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디아나는 샬롯의 도움을 받아 전의에게 주장할 증상들을 정리했다. 에드윈은 딜런을 통해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고 있었고, 제롬도 합세해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각자 입장은 달랐지만, 디아나가 황태자비가 되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은 같았다.
“아가씨가 월경한 적이 없다는 것은 제가 확실히 증언할게요.”
샬롯이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엮을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아요.”
“그게 뭔데?”
“아가씨는 그…… 중요한 부위에 체모가 없으시죠.”
샬롯의 조심스러운 말투에도 디아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디아나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를 돌봐 온 샬롯은 모르는 게 없었다. 최근, 밤손님이 다녀간 이후로 디아나가 피해서 그렇지 아직도 목욕이나 옷을 갈아입는 시중을 들었기에 더욱 그랬다.
“실은, 마님도 그러셨어요.”
“어, 정말……?”
“네, 체모가 무척 적으셨어요. 티어스 가문엔 드물지 않은 일이라서요.”
디아나는 자신의 어머니인 아델라 티어스를 떠올렸다.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는 어머니의 이름은 왠지 낯설었다. 하지만 샬롯은 디아나의 빛나는 백금발과 푸른 눈동자가 어머니를 똑 닮았다고 했다. 체모가 적은 것도 어머니를 닮은 거라니, 쑥스러우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가씨도 마님을 닮으셔서 그런지 머리카락이나 눈썹 외에는 거의 체모가 없으시잖아요.”
“으응, 그렇지.”
“그것도 증거로 내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좋은 생각이야.”
디아나가 새삼 감탄했다. 음부를 비롯한 곳의 체모는 2차 성징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대에서도 과학적으로 밝혀진 점이었다. 이 시대에 과학이나 의학의 폭은 좁았지만, 경험으로 인해서 아는 것들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자연스러운 2차 성징의 징후였다.
“하지만 그런 건 면도를 한다거나…… 속일 수 있지 않나?”
순진한 디아나를 보며 샬롯이 웃음을 억눌렀다.
“면도로 그리 깨끗해질 것 같으면 다른 아가씨들이 그리 고생하지 않으시겠지요?”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털이 나지 않았던 살결과 후에 관리하는 살결은 다를 것이다. 자신의 몸이라서 더 몰랐던 사실이었다.
“……잠깐, 전의가 그런 곳까지 볼 수 있다는 거야?”
디아나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타인에게 자신의 은밀한 곳을 보인다니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아직도 샬롯이 옷을 갈아입혀 주는 게 쑥스러울 정도인데, 생판 남인 전의가 아래를 들여다본다고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건 불가능하죠. 전의들은 모두 남성이니까요.”
샬롯의 말에 디아나가 안도했다.
“그러나 시녀들은 달라요. 아가씨는 고귀한 신분의 여성이지만, 그건 황실에 계신 다른 웃전들도 마찬가지. 시녀들은 볼 수 있지요.”
“그렇겠네.”
정작 디아나 자신도 샬롯에게 몸을 보였다. 높은 사람을 모시는 시녀라면 못 보일 것은 없었다. 황후 폐하를 모시는 시녀장이라도 나오면 디아나가 항의할 근거가 부족했다.
“잠깐이라면…… 참아야겠지.”
위험한 다리는 한 번만 건너면 된다. 디아나는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할 각오를 다졌다.
***
그날 오후 제롬 하이든이 새로운 소식 몇 가지를 가지고 공작저에 방문했다. 디아나는 평소와 달리 샬롯과 함께 그를 맞이했다. 이제는 모든 상황을 함께 공유할 것이라고 말하자 제롬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단 오늘의 본론에 관심이 쏠린 표정이었다.
“오늘도 카를 공작가의 재산 일부가 영애의 앞으로 돌아갔습니다만, 그 이야기보단 다급한 이야기를 하고 싶군요.”
“경이 잘 처리했겠죠, 그렇게 해요.”
제롬은 바쁜 와중에도 디아나의 유산 상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제롬이란 사람이 가진 수상함과 별개로 고용주로선 심히 안심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그가 유산 분쟁의 변호사였기에 디아나의 공작저에 드나들어도 의심을 사지 않았다. 디아나에겐 여러모로 다행스러운 인물인 셈이다.
“대공 전하를 뵙고 오는 길입니다. 전하의 측근인 딜런 경도 함께요. 전하께서도 이 상황에 대해서 백방으로 알아보며 대비하고 계십니다.”
“그렇……군요.”
에드윈의 이름이 나오자 디아나는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말을 늘였다. 곁에 앉은 샬롯은 아직도 분노가 섞인 한숨을 뱉었다. 아무래도 곱게 키운 아가씨를 빼앗겼다는 울분은 당분간 쉬이 가실 것 같지 않았다.
“상황이 무척 복잡합니다.”
제롬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선대공비 전하는 어째서인지 영애를 황태자비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군요. 대공 전하께선 아마 영애를 검사하게 될 사람들에게 손을 쓰지 않을까 염려하십니다.”
디아나가 깊이 숨을 내쉬었다. 선대공비를 섣불리 판단한 것이 이렇게까지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 무엇보다 선대공비로서 디아나를 불행하게 만들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제 정보망에 따르면 황후 폐하는 이 발칙한 소문을 퍼트린 자들을 처벌하고 영애를 그대로 책봉할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외척이자 귀족 세력의 수장인 드노아 경이 검증을 요구했고요.”
디아나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황태자비라는 자리 하나를 두고 이해관계가 얽히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들 각각의 속마음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제롬 경. 황후 폐하와 선대공비 전하는 친자매 간이고 그 아버지가 드노아 경이죠?”
“맞습니다. 대단한 가문이죠.”
“그런데 왜…… 서로의 목적이 다른 것처럼 느껴질까요?”
“실제로 다르니까요.”
우문현답이었다. 그들은 혈연일 뿐이고 각자 추구하는 것이 달랐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처지와 이익만 있었다. 그것을 읽어 내지 못한 디아나는 선대공비를 찾아가 호소했고, 상황이 꼬여 버린 것이다.
“드노아 경의 상황은 이해가 가요. 혹여 후계를 생산하지 못할 황태자비를 들이고 싶지 않겠죠. 황후 폐하는…… 아마 본인의 자존심과 그저 발칙한 소문이라 여기기 때문일 수도. 하지만 선대공비 전하는 왜죠?”
“그건 아주 쉬운 질문이군요.”
제롬의 금빛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디아나를 주시했다. 그리 영명한 영애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긴, 이것은 영명함과는 달랐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바닥까지 갈 수 있는지, 욕망이 얼마나 추악한지 모른다면 선대공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거다.
“본래 선대공비 전하는 자신의 가신이었던 샤리즈 후작가의 영애를 지지했습니다. 그 태도가 바뀐 것은 최근…… 제 생각으로는 영애의 문제를 알고 나서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부분이 이해가 안 간다는 거예요.”
“어째서죠? 제가 선대공비 전하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만일, 세월이 흐른 뒤에 황태자 전하께선 정비에게 후사를 못 보시고, 대공 전하께선 적법한 후계자를 얻으신다면요? 그러고 더 세월이 지난다면…… 이건, 정통성의 문제가 됩니다.”
디아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일부러…… 내가 황실의 정통성을 끊을 것을 기대했단 말인가요?”
“저라면, 예. 물론입니다.”
처음부터 그들을 다르게 생각해야 했다. 같은 아버지를 둔 자매라고 해도 둘은 각각 다른 핏줄을 이은 아들을 갖고 있었다. 제 자식의 장래를 위해선 온갖 더러운 짓을 할 수 있다는 그들의 모정을 짐작지 못한 디아나가 어리석었다.
“대공 전하는요?”
“그 부분에 대해선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만, 여전히 영애의 뜻과 같이 움직이실 것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에드윈은 비겁자나 방관자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상대가 제 어머니라고 해도 옳은 일을 하려 하는 것이다. 만일 이 일을 안다면 선대공비의 처지에선 디아나가 악역일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것은 입장의 차이일 뿐.
“우리가 지금 모든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하죠.”
제롬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에게 인간의 바닥이란 꽤 익숙한 광경이었고, 욕망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걱정되는 것은 다른 부분입니다.”
“뭐죠.”
“이건 대공 전하의 명령으로 측근이신 딜런 경이 알아내신 건데…… 뭐, 긴 얘기는 집어치우고 드노아 경의 명령으로 시아 수녀원 일부가 황실로 오고 있답니다.”
디아나는 낯선 이름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디아나의 곁에서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샬롯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설마, 드노아 경이 감히 우리 아가씨에게…….”
샬롯이 처음으로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해서 끝을 맺지 못할 정도였다. 매사 침착한 샬롯에겐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저도 아니길 바라지만, 드노아 경이라면 가능하죠.”
“아무리 드노아 경이라도, 아무리 황실이라도 아가씨께 그런 짓은 용납할 수 없어요!”
샬롯의 감정이 격해졌다. 제롬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는 그런 둘 사이에서 내내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기…… 지금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되는데.”
“그 부분은 제가 떠나고 샬롯 부인께서 설명해 주실 겁니다.”
제롬이 능숙하게 답변을 피했다.
“대공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는지요?”
“대공 전하께 얻은 정보니 당연합니다, 부인.”
“아뇨, 제 말은…… 그 의미를 아시느냐는 겁니다.”
“예. 알고 계십니다.”
샬롯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이 퍽 심란해서 디아나는 의아함만 더 커졌다.
“전하께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이번엔 제롬과 샬롯 둘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참…… 대공 전하로부터 전언이 남았군요.”
“뭔가요?”
에드윈의 소식에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이제 날이 추우니 굳이 창문을 열어 놓지 않으셔도 된다고…….”
그건 무슨 상황을 빗댄 말일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으니 오지 않겠다고 돌려서 말하고 있는 걸까. 살짝 디아나의 표정이 흐려지려는 찰나 제롬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저 잠가 놓지만 않으시면 된다고 했습니다.”
“아…….”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둘의 밀회는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 됐다. 그것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럼, 나머지 설명은 샬롯 부인께 부탁하고 전 다른 것을 찾으러 가 보겠습니다.”
제롬은 슬쩍 샬롯의 눈치를 살폈다. 갈색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건장한 대공이라도 언젠가 샬롯과 마주치면 화를 피하기 어려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샬롯 부인?”
“네, 제 역할은 아주 잘 알았습니다.”
제롬을 보는 샬롯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의 안에선 이미 제롬도 공범자인 것이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치 않았다. 제롬이 무척 도움이 되는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밤손님을 돕고 있었다. 샬롯으로선 곱게 볼 수 없었다.
“……이런. 절 혼내시려는 게 아니면 그만 가 봐도 되겠지요?”
“네, 오늘은요.”
제롬은 오랜만에 한기를 느끼며 빠르게 공작저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