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제롬이 공작저를 떠난 후 샬롯이 자리를 옮겨 따스한 차를 내왔다. 디아나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참으며 샬롯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곧 밤이 저물고 에드윈이 올 거라 생각하니 안 그래도 급한 마음이 더 급해졌다. 그렇다고 이런 마음을 샬롯에게 내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샬롯, 아까 그 시아 수녀원이라는 게…… 무슨 문제가 있어?”
결국 디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샬롯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찻잔에 차를 따랐다.
“시아 수녀원은 제국 교황청만큼이나 오래된 곳이에요. 하지만 단체의 특성상 거의 언급될 일이 없죠. 수녀원 중에서도 무척이나 폐쇄적인 곳이라서요.”
“그런데 왜 지금 그 수녀원이 나온 거야?”
“교황청과 그 역사를 같이하는 제국 최초의 수녀원이니 명분이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문제는 그 수녀원이 교황청의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엄격하고 보수적이라는 거죠.”
샬롯은 최대한 부드럽게 설명하려 했지만, 그래선 눈앞의 디아나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샬롯, 난 괜찮아. 이제 나도 성인이고…… 무엇보다 이건 내가 헤쳐 나가야 할 내 인생인걸.”
어릴 때부터 혹여 험한 소리 한마디 들을까 감싸면서 키웠던 디아나에게 직접 이런 일을 마주하게 한다는 것이 속상했지만, 이런 디아나를 보니 마냥 어린아이 취급을 할 수도 없었다. 샬롯이 애지중지 기른 아이는 어느새 이렇게 강한 사람이 되어 샬롯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아 수녀원은 평생 신에게 복종 서약을 한 수녀들이 은거하며 지내는 곳이에요. 평소엔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 길이 없죠. 침묵과 복종을 미덕으로 하는 이들이니까요.”
말만 들어도 답답한 곳이었다. 처음 루카스에게 반항했을 때 아무 수녀원에 유배라도 보내 달라고 바랐던 것이 떠올랐다. 디아나가 수녀원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은…… 신이 명하신 계율로 여인들을 심판할 수 있어요. 드노아 경이 그들을 부른 건 아마 그 정당성 때문일 거예요.”
“그럼 문제가 없지 않아?”
“아뇨. 그들이 섬기는 계율은 우리 상식과는 달라요. 제가 그 이름을 아는 이유도 몇십 년 전에 그들이 개입한 사건의 내막을 알기 때문이에요. 아마 제 또래의 부인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샬롯이 기억을 더듬었다. 세월이 오래 흘렀지만, 쉬이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당시 레스턴 백작가의 막내 영애가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어요. 세레나데를 바치는 영식들이 한둘이 아니었죠. 그러다 영애에게 혼약이 생겼어요. 상대는 먼 공국의 영식이었죠. 문제는…… 영애의 소문이 하도 파다하니 스캔들이 따라붙었다는 거예요.”
구애자가 많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매일 창밖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는 청년들이 많으면 말이 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흔한 일이 아닌가. 당장 디아나도 요양을 이유로 조용히 지내지 않았다면 겪었을 일이다.
“평범한 혼약이었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당시 공국에선 영애의 아름다움을 듣고 파산 직전의 레스턴 백작가에 큰돈을 지불하기로 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런 영애에게 하자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란 조건을 내걸었죠.”
어느 시대에나 불행한 여인은 있는 모양이다. 레스턴 백작가의 영애도 그리 아름답지 않았으면 팔려 나가는 신세가 되지 않았을 텐데. 디아나는 벌써 남 일 같지 않은 그 영애의 운명에 이입하고 있었다.
“레스턴 백작은 공국에서 돈을 받아야 했으니 그 조건에 응했어요. 그때 검증을 맡은 곳이 바로 시아 수녀원이에요. 옛날에도 종종 그런 일이 있으면 그들이 나섰거든요.”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그 영애만이 알겠죠. 사람들이 아는 건 시아 수녀원에서 나서서 검증을 시행한 후에 그 영애가 자결했다는 거예요. 그것도 순결을 지키지 못한 죄업을 참회한다는 유서를 남기고서요.”
“……뭐?”
“그 후, 레스턴 백작가는 파산했어요. 시아 수녀원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은거에 들어갔죠. 그게 전부예요. 하지만 모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은 할 수 있었어요.”
“대체, 그들이 어떻게 검증을 한다는 거야?”
샬롯이 잠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샬롯이 에드윈을 원망한 것은 단지 곱게 기른 아가씨를 낚아챈 파렴치한이어서가 아니었다. 물론 그 이유도 컸으나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을 염려한 것이다. 하필, 위험한 시기에 젊은 대공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풍습이에요. 여인의…… 처녀성을 확인하는 절차죠. 혼전에 문란한 생활을 했던 여인이 그 벌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성경의 말을 그대로 믿은 거예요.”
“아니, 그게 무슨. 애초에 그런 걸 검사하는 게 가능하다고?”
“그들은 직접…… 검증해야 하는 여인의 음부를 살펴요. 아주 옛날에 수녀원에서 하던 방식 그대로죠. 남자를 겪은 적 없는 여인은 음부가 막혀 있다고 해요. 그래서 초야에 핏자국을 찾는 거지요.”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에드윈과의 밤을 떠올렸다. 그가 떠난 후에 몸을 씻다가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선혈 자국을 보았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게 아닌…… 경우도 있다고 들었는데.”
처녀 검사라니. 디아나가 아는 현대에선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 처녀막의 유무가 모든 것을 증명할 수는 없는 것으로 알았다.
애초에 처녀막은 명칭처럼 막으로 막힌 것이 아니라 질구를 좁게 감싸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선천적으로 없는 사람도 있으며 반드시 성관계를 거쳐서 파괴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의 뒤처진 의학 지식으로 어떻게 처녀 감별을 한단 말인가.
“그런 경우는 그들의 교리에 없으니까요. 애초에 상식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에요. 이건 떠도는 소문에 불과하지만, 황실에서도 비밀리에 시행한 적이 있다고 해요. 물론 상대가 고귀한 영애였던 적은 없지만요.”
“그럼…… 생판 본 적도 없는 수녀들이 와서…… 내 몸을 검사한다는 거야?”
디아나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알몸이 되어서 모르는 사람들이 온몸을 들춰 보고 속까지 확인한다는 건 떳떳하고 말고를 떠나 존엄성의 문제였다.
“그걸…… 감히 드노아 경이 요구했다고?”
그가 누구인지는 알았다. 하지만 그의 권세가 디아나의 몸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드노아 경은 계산적인 사람이에요. 시아 수녀원의 잣대를 믿어서라기보단, 시아 수녀원에서 검증하면 더 말이 나오지 않을 거라 판단한 거겠죠.”
“세상에.”
“물론 사람들도 알아요. 종종, 재혼한 부인들이 전남편과의 사이에선 자식이 없다가 나중에야 생기는 예도 있으니까요. 그런 건…… 불임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걸.”
그러나 세상에서 몸을 숨기고 침묵과 복종의 서약을 한 시아 수녀원에도 그 상식이 통할까. 그들은 오랫동안 존재했지만, 그들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조차 없었다.
샬롯이 아는 것도 당시에 그 사건을 들었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즉, 그 검증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판단이 어떻게 났는지는 죽어 버린 레스턴 백작가의 막내 영애만이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준대로라면 나는…….”
디아나가 끔찍한 결말을 떠올렸다. 지금 알고 있는 사실대로라면 디아나는 순결도 지키지 못한 탕녀로 판결되어 여태까지의 어떤 죽음보다 비참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 물론 에드윈은 가만히 있을 남자가 아니었다. 다치는 것은 디아나의 명예만이 아니다.
“아가씨, 두려워하지 마세요.”
샬롯이 디아나의 손을 꼭 붙들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으로 디아나를 봤다.
“우리 모두 무슨 수를 써서든 아가씨를 지킬 거예요. 아가씨가 두려워하실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샬롯의 말은 주문처럼 디아나를 안정시켰다.
“우리를…… 아가씨의 사람들을 믿으시지요?”
“응…….”
“아가씨에겐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 두려워하실 필요도 불안에 떠실 필요도 없어요. 아셨죠?”
“응. 나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간신히 디아나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 샬롯의 존재가 너무도 든든하게 느껴졌다. 샬롯만이 아니다. 대강의 사정을 전해 들었으나 일부러 티를 안 내는 그레이도 혼자 애를 쓰고 있을 에드윈과 그의 측근도, 그것을 모두 이어 주는 제롬의 존재도 있었다.
“그래. 아직은 두려워할 필요 없어. 난 혼자가 아니니까.”
디아나의 인생은 달라졌다. 디아나는 이제 황후로서 2년을 살면서 자신의 편이 하나도 없었던 연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때, 샬롯 같은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었다면 디아나도 그리 맥없이 말라 죽어 가진 않았을 텐데. 새삼 혼자라는 것의 비참함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 사실이 디아나를 강하게 지탱했다.
“……미안해, 샬롯. 더 일찍 말하지 못해서.”
문득, 늦은 사과가 나왔다. 이미 자신의 편이었던 샬롯에게 숨기고 혼자만 아등바등했던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아뇨. 사실……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건 아가씨를 향해서가 아니었어요. 참…… 작고 어렸던 아가씨가 어느새 이렇게 완연한 여인이 되셨구나. 이제 제 품을 떠나서 어른이 되셨구나. 그런 마음이랄까요.”
샬롯의 눈가가 이내 촉촉해졌다. 디아나는 샬롯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아이였다. 디아나가 태어났을 때 함께 축복했고 모든 첫 순간을 함께했다.
“물론 대공 전하는 원망스럽지만요! ……그래도 저는 기뻤답니다. 아가씨가 어른이 되어서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도,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려 하시는 것도, 전부요.”
불의의 사고로 선친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샬롯은 아직 어린 디아나를 흔들림 없이 키워 냈다. 그리 영광으로 빛나던 공작저는 선친의 죽음과 동시에 텅 비어 버렸다. 고용인들 다수도 영광을 잃은 공작저를 떠났다. 그때도 샬롯은 집사장인 그레이와 남아 공작저와 그 어린 주인을 지켰다.
“감히 저희가 무엇이겠냐마는…… 그래도 해냈구나,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지켜 냈다, 그것만으로도 어찌나 감사한지요.”
그 모든 세월이 스쳐 지나가며 깊은 감상을 남겼다. 아마 어머니의 마음을 닮은 그 무엇이리라.
“샬롯.”
디아나가 맞잡은 손에 힘을 꾹 쥐었다.
“‘감히’라고 말하지 마. 샬롯은…… 샬롯도 그레이도 어린 나와 이 공작저를 지켜 준 사람이잖아.”
디아나는 행복한 아이였다. 선친을 일찍 잃는 불행이 있었지만, 그 선친의 덕으로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난 사랑받는 아이였다고…… 그렇게 느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
그건 몇 번의 생에서도, 그 책을 만나기 전의 인생에서도 겪지 못했던 느낌이었다. 그 사실은 디아나를 강하게 만들어 줬다. 운명에 저항하고 행복을 꿈꾸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였으니까. 그러니까 꼭 행복해지려고 해.”
샬롯의 눈가에 결국 눈물이 넘쳤다. 디아나는 손을 뻗어 직접 샬롯의 눈가를 닦아 냈다. 엷은 주름이 느껴지는 눈매가 그제야 활짝 웃었다. 이 순간 그들은 가족이었다.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