지만, 독하게도 입을 닫고 있었다.
“저 로브부터 벗겨라.”
에드윈의 명령에 딜런이 로브를 걷어 냈다. 꽁꽁 숨긴 것치고는 평범한 중년의 여인이었다.
“내게 말하면 전하겠다.”
“당사자여야 합니다.”
“그렇겠지.”
에드윈이 딜런에게 눈짓하자 딜런은 능숙하게 수녀의 두 팔을 뒤로 모아 손목을 단단한 로프로 묶었다. 쿵, 벽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옆방에서 훔쳐보던 디아나가 낸 소리였다. 이제야 그 방의 문이 밖에서 잠겼다는 것을 깨달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