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디아나는 오랜만에 달콤한 잠을 맛본 후 늦은 오전에서야 몸을 일으켰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햇살은 좋은 날이었다.
온통 에드윈에게만 쏠렸던 관심이 그제야 제자리를 찾는 것 같았다. 누구라도 설렐 만한 연애 사건이었지만, 디아나는 잠시 그 사랑에만 푹 빠져 있었던 자신을 조금 자책했다.
“아가씨, 황실에서 전령이 왔어요.”
동시에 정신을 확 차리게 해 줄 소식이 들렸다. 샬롯은 전령이 두고 간 봉투를 건넸다. 디아나는 숨을 고르고 봉투를 열어서 내용을 확인했다. 잠시 푸른 눈동자가 생각에 잠겼다. 표정이 어두운 건지 아닌지 쉬이 알 수 없었다.
“아가씨?”
“……아, 그래. 샬롯, 차를 가져와 줘.”
“네.”
계속 서신에 머물러 있던 디아나의 시선이 문득 샬롯을 향했다.
“샬롯의 몫도 함께.”
“……네, 아가씨.”
고개를 끄덕이는 샬롯은 내심 마음의 준비를 했다. 곧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밀크티가 나왔다. 디아나의 기분을 달래기 위한 샬롯의 마음 씀이었다. 물론 샬롯도 마음을 안정시키고 싶었다. 왠지 디아나의 표정을 보니 폭탄 같은 발언이 있을 것 같았다.
“샬롯, 할 말이 있어.”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똑바로 샬롯을 응시했다.
“네, 아가씨. 뭐든 말씀하세요.”
결심은 처음부터 있었지만, 샬롯에게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확실한 방법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괜히 샬롯을 끌어들였다가 애꿎은 희생이 될 수도 있었다. 경험상, 최악의 경우 디아나의 불손함으로 끝내는 것이 가장 나았다.
“지금에서야 이야기하는 건 샬롯을 못 믿어서가 아냐. 난, 그때 샬롯과 그레이가 날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맹세한 순간부터 둘을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물론이죠, 아가씨.”
샬롯의 눈동자엔 신뢰가 있었다. 그제야 디아나도 조금 마음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 황태자비가 되지 않을 거야.”
샬롯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살짝 손까지 떨렸지만, 아무것도 묻지는 않았다. 덕분에 디아나는 한결 수월하게 말을 이을 수 있었다.
“황태자비가 되면 난 반드시 불행해져. 공작가의 재산을 되찾으려고 애쓴 것도, 선대공비 전하를 알현했던 것도 전부…… 황태자비가 되는 운명을 피하고 싶어서였어.”
“그건…… 가끔 밤에 찾아오시는 분과 관계가 있을까요?”
샬롯이 담담하게 물었다. 오히려 디아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완전히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샬롯은 너무 태연했다.
“어……떻게.”
“아가씨. 전 아가씨가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였어요. 모를 리가…… 없잖아요.”
밤잠을 설친 것은 디아나뿐이 아니었다. 샬롯도 최근 그런 디아나를 두고 속이 타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디아나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귀족가의 밀회란 영애에게 더 위험한 법이다. 엄마처럼 언니처럼 디아나를 키워 온 샬롯의 입장에선 당연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먼저 말을 꺼냈다가 디아나가 상처를 입는 것도 싫었다.
“그러게. 내가 바보 같았어.”
디아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 말이 없다고 모르는 게 아니었다. 샬롯은 진즉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국혼에 대한 반응도 밤마다 찾아오는 손님의 존재도,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그저 디아나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다. 디아나는 새삼 그 마음과 샬롯의 현명함을 느꼈다.
“전 언제나 아가씨 편이에요. 그레이도, 이 집안의 모두…… 전부 아가씨를 위해서 이 공작저에 남은 사람들인걸요.”
“응, 내가 그걸 잠시 잊고 있었어.”
디아나는 상실에 익숙했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나마 마음을 줬던 모든 것을 허무하게 앗아 갔다. 하지만 그 또한 어리석은 일이었다. 상처가 두려워서 곁을 내주지 않는다면 혼자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젠……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누구에게나 한 번의 생이 주어진다. 회귀의 마법을 알고 있는 디아나에게도 열여덟, 지금 이 순간의 생은 단 한 번이었다. 그러니 너무 안도할 것도, 너무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
“여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그저 다른 이들처럼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그 당연한 사실은 디아나에게도 같았다. 그러니 이젠 초연해지지 않을 거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과 이 기억을 공유하기 위해서라도, 목숨을 지키려 발버둥 칠 것이다.
어느샌가 잃고 싶지 않은 것이 많아졌다. 디아나는 이제야 삶에 대한 집념을 느꼈다. 드디어 이 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기꺼이 할 수 있다는 각오가 생겼다.
“샬롯, 나는 반드시 이번 생에서 행복해지고 싶어.”
샬롯은 그 말의 무게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진심으로 디아나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의 행복을 바라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응. 나, 이젠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이미 이번 생에 미련이 커졌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지금의 삶은 단 한 번이었다. 그러니 아등바등 애를 쓸 것이다. 담담하고 초연하게 끝을 맞이하기보단 추할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매달릴 거다.
그 마음을 이제야…… 이제야 겨우 알았다. 담담히 맞이할 수 있는 죽음은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 삶은 그만큼 가치가 없는 것이다. 자결을 택했던 황후 디아나가 그랬듯이.
“샬롯, 난 후계자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을 가장해서 황태자비에서 벗어나려고 해.”
디아나가 침착하게 말했다. 혼자서 싸울 일이 아니었다. 이토록 의지할 수 있는 샬롯이 있는데 왜 외로운 싸움을 하려고 했을까.
“이미 그 사실을 선대공비 전하께 고했어. 하지만 어째서인지 묵살당했고…… 황태자 전하도 아셔. 선대공비 전하께서 아신다는 것까지.”
샬롯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꽤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최대한 내색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디아나가 말을 이었다.
“대공 전하도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셔. 그리고 날 돕는 분이야.”
“그분이…… 몰래 찾아오시는 손님이지요?”
“으응.”
디아나가 수줍음에 살짝 시선을 피했다. 샬롯은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우선의 심각한 일을 위해서 잠시 질문 공세를 미뤘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가씨를 못된 밤손님이 되어 냉큼 데려간 대공이 원망스러웠지만, 당장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최근 수상한 소문이 떠돈다더니, 설마 그 내용이…….”
“응, 내가 후사를 생산할 능력이 없다는 내용이야. 그걸 퍼트린 건 대공 전하와 그 지시를 받은 제롬 경…….”
“세상에, 제롬 경도 아나요?”
설마 제롬에게도 밀리다니. 샬롯이 조금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디아나는 왠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레이는 아직 몰라. 제롬 경은 대공 전하의 지시 때문에 알게 된 거고.”
재빨리 덧붙이자 그제야 샬롯이 후,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이해해야죠. 그리고 아가씨의 뜻이 그렇다면, 그 방법이 가장 현실적일 것 같네요.”
다른 방법은 이전의 생에서 시도해 봤다. 샬롯의 생각도 같은 모양이다.
“우선, 날 위해서 증언해 줄 의원이 몇 있어. 그것도 대공 전하께서 도와주셨어.”
“후…… 그렇겠지요. 도우셔야지요. 암요.”
샬롯의 말투에서 원망이 묻어났다. 에드윈이 어느 부분에서 샬롯의 미움을 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직 기른 부모의 마음을 알긴 어린 디아나다.
“그리고 황실의 전의가 확인할 때를 대비한 생각도 있어.”
“어떤 대책인데요?”
“그…… 불임의 증상 말이야. 내가 나름 조사해 봤어.”
과거의 생이라는 것을 샬롯이 이해할 수 없을 거다. 디아나는 적당한 변명을 대기로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병약했잖아. 그 탓으로 정상적인 월경을 하지 못했다고…… 할 생각이야. 물론 그 증언을 평생 날 돌봐준 샬롯이 해 주면 좋겠지. 그게 중죄이긴 하지만…….”
“얼마든지요. 아가씨가 행복할 수 있다면 뭐든 못 하겠어요.”
오늘처럼 샬롯이 씩씩해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최근 비밀로 가득했던 디아나가 마음을 열고 자신을 의지한다고 생각하니 절로 힘이 났다. 그건 샬롯이 가진 모성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갖지 못한 대신, 디아나를 평생 길렀으니 말이다.
“다행히 공작저엔 사람이 별로 없었죠.”
선대의 죽음 이후, 실비아는 웬만한 고용인을 전부 내보냈다. 남은 것은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 몇과 하인들이었다. 그마저도 샬롯과 그레이가 통솔해서 디아나의 곁을 직접 돌본 것은 두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어요.”
샬롯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결혼 후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한 경우가 아니라면 혼전에 불임을 진단하는 것은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불임을 원인으로 이혼을 할 수는 있되, 파혼이 잘 없는 이유였다.
“상대는 황실이야. 후계자의 생산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위험한 다리를 건너겠어.”
“그것도 맞는 말씀이지만요.”
디아나가 황실에서 받은 서신을 샬롯에게 건넸다.
“곧 그걸 확인하려고 하는 것 같아.”
샬롯은 신중하게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그렇군요. 황실에 입궁해서 직접 국혼을 위한 건강을 검진하겠다니.”
“응, 이런 말은 처음 들어. 아마 소문을 의식했을 거야. 어떤 길로든 황후 폐하 귀에 들어간 거지.”
이것은 디아나에게도 위험한 다리였다. 단, 한번 건너가면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다리가 위험하다고 망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다리를 과감히 건넜을 때만 그 너머로 달려갈 수 있을 테니까.
“우선은 아가씨와 여태 아가씨를 모셨던 저의 증언……. 증상에 대해선 꾸며서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테고.”
샬롯이 한 가지씩 차분히 따지기 시작했다. 혼자서 생각할 때와는 다르게 확실히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네요.”
“뭐가?”
디아나가 의아하게 되묻자 샬롯이 대답을 망설였다.
“뭐든 좋으니 솔직하게 말해 줘. 이건…… 설명할 수 없는 직감도 포함해서야.”
어떤 직감은 무수한 사실보다 강력했다. 디아나도 몇 번이고 느꼈던 점이다.
“황실에선 이미 아가씨를 황태자비로 공표했어요. 그건 꽤 중대한 사안이죠. 그런데 증언 몇 마디로 그것을 뒤집을지…… 조금 불안하네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타당한 불안이었다.
“다행히 아직 시간이 있어요.”
황실에서 정한 일시는 열흘 후였다.
“그전까지 이 검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아볼 수 있다면, 아가씨의 계획도 성공할 거예요.”
“……좋은 지적이야.”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샬롯과 고민을 나눈 것은 현명한 선택이다.
“누가, 어떻게, 무슨 수단과 귄위로 감히 황태자비 되실 아가씨의 불임을 진단할 수 있을지…… 그것부터 확인해야겠어요.”
샬롯의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물론 우리 공작저의 담을 넘으신 비밀 손님께서도 도와주시겠죠. ……암요. 그래야죠.”
그 안엔 에드윈을 향한 괘씸함도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