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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74화 (74/184)

74화

황실은 월동준비와 황태자비 검증에 관한 문제로 무척 분주했다. 루카스는 부산스러운 분위기를 질색했지만, 한 번은 치러야 할 국혼이었으니 딱히 불만을 뱉을 수도 없었다. 그것도 자신의 모후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한 마디로 끝날 문제도 모후와 붙으면 피곤해지는 것을 경험으로 안 탓이다.

“아무튼, 아버님도 너무하시지. 네 비가 될 아이야. 그런 아이를…… 발칙한 소문만 믿고 검증을 하겠다니.”

모후인 스텔라는 아직도 얼굴만 마주치면 저 이야기로 분통을 터트렸다. 루카스는 그 꼴이 퍽 우습다고 생각했다. 모후의 성정에 황태자비가 될 여인을 아껴서는 절대 아닐 것이다. 황실의 일에도 간섭해 오는 드노아 경과 그레이스의 그림자가 증오스러운 거겠지.

“루카스, 넌 아무렇지도 않은 거니? 네 국혼이니 네가 싫다고 하면 아무리 아버님이라도.”

“검증이 필요하다면, 해야죠.”

루카스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차가웠다. 스텔라는 자신을 닮은 루카스의 날카로운 이목구비와 냉혹함을 보며 핏줄은 숨길 수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루카스는 모후를 많이 닮았지만, 그만큼 제 아버지인 드노아 경의 냉혹함도 닮았다. 어쩌면 그런 면은 딸인 스텔라보다 손자인 루카스가 더 비슷했다. 게다가 지금 병상에 누운 황제도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루카스에게서 인간적인 면모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건 황실에서 내 주도로 해도 충분해! 감히 황태자의 국혼에 대공저는 왜 끼려고 하는 건지.”

쯧, 스텔라가 분노의 화살을 제 언니에게로 돌렸다. 대놓고 드노아 경의 흉을 볼 수는 없으니 그 불만이 향하는 곳은 뻔했다.

“분명, 선대공비가 부추긴 게다. 내 체면을 떨어트리려고 말이지.”

루카스는 분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모후를 보며 묘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제게는 그리 엄격했던 모후가 정작 제 부모는 어쩌지 못하는 것이 우스웠다. 황제가 쓰러진 후로 무서울 것이 없는 황후였기에 더 그랬다. 아마 이런 재미난 구경은 좀처럼 할 수 없을 거다.

“선대공비께서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요.”

문득, 루카스는 이 대화에서 빠진 고리를 찾았다. 당연히 모후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일인데, 지금 이 맥락은 이상했다. 무도회가 있었던 밤, 디아나는 고개를 조아리며 선대공비가 전할 일을 자신이 실언했다며 몇 번이고 사죄하지 않았던가.

“네가 몰라서 그런다. 선대공비는 예전부터 사사건건 내 일에 참견을 하려고 해.”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디아나 영애가 직접 후계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이라고 선대공비께 고했다면서요.”

“뭐라……?”

황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모르셨습니까?”

“무슨 말이냐, 그게. 선대공비가 먼저 알았다니?”

“디아나 영애가 그러더군요. 제게 문제가 있는 것을 선대공비께 고했으니 황실에 전해질 것이라고.”

의자의 장식을 쥔 스텔라의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이럴 때 스텔라의 머리 회전은 무척 빨랐다. 또다. 또 그레이스가 자신을 따돌리고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선대공비가…… 알고 있었다고.”

스텔라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떨어졌다. 그런 말은 들은 적도 없었다. 오히려 은근히 압박을 주던 샤리즈 후작가의 영애에 대한 말을 삼가고, 좋은 황태자비를 택했다고 물러섰다.

지금 생각하니 그 또한 기만이었다. 마침, 후계를 생산하지 못하는 허울 좋은 영애를 황태자비로 들이밀고 스텔라를 속인 채 대공저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기 위한 사악한 수작이었다.

“어마마마?”

“하하, 하…… 그래. 그럴 수 있지.”

부들부들, 떨리는 스텔라의 손과 불거진 혈관이 그 분노를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말을 꺼낸 루카스조차 예상치 못했던 파란이었다. 루카스에겐 제 어머니의 회한이나 억울함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루카스는 하나뿐인 황태자였고, 모후의 감정은 제 몫이 아니었다.

“굳이 전하지 않아도, 선대공비께서 이번 검증에 찬성하셨다면서요.”

무심한 루카스의 말에 스텔라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악에 받친, 증오가 피운 미소였다.

“그래야 더 재미있는 함정이 되지 않겠니? 끝까지…… 날 속이려는 발칙하고 저열한 짓거리다.”

루카스는 별다른 감정이 없는 눈으로 제 어머니를 응시했다.

“하, 그것도 모르고 검증을 반대했던 날 얼마나 비웃었을까.”

그레이스는 영리했다. 스텔라가 제 뜻에 반발할 것까지 계산한 거다. 그러고서 후계를 얻지 못해 속이 타들어 가는 스텔라를 보며 보란 듯이 대공가의 대를 이어 나갈 작정이었겠지.

“루카스.”

“예?”

스텔라가 자리에서 일어서 제 아들에게 다가왔다. 아무리 서슬 퍼런 황후라지만, 하나뿐인 제 아들에겐 무척 각별한 모후다. 스텔라는 아까 분에 떨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루카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게는…… 네가 있어.”

아무리 에드윈이 건재해도, 그레이스가 그 뒤를 조종한다 해도, 제국의 황태자는 제 아들인 루카스였다.

“에드윈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지.”

그것만큼은 루카스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모자는 묘하게 서로를 닮았다.

“그런 당연한 말씀을 뭐하러.”

루카스의 눈동자가 오만하게 빛났다. 스텔라는 그곳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마지막에 웃는 것은 그레이스가 아니라 스텔라가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분노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스텔라의 목소리가 평온을 되찾았다. 한때, 황실을 지저귀는 방울새라 불렸던 사랑스러운 여인의 흔적이었다.

“그리 좋은 영애라면, 대공가에 선물로 주는 것이 큰 자비가 아니겠니?”

“카를가의 영애를, 말입니까?”

루카스는 달밤의 디아나를 떠올렸다. 확실히 아름다운 미모였다. 짧은 순간 봤을 뿐인데도 아직 루카스의 뇌리에 남아 있다는 점이 그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탓일까. 막상 둘만 남았을 때 디아나의 태도는 루카스의 성에 차지 않았다. 아무리 고아한 영애라 칭송받아도 루카스 앞에선 모두 똑같았다. 디아나도 루카스를 두려워하며 자신의 실언을 비굴하게 사과했다.

“그래. 네가 버린 영애를 대공가에서 주워다 비로 삼는 거다.”

과연, 어머니는 제 자식을 잘 알았다. 루카스의 입에 묘하게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건 재미있겠군요.”

에드윈은 고작 3년 먼저 태어났을 뿐인데도 모두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루카스가 뭘 처음 해내더라도 그건 이미 에드윈이 더 어린 나이에 해낸 일에 불과했다. 그뿐인가. 루카스의 성장은 모두 에드윈이 거쳐 간 과정과 비교를 당했다. 에드윈이 당연히 해낸 일을 루카스가 해내지 못하면 외조부인 드노아 경은 드러내놓고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이젠 피차 성인이 되었으니, 내가 앞에 설 필요가 있겠죠.”

늦게 태어난 것은 바꿀 수 없었지만, 루카스는 황태자라는 지위가 있었다. 에드윈만큼 자라지 못한 것도, 그처럼 건장하고 모두의 인망을 받는 사내가 아니더라도, 더 위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이제부터 보여 줄 것이다.

“샤리즈 후작가의 영애도 아름답고, 총명하다지.”

“어마마마 뜻대로 하세요.”

어차피 황태자비는 누가 됐든 대만 이어 주면 그만이었다. 루카스에게 있어 정비란 고작 그 정도의 의미밖에 안 되는 존재였다.

“오냐, 내 사랑스러운 아들.”

톡톡, 황후가 어린아이를 대하 듯 루카스의 뺨을 두드렸다. 붉은 입술은 다시 우아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럼, 진짜 국혼 준비를 시작해야겠다.”

황후의 눈이 묘한 빛으로 반짝였다.

“루카스. 곧 시침 시녀를 몇 선발할까 하는데.”

“시침 시녀?”

“황실의 옛 풍습이란다. 여인의 몸을 알아가는 것도 황족의 의무지.”

흐음, 루카스의 입에서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인에 대한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찾을 만큼 아쉽지도 않았다.

“모두 이 어미에게 맡기렴.”

황태자비 검증을 고작 며칠 앞둔 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

샤리즈 후작의 집무실에 불려갔다 온 비비안의 표정이 영 심란했다. 물론, 그것을 다독이는 것도 기분을 풀어 주는 것도 트리샤의 몫이었다. 국혼 전까지 비비안의 비위를 맞추려고 고용된 처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다.

“비비안, 표정이 왜 그래?”

갈색의 커다란 눈망울이 트리샤를 바라봤다. 트리샤는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비비안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비비안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유순한 인상의 비비안은 청초하고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매력이 있었다. 갈색의 차분한 눈동자처럼 곱게 빗어 내린 머리카락, 여성스럽고 매사에 조심스러운 몸짓은 귀족 영애의 귀감 그 자체였다.

“그냥…… 트리샤, 오늘 내 침실에서 같이 잘래?”

“그럼. 난 언제든 좋아.”

친구로 고용된 처지라는 것은 꽤 묘했다. 이럴 때 귀찮은 내색을 숨기고 웃어야 하니 말이다. 트리샤의 진짜 친구였던 디아나와의 시간과는 모든 것이 사뭇 달랐다.

함께 재잘거리고 친자매처럼 같은 옷장에서 나온 옷을 입고 인형 놀이를 하던 그 반짝이던 시절…… 아무리 비비안이 선하고 트리샤에게 우정을 느끼고 있대도 디아나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어렸던 디아나의 웃음소리, 천사같은 모습, 신비로운 푸른빛의 눈동자를 떠올리면 사교계 제일의 영애라는 비비안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물론, 이 또한 트리샤가 내색할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있잖아, 트리샤.”

비비안의 커다란 침대에 함께 누워 마주 보자 물씬 디아나의 생각이 나서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응, 왜?”

트리샤는 건성으로 비비안의 말을 넘겼다. 어른들이 멋대로 갈라놓지 않았더라면 지금 디아나와 함께일지도 모르는데. 트리샤는 아직도 그 믿음으로 지난 추억을 미화하며 살아갔다.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내가 황태자비가 될 거래.”

“좋은 일이잖아.”

“그건 그런데…… 난, 입궁한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워. 당연히 디아나 영애가 될 줄 알았는데.”

비비안이 아무리 엄격한 귀족 교육을 받았어도, 나름대로 꽃같이 싱그러운 미인이라도, 디아나가 있는 한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건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디아나의 존재감이 너무 압도적인 탓이다.

“저기, 트리샤는 원래 디아나 영애의 친구였지?”

“응, 어릴 때부터 가장 친하고 유일한 친구였지.”

그게 트리샤의 가장 큰 자부심이었다.

“혹시, 황태자 전하께서…… 내가 디아나 영애보다 예쁘지 않아서 실망하시면 어쩌지?”

트리샤는 비비안의 질문이 무척 한심하게 느껴져 웃음이 날 지경이었지만, 제 처지를 생각하며 애써 참았다.

“아냐, 비비안. 내가 말했잖아. 디아나 영애도 예쁘지만, 비비안 너도 무척 예쁘다고.”

“정……말?”

“응. 비비안은 지금도 충분히 예뻐.”

그래도 디아나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트리샤의 진심이 생략된 속삭임에 비비안은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조금 표정이 풀어졌다.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어서 자자. 좋은 꿈을 꾸면 기분도 좋아질 거야.”

“나…… 트리샤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비비안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여전히 트리샤의 손을 꼭 쥔 채였다.

“나도 비비안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이것만은, 트리샤도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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