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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66화 (66/184)

66화

석양이 저물자 에드윈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 밤 이후로 디아나를 만나지 못했다. 그나마 겨우 시간을 낼 수 있는 게 오늘 밤이었다.

에드윈은 오늘 해가 떠오르기 전부터 밤을 기다렸다. 막상 한 번 품고 나자 처음보다 더 안달이 났다.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고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 작은 손을 어루만지고 싶었고, 제 품에 가득 안은 채로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무엇보다…… 에드윈이 제 몸을 묻을 때마다 어깨를 꼭 쥐던 사랑스러운 얼굴이 보고 싶었다.

“전하.”

그러나 에드윈이 잰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자마자 방해꾼이 튀어나왔다.

“아까 대공저를 떠난 줄 알았는데.”

에드윈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딜런을 내려다 봤다. 근소한 차이로 에드윈보다 작은 딜런은 루모스 기사단의 핵심 멤버이자 에드윈의 측근이었다. 그리고 따돌리기 벅찬 상대이기도 했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절 따돌리고 야행을 나가실 수는 없을 겁니다.”

“누가 그런 걸 한다고 했나?”

“제가 있는 이상은 아니겠지요.”

그 말이 옳았다. 에드윈은 어릴 때부터 루모스 기사단과 어울리며 각각의 특성을 꿰뚫고 있었다. 그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것은 꽤 손쉬운 일이었고 여태까지 그것을 이용해 디아나와 밀회를 즐겼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딜런이 없을 때였다.

“뭐든 적당히 하셔야 합니다.”

“날 가르치는 건가?”

에드윈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솔직히 이대로 디아나에게 갈 수 없다는 점에서 딜런의 존재 자체가 짜증스러웠다.

“루모스 기사단원은 전하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만만하지 않습니다. 일부는 그렇지만…… 제레미나 아이언스는 이미 전하께서 한밤중에 대공저를 비우시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딜런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처음 한두 번은 감쪽같았지만, 반복되자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낮에 대놓고 졸고 있는 대공의 모습은 황당함 그 자체였다. 결국 기사단의 리더 격인 딜런이 나선 것이다.

“젠장.”

“욕설은 넣어 두시죠.”

에드윈이 딜런을 노려봤지만, 오늘은 보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입에 쓴맛이 퍼졌다. 잠깐 딜런의 목 뒤를 가격해서 기절시킬까 고민을 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맨몸 격투로 딜런을 이길 사람은 없었다. 에드윈도 몇 번 덤볐지만, 열 번에 세 번을 겨우 이기는 것이 다였다.

“방에 와인을 준비했습니다.”

하, 에드윈이 노골적인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딜런은 넉살 좋게 술을 따라서 에드윈에게 건네고 자신도 한 잔을 들었다. 어릴 때부터 사냥이니 훈련이니 침식을 공유했던 사이다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날?”

에드윈이 황당하게 되물었다.

“예…… 정확히는 목석같은 우리의 대공 전하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여인이 생긴 건지에 대해서.”

에드윈이 들이켜던 와인을 뿜을 뻔했다.

“누가…….”

“대공 전하께서 야행하실 일이 또 있습니까? 게다가 요즘 누가 봐도 수상하시고요. 낮에 조시질 않나, 하인이 그러는데 전하의 등에 그…… 여인의 손톱자국 같은 것이…… 읍!”

에드윈이 딜런의 정강이를 걷어차서 입을 막았다.

“전하!”

“억측하지 말라. 나머지 입단속은 자네가 하도록.”

“아니, 장성한 사내가 여인을 만날 수도 있지요…… 제 말은 정도가 지나치면 선대공비 전하께서 아시고 염려하실 거란 겁니다.”

그건 에드윈도 곤란했다. 이 나이에 어머니의 잔소리가 무서운 게 아니었다. 하필 상대가 황태자비로 내정된 디아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안다면 제 어머니가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이미 입단속은 하고 오는 길이니.”

딜런은 눈치가 빠른 자였다. 상대가 누군진 몰라도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은 안 것이다. 그야말로 친구다운 행동이었다.

“뭔가 더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같은데.”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가 딜런을 살폈다. 딜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대공저에 드노아 경이 다녀가셨습니다. 물론 미리 알고 슬쩍 대공저에서 나가신 것도 압니다.”

“그랬던가. 잘 모르겠는데.”

“예, 제 형인 알렉 놈이 함께 왔으니 모를 수가 없었죠.”

형제는 무척 사이가 나빴다. 그 결과, 누구를 섬기는지도 달라졌다. 딜런은 호기롭게 에드윈을 따르겠다며 드노아의 제안을 뿌리치고 나왔다. 지금 형제의 처지는 딱 그만큼 벌어졌다.

“선대공비 전하와 드노아 경 모두 무척이나 흡족해하시는 것 같더군요.”

“간만의 부녀 상봉이니까.”

에드윈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는 좀처럼 외조부와 가까이 지내지 못했다. 드노아 경은 에드윈에게 거는 기대가 무척 컸으니 퍽 상반된 일이었다.

에드윈은 어릴 때부터 속을 알 수 없는 현명한 노인이 싫었다. 늘 인자했던 어머니는 외조부와 이야기를 나누면 눈빛이 변하곤 했다. 그 또한 어머니의 타고난 본성 중 하나라는 것을 자라서야 깨달았다.

“곧 있을 국혼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더군요.”

에드윈이 굳이 당부하지 않아도 측근인 딜런은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점은 그리 싫어하는 제 형과 똑같았다. 그러나 그는 형처럼 침묵하고 감내하는 대신, 에드윈의 눈과 귀가 되고 제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

“자세히 말해 봐라.”

“황태자비로 낙점된 카를가의 영애에게 치명적인 소문이 붙었다지요. 그걸로 밀레타 공국에서 문제를 제기했나 봅니다.”

“그래서?”

“황후 폐하께서 격노하셨고, 드노아 경의 제안으로 국혼 전의 검증을 시행하실 것 같습니다.”

에드윈의 눈썹이 기울었다. 디아나의 말에 따르면 그레이스는 모든 것을 알고도 황태자비가 되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드노아 경은 그 사실을 분명히 하려고 검증을 하려 한다. 이토록 처지가 다른데 어떻게 대화가 흡족하게 끝났단 말인가.

“어머님은…… 뭐라고 하셨지?”

“그야, 당연히 드노아 경의 편에 서셨지요.”

남들은 몰라도 에드윈은 제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 알고 있었다. 이건 뭔가 수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레이스는 디아나가 불임이란 사실을 침묵하고 황태자비가 되도록 종용까지 했다. 그런 그녀가 아무리 아버지의 말이라지만 저리 쉽게 태도를 바꿨다는 것이 이상했다.

“뭔가…… 있군.”

심상치 않은 징조에 에드윈의 표정이 흐려졌다. 딜런은 그런 주군이자 친우를 잠자코 바라봤다. 그는 기사도 조약에 따라 평생 에드윈을 배신할 수 없었다. 설령, 지금 에드윈이 밀회를 즐기는 여인이 화제의 황태자비 후보라고 해도 말이다.

“전하는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딜런이 우직하게 말했다.

“제가 남모르게 알아보겠습니다.”

그것이 딜런의 역할이었다. 에드윈은 잠시 오랜 세월을 함께한 딜런을 주시했다.

“이유는…… 묻지 않는군.”

“그건 제 일이 아니니까요.”

심각한 표정의 에드윈을 보던 딜런이 씩,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전 전하의 일탈을 응원합니다.”

매사에 지엄하고 공정한 젊은 대공이 드디어 제 나이다운 사고를 쳤다. 정무를 보다 꾸벅 조는 에드윈을 보며 딜런은 처음으로 제 나이다운 그를 보았다. 그러니 세상이 뭐라 말하든 딜런은 에드윈의 친구로서 그를 응원하고 싶었다.

“단, 언젠가는 전하의 입으로 비밀을 털어놓으셔야 합니다. 우리 기사단의 전통은 잘 아시겠죠?”

짓궂은 농담에 휙, 에드윈이 시선을 돌렸다. 서투른 첫날밤을 넘길 수 있었던 것도 그 기사단의 음담패설 덕분이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그 늑대들 앞에서 디아나의 이름을 입에 담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광경과 순간은 오로지 에드윈만이 가질 수 있어야 했다.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어서 가 봐. 루모스 기사단의 명예를 걸고 모든 내막을 알아내라.”

“전하께서 오늘 밤 대공저의 담을 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면, 갈 겁니다.”

“……좋아, 약속하마.”

그제야 딜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의 예감대로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

디아나는 창문 앞의 촛불을 보며 쓸쓸한 마음을 달랬다. 혹시나 했지만, 오늘도 에드윈은 오지 않았다. 마냥 그를 탓할 수도 없는 게 이 밀회가 들키면 사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서로의 몸을 섞은 후에 이렇게 뜸해지니 마음 한편이 소란스럽고 서러웠다. 그가 고작 그런 짓을 하는 남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상황이 야속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가씨, 아직도 안 주무세요?”

샬롯이 다가와 디아나의 이불을 여며 줬다.

“이젠 창문 열고 주무시면 안 돼요. 감기 걸리셔요.”

그나마 디아나가 열어 둔 창문까지 꼭 닫아 버리자 왠지 더 쓸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샬롯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지금 디아나는 모든 것이 속상했다.

“요즘 계속 잠을 설치시죠? 그러니 낮에도 맥을 못 추리시지.”

낮에 꾸벅꾸벅 조는 것은 에드윈만이 아니었다.

“자, 오늘은 이 샬롯이 잠드실 때까지 곁을 지켜 드릴게요.”

“아니, 난 괜찮아.”

“아니에요. 전부터 아가씨는 곁에 제가 있으면 푹 주무셨잖아요. 다 생각이 많으셔서 그래요.”

샬롯은 단호했다. 디아나가 몸살을 앓은 후로도 계속 맥이 없었기 때문에 단단히 걱정된 것이다. 디아나는 샬롯을 물끄러미 보다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이 침대에서 불과 며칠 전, 에드윈과 격정을 나눈 기억이 떠올랐다. 얼마 되지 않은 일인데 그의 몸짓과 체취가 무척이나 멀게 느껴졌다.

“샬롯, 황실엔 사람이 더 많겠지?”

“그럼요.”

사실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황후로 살아 본 것은 디아나였다. 물 샐 틈이 없는 경비라는 것은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특히 내궁은 경비가 삼엄했고 몇이나 되는 시녀들이 황후의 곁을 지켰다.

애초에 황실에 들어가면 혼자만의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스텔라나 루카스같이 익숙해진 사람들은 시중드는 이들을 사람이라 취급하지 않아서 속이라도 편하지, 디아나는 아니었다.

“그래, 자야겠어…….”

밀회가 너무 달콤해서 잠시 현실을 잊고 말았다. 지금 디아나에게 중요한 것은 황태자비가 되지 않는 것이지, 당장 에드윈과 나누는 몸의 밀어가 아니었다.

“아직, 할 일이 많아.”

“그래요, 아가씨. 어서 주무세요.”

고개를 끄덕인 디아나가 애써 잠을 청했다.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연인과 달밤에 사랑을 속삭이는 것은 디아나가 완전히 안전해진 후에 해도 충분했다.

“……고마워, 샬롯.”

“네? 뭐가요, 아가씨.”

“그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던 것 같아서.”

샬롯은 뭐든지 다 아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 디아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가장 중요한 건 아가씨의 건강이죠.”

디아나는 내일을 위해 눈을 감았다. 그 비밀스러운 밤이 진심이었다면, 디아나가 모든 것을 마칠 때까지도 변하지 않고 기다려 줄 것이다. 그 생각과 함께 에드윈의 진지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뒤늦게 잠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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