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에드윈이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그대는 나를 부끄럽게 하는군.”
정작 위협에 놓인 것은 디아나인데도, 그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동요하는 것은 에드윈이었다. 혹시라도 디아나가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디아나의 말처럼, 그는 최악의 경우가 오면 시아 수녀원의 모든 수녀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들을 해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 그런다고 내 외조부가 뜻을 꺾을 리 없으니. 내가 어리석었다.”
“제가 아니어도, 전하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는 분이에요.”
디아나가 말리지 않았어도 에드윈은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백성을 지배하는 대공이었지 일개 살인자가 아니었다. 그리 쉽게 더럽혀질 명예나 긍지 또한 아니다. 디아나는 자신이 아는 에드윈의 모습을 굳게 믿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과 대화를 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요?”
“진정, 그렇게 생각하나.”
“시도는 해 볼 수 있겠죠.”
에드윈은 디아나의 도량에 속으로만 감탄했다. 보통 귀족 영애에게 감히 자신의 몸을 헤집어 검사하려고 오는 일행은 죽여 마땅한 적일 것이다. 그런데도 디아나는 그들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하의 말씀대로, 시아 수녀원이 오지 못하게 막는다고 해도…… 이 문제는 끝나지 않아요.”
드노아 경은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질 것이다. 결국, 디아나는 어떤 식으로든 검증을 통과해서 황태자비가 될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샬롯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샬롯이 젊었을 때 레스턴 백작가의 막내 영애가 정략결혼 상대의 요구로 시아 수녀원의 검사를 받았다고.”
“나도 제롬에게 들었다.”
에드윈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좋지 않았다. 그게 디아나가 된다고 상상만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에드윈은 자신의 소중한 디아나가 그들의 손에 멋대로 검사당하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저도 싫어요.”
디아나가 에드윈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자신의 몸은 연인에게만 보여 주고 싶었다. 그게 내밀한 곳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자꾸 한심한 꼴을 보이는군.”
가장 동요가 클 디아나를 두고 에드윈이 벌써 이렇게 걱정을 하는 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전하가 저 대신 화를 내 주시니 기분은 나아지는걸요.”
그 말도 사실이었다. 에드윈은 마치 제 일보다 더 심하게 걱정하고 화를 내 주고 있었다. 아마 디아나에게 해를 끼친다면 무고한 자들을 해칠지도 모른다. 디아나로선 처음으로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달콤한 애정을 속삭이는 것 말고도 이토록 사랑을 증명할 방법이 있다는 걸 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야…… 그대의 일은 내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심지어 대공의 명예와 긍지보다도 중요했다. 그래서 에드윈은 제 손을 더럽힐 생각까지 할 수 있었다. 자신도 믿을 수 없는 변화였지만, 이미 심장이 그러길 원했다.
“괜찮아요. 전 괜찮을 거라고 믿어요.”
“그저 믿는 건가.”
이 모든 고난 앞에서 디아나는 너무 여려 보였다. 그래서 에드윈은 제가 무력하게 느껴지고 가슴이 아팠다. 디아나가 미소를 짓고 있기에 더욱 마음이 시린 것이다.
“아뇨. 정확히 말하면…… 믿을 수 있는 거예요.”
디아나의 청아한 목소리가 곧게 울렸다. 여태 디아나는 항상 혼자였다. 가혹한 운명을 피할 방법을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시도했다. 그 대가도 모조리 혼자 받아야 했다. 항상 비참하게 혼자서 죽어 간 것이다.
“지금은 혼자가 아니잖아요.”
에드윈이 있었다. 샬롯이 있고 그레이가 있었다. 모두가 제 일처럼 디아나의 문제를 고민했고 행복을 위해 애써 주는 지금, 두려움은 그 어느 때보다 적었다. 만일 또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한다고 해도, 적어도…… 디아나는 고독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방법이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어요.”
굳건해진 것은 마음만이 아니었다. 디아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방법을 찾았다. 샬롯과 그레이가 옆에서 도우니 훨씬 일이 빨랐고, 지혜를 나눌 수도 있었다. 거기에 제롬도 해박한 지식을 보탰다.
“선대공비 전하께서 전의를 매수하셔도 전부를 매수할 수는 없어요. 드노아 경이 자기 사람을 심어 놓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죠.”
“그렇겠지.”
“그렇다면 전, 분명히 불임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어요. 모두…… 절 위해서 증상을 찾아 줬고 이미 완벽하게 숙지했어요. 다른 증인이 있다면 좋겠지만, 이미 샬롯이 있고요.”
“하지만 시아 수녀원은…… 그들이 하려는 건…….”
에드윈이 말끝을 흐렸다. 이 문제는 에드윈의 깊은 죄책감을 건드렸다. 달콤한 사랑의 밀회에서 선을 넘어 끝내 디아나를 안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아무리 디아나가 제 의지였다고 말해도 가책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일 시아 수녀원이 그걸 문제로 삼아 디아나를 비난한다면 에드윈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으리라.
“그것도 어쩌면 돌파구가 있을 것 같아요.”
디아나가 살짝 속삭였다. 그러자 에드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분명, 그 밤은 꿈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때 디아나의 몸을 닦아 낸 제 상의를 남모르게 보물처럼 보관한 에드윈이다. 그곳엔 디아나의 은밀한 곳에서 새어 나온 혈흔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때 분명히…….”
에드윈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디아나도 괜히 시선을 피하며 다른 곳을 봤다. 겨우 하룻밤을 보낸 사이였다. 그것도 희미한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안았기에 아직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퍽 어색했다.
“그게…….”
매사에 분명하던 디아나도 말끝을 흐렸다. 서로 말을 해야 알 수 있는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대로 입을 닫았다간 에드윈이 정말 시아 수녀원에 무슨 짓을 할지도 몰랐다. 살해는 아니더라도 납치 감금까지는 충분히 가능한 표정이었으니까.
“여인의 몸에 관한 것인데…….”
겨우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후, 디아나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냥 이대로 말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에드윈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는 것보단 그게 나았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막 시작한 연인 사이에서 노골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디아나는 이 현실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한 번의 관계로는…… 그…… 막이 완전히 파손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대요.”
결국, 디아나가 뱉었다. 그러고 고개를 들어 에드윈을 보자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사실 이건 디아나의 현대적 상식이 떠올린 발상이었다. 디아나는 처녀막이 정말 꽉 막힌 온전한 막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한 번으로는 전부 파손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도 알았다. 게다가 신체 부위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긴 법이었다. 현대 의학도 아닌 은거 수녀원이 상대라면 충분히 속일 수도 있는 문제다.
“샬롯도 부인과 서적을 찾아봤는데…… 실제로 초야 후에도 몇 번은 출혈이 있다는 기록이 꽤 있어서요.”
디아나는 조금 뺨을 붉히면서도 할 말을 다 해냈다. 에드윈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그제야 뒤늦게 디아나의 말을 이해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에드윈의 기억 바닥에서 루모스 기사단원들의 화려한 경험담이 고개를 들었다. 누가 말한 건지 모르겠지만, 몇 번이나 밤을 보냈는데도 그때마다 상대 영애가 아파하며 피를 흘리는 통에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에드윈이 간신히 답을 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바로 떠올랐다. 물론 그 출처도 루모스 기사단이었다. 소꿉친구인 영애라 절대 다른 사내와 접점이 없었는데 첫날밤부터 수월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나.
“전부 그렇다는 장담은 없어. 아, 물론 내 이야기가 아니라…… 들은 거다.”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한 에드윈이 큼, 헛기침했다.
“그건 내진을 하면 알 수 있어요.”
“수녀원이 오기 전에 확인해야 안심이 되지 않을까?”
타당한 의견이었다. 그런데 왜 디아나의 뺨이 확 붉어졌는지 모르겠다.
“그, 그건…….”
어느새 에드윈이 물씬 다가왔다. 디아나는 이제 뺨이 붉어지다 못해 타는 듯이 쓰라린 것을 느꼈다.
“마침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군.”
“전하……? 굳이 그걸 전하께서…….”
“내가 아니면 누가 하지?”
“디아나. 그대의 꽃잎을 들추고 은밀한 곳을 볼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에드윈의 뜨거운 숨결이 디아나의 목덜미에 고스란히 닿았다. 디아나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에드윈의 입술이 그대로 디아나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하얀 목덜미를 간질거리는 뜨거운 입술과 귓불에 닿는 그의 숨결이 감각적이었다.
나른하고 끈적한 목소리가 엉겨 붙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것만은 누구에게도 허락할 수 없어.”
에드윈은 디아나의 귓가에 확실하게 선언한 후, 다시 사랑스러운 눈으로 제 연인의 모습을 담았다. 디아나는 떨림을 품은 채 그런 에드윈을 마주 봤다. 그러자 이내 에드윈이 입술을 맞췄다.
이제 디아나의 입술을 열고 제 혀로 그 안을 헤집는 것이 꽤 능숙했다. 디아나는 깊은 키스를 나눌 때마다 숨을 쉬기 어려운 느낌과 어딘지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흐으…….”
에드윈의 말캉한 혀는 디아나의 입천장을 세세하게 훑고, 그 사이에서 얽힌 디아나의 혀를 감아서 희롱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종 이를 세워 디아나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고 이내 숨을 돌릴 만하면 그대로 강하게 흡입했다.
“흡.”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서로의 혀만 섞었을 뿐인데 벌써 열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에드윈의 커다란 손이 어느샌가 디아나의 가슴을 쥔 채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특히 그의 손가락이 집요하게 가슴의 중심을 더듬고 살짝 집어 낼 때는 절로 허리가 움찔하고 떨렸다.
“흐……읍, 전하…….”
벌어진 디아나의 입술 사이로 겨우 말이 나왔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도톰한 입술로 그런 소리를 흘리니 에드윈으로서는 이미 제 본능적 열기를 주체하기 힘들 정도였다.
“전하, 더는…… 안 돼요.”
숨을 참느라 촉촉해진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에드윈을 올려다보며 간절히 말했다. 그 장면에서 에드윈은 심장이 멈출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낮은 탄식을 뱉었다. 야속하게도 디아나의 작은 손이 에드윈의 탄탄한 가슴을 밀어냈다. 지금 이 순간 에드윈은 야반도주하는 연인의 심정을 완벽하게 이해해 버렸다.
“확인만 할 것이다.”
에드윈이 휘몰아치는 격정을 애써 누르고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적어도 그는 그렇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