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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70화 (70/184)

70화

에드윈은 디아나의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와락 자신의 연인을 끌어안았다. 그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줄 알았는데 정작 디아나의 얼굴을 보자 전부 잊히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지난 며칠, 만나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의 존재가 마치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 애타는 마음은 둘만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겨우 서로를 껴안자 그간의 불안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백 마디의 말보다 진심을 품은 서로의 체온이었다.

“디아나.”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에드윈이 조심스럽게 디아나를 안아서 제 품에서 떼어 냈다. 갈증을 채우고 나자 디아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 푸른 눈동자를, 장밋빛으로 물든 뽀얀 뺨을, 무엇보다 자신을 부르는 도톰한 입술까지. 전부 그대로인지 꼭 제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전…… 괜찮아요.”

디아나의 청아한 목소리가 에드윈의 가슴을 울렸다. 숨기려 해도 제 눈에서 걱정을 읽은 모양이다. 매사에 강하고 덤덤한 대공도 제 연인 앞에선 감정 하나 숨기기 어려운 사내에 불과했다.

“모두가 함께 저를 도와주고 있으니까.”

오히려 디아나가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에드윈을 보고 있었다.

“저는 두렵지 않아요.”

에드윈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두려웠던 건 에드윈 자신이었다. 이대로 디아나를 품에서 빼앗기는 것이 두려웠고, 그녀가 아프고 힘들까 봐 걱정됐다. 무엇보다 디아나가 제게 안긴 것과 달콤했던 밀회의 순간들을 후회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사랑하고 아낀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상처를 낸 것이 자신이 되는 것이 무서웠던 거다.

“그대가 나보다 강하군.”

그 말에 디아나가 수줍게 고개를 저었다.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이런 위험을 무릅쓰는 에드윈이야말로 마음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감정도 디아나를 고작 여인 하나로 여기지 못하게 할 만큼 강했다.

“난, 보고 싶었다.”

에드윈이 꾸밈없는 말을 뱉으며 디아나의 뺨을 감쌌다. 그러자 디아나가 커다란 손에 제 고개를 살짝 기댔다. 검을 잡느라 거칠어진 손인데도 디아나에겐 어떤 솜털보다 포근하게 느껴지는 손이다.

“눈을 떠도 아른거렸고, 눈을 감아도 아른거려서 손에 잡히는 게 없었어.”

에드윈의 저음이 전하는 직선적인 고백에 디아나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처음으로 겪어 보는 연인의 사랑이었다. 이전의 생에선 호감을 품은 채로 끝나야 했고, 처음 책에 들어왔을 땐 이미 에드윈은 죽은 후였다. 연인이라는 기록으로는 이런 애정을 쉬이 상상할 수 없었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이런 말을 하면서 뺨을 붉히게 될 줄 몰랐다. 그의 체온이 이토록 안도감을 주게 될 줄, 타인에게 이렇게 모든 것을 내어 주면서도 무방비하게 행복을 느낄 수 있을 줄…… 전부 상상도 못 했던 감정들이었다.

“나만큼은 아닐 테지.”

“그건 전하께서 모르시잖아요.”

“아니, 안다.”

에드윈이 씩,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를 번쩍 들었다. 디아나가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굳건한 에드윈의 체격엔 아무런 타격이 되지 못했다. 별수 없이 디아나는 에드윈에게 몸을 맡겼다. 에드윈은 침대까지 다가가서 조심스레 디아나를 내려놓았다.

“좀처럼 잘 수가 없었다. 그러다 몸이 지쳐 깜박 잠이 들었다 깰 때면, 몽롱한 정신에 이 침대에서 깨어나는 꿈을 꿨다.”

에드윈이 디아나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내 기억력이 그리 좋은지 처음 알았다. 단 한 번 누웠던 침대의 기둥이며 이불의 무늬까지 선명하더군. 그게 날 더 괴롭게 했지만.”

말끝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이러니 딜런이 눈치를 챌 수밖에. 사랑과 감기는 숨길 수가 없다더니 지금 에드윈의 모습이 딱 그랬다.

“그 후로…… 아픈 데는 없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고.”

그 의미를 깨달은 디아나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 내가 그대를 아프게 한 것 같아서.”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에드윈은 몇 번이고 그 밤을 떠올렸고, 낮이고 밤이고 주체할 수 없는 열기에 시달렸다. 한번 눈을 뜬 본능은 쉬이 잦아들 줄을 몰랐다.

에드윈은 간신히 잠이 들어도 이내 그날 밤의 잔상에 더운 숨을 몰아쉬며 깨곤 했다. 심지어 유년기 이후로는 하지 않았던 몽정을 해서 당황하기도 했다. 에드윈이 그렇게 당황한 적은 아마 성인이 된 후 처음이었을 거다.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함께…… 있었잖아요.”

에드윈은 디아나를 안은 후에도 곁을 떠나지 않고 세심한 애정을 보여 줬다. 하도 떠날 생각을 않아서 오히려 속이 탄 디아나가 에드윈을 겨우 내쫓았을 정도다. 그러자 직후에 동이 텄다. 아마 떠밀지 않았으면 에드윈은 대공의 체면에도 불구하고 공작저의 옷장에 숨는 신세가 됐을지도 모른다.

“내 성엔 차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 에드윈이 디아나를 뒤에서 안고서 슬쩍 누웠다. 그러자 둘은 나란히 한 방향을 보며 침대에 누운 자세가 됐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 붉어진 디아나의 뺨을 에드윈이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전하의 성에 차려면 그 후로 몇 날 며칠을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디아나의 귀여운 일침에 에드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부족하지.”

“전, 전하의 생각보다 튼튼해요.”

“그래도 걱정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하게 해 주겠나.”

“……그러죠.”

실제로 첫날밤을 보내고 난 후 디아나는 몸살로 누웠다. 아래가 쓰라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전신의 근육통 때문에 돌아눕기도 쉽지 않았다. 디아나는 제 몸에 그렇게 다양한 근육이 있는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평소 존재조차 몰랐던 부위가 죄 비명을 질러 댔다.

“많이 아플까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에드윈은 제 아래에서 흐느끼던 디아나를 떠올렸다. 그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순간의 열기가 넘쳐서 당시엔 그게 최선이었다. 무엇보다 제 물건의 크기는 에드윈도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었으니.

“하지만 샬롯에게 들켰어요.”

“아…….”

디아나도 사랑이 가져온 변화를 숨기지 못했나 보다.

“그리고 마음 단단히 드세요. 샬롯이 전하를 엄청나게 원망하고 있거든요.”

“어쩔 수 없지. 이렇게 아름다운 그대를 내가 품었으니, 원망을 받아도 억울하지 않다.”

에드윈다운 대범한 말이었다. 디아나는 소리 없이 그의 품에서 미소를 지었다. 에드윈은 계속 뒤에서 디아나를 껴안은 채로 작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한시도 디아나를 만지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저…….”

디아나가 뭐라 말하려 입을 떼며 살짝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자세가 여의치 않아 오히려 에드윈의 품에 몸이 더 밀착됐다.

그 후 디아나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제 엉덩이에 닿는 딱딱하고 뜨거운 것의 존재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건 에드윈도 마찬가지였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만큼, 뜨거운 침묵이었다.

“아니. 아니다.”

무엇이 아닌지는 분명히 하지 않은 채로, 에드윈이 황급히 하체를 떼어 냈다. 디아나도 어색하게 몸을 돌려 살짝 간격을 둔 채로 에드윈과 마주 봤다. 그래 봐야 이미 둘 사이의 숨결이 뜨거웠다.

“오늘은…… 그러려고 온 게 아니니까.”

큼, 에드윈이 헛기침을 했다. 지금 상황의 심각성은 에드윈도 잘 알고 있었다. 시아 수녀원이 나선 이상 에드윈의 존재는 디아나에게 위험했다. 이미 깊은 후회도 했다. 자신이 그날 섣불리 디아나를 안지 않았더라면, 지금 위험은 덜했을 것이다.

“괜찮아요.”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는 에드윈에 대한 원망은커녕, 담담하고 고요했다.

“전 그날의 일을 후회하지 않아요.”

청아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울렸다.

“저도 전하와 같은 마음이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디아나는 문제를 피하는 대신 에드윈의 눈을 마주 보는 것을 택했다. 전부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러니 에드윈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건 디아나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선택은 전하 혼자만 한 게 아니에요. 저도…… 선택한 거니까요.”

에드윈이 대답 대신 디아나의 이마에 진하게 입을 맞췄다.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서, 도저히 말로는 답할 수가 없었다. 그 진심이 전해졌는지 디아나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대가 두려워할까 봐, 그런 그대를 안심시키려고 온 것인데…… 어쩐지 그대가 날 안심시키는 것 같군.”

“그것 보세요. 전 전하의 생각보다 튼튼하다니까요.”

그 말이 맞았다. 디아나는 항상 에드윈의 생각을 넘어서는 사람이다.

“그래. 두려워할 일은 없어. 내가 그렇게 할 테니.”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에 강한 결심이 서렸다.

“무엇보다…… 시아 수녀원의 일은 내 책임이 크다.”

에드윈도 시아 수녀원이 어떤 곳인지 들었다.

“전하, 그건.”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 그 책임을 질 거다.”

디아나는 묵직한 저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함께 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에드윈의 처지에서 나오기 힘든 말이기도 했다.

제국은 남성에 있어선 무척 성적으로 개방적인 분위기였다. 언제나 순결을 지키지 못해 처분을 받는 것은 여성으로 정해져 있었다. 오히려 남성은 얼마나 숱한 영애의 순결을 앗아 갔는지가 자랑이 되곤 했다.

“난 결코 시아 수녀원이 그대를 해치지 못하게 할 거다. 그런 검사…… 난 용납할 수 없다.”

“저도 그건 싫어요.”

“만일을 위해 시아 수녀원에 사람을 붙였다. 수도로 오려면 며칠이 걸리겠지.”

에드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디아나는 그 표정에서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전하…… 설마 그들을 해치려는 건 아니시죠.”

디아나의 불안이 적중했다. 에드윈은 입을 다물었다. 긍정이었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기준을 가진 건 사실이지만, 이번 일에 말려든 것에 불과해요.”

“알고 있다.”

본래 시아 수녀원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일조차 없는 은거 집단이었다. 그것을 드노아 경이 명분을 위해 끄집어낸 것이다. 그들의 가치관이 어떻든, 디아나의 적은 아니었다.

“그들을 죽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드노아 경이 또 다른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무의미한 희생은 무엇이 되며 에드윈의 긍지는 또 어떻게 되는 건가. 디아나는 에드윈을 일개 살인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건, 디아나가 사랑한 남자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약속해 주세요. 그들을 해치지 않겠다고요.”

에드윈은 좀처럼 답하지 않았다. 그는 디아나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면 기꺼이 그들을 죽일 각오가 된 것이다.

“전하는 살인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내 어머님은 전의를 매수하려 하고, 내 외조부는 시아 수녀원을 불러다 처녀 검사를 시행하려고 한다. 그들을 어떻게 정의로만 대하지?”

참담한 말투였다. 지금 에드윈은 퍽 괴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정의로워지자는 게 아니에요. 전, 다른 방법을 찾을 기회를 말하는 거죠.”

디아나가 천천히 손을 뻗어 에드윈의 뺨을 감쌌다. 그는 사랑을 나눈 연인이었다. 그 이유로 나락에 떨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는 디아나의 진정한 사랑이었기에,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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