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샤리즈 후작 내외는 금세 답을 찾았다. 바로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의 밀레타 공국이 열쇠였다. 두 가문은 상대가 디아나라서 패한 것이지, 자신들이 부족하다고 여기진 않았다. 우습게도 밀레타 역시 디아나만 제친다면 자신의 딸이 황태자비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참, 당신은. 이래서 내가 좋아한다니까.”
샤리즈 후작이 제 부인을 은근히 희롱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것들은 제 주제를 모르니 카를가만 견제하려 들지 않겠어요?”
후작부인이 요염하게 부채를 살랑거렸다. 신분은 밀레타 쪽이 더 높았지만, 실질적인 세력은 샤리즈 후작가가 한 수 위였다. 게다가 의회엔 이미 샤리즈 후작의 편이 많았다. 밀레타는 애초에 불리한 싸움에 참여한 것이다.
“그렇겠지. 손바닥만 한 공국 주제에, 저들이 황실 다음으로 고귀한 줄 안다니까.”
후작은 번들거리는 콧수염을 매만지며 실소를 뱉었다.
“게다가 우린 경거망동하지 않은 거니까. 만일 화가 닥친대도 상관없는 일이에요.”
후작부인이 선대공비의 말을 곱씹었다.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그레이스에게 이 배신을 철저히 돌려줄 작정이다. 우선 비비안이 황태자비가 된 후에 말이다.
“벌써 기대되네요. 밀레타 공국에서 황후 폐하께 쪼르르 쫓아가 얼마나 열변을 토할지. 그걸 내 눈으로 못 보는 게 아쉬워요.”
“그러게, 아주 좋은 구경일 텐데 아쉽게 됐군.”
모처럼 샤리즈 후작가가 화목하고 평화로운 밤을 맞았다. 황태자비의 관이 코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 순간에 그들은 자신의 딸조차도 잊었다. 그저 가문의 영예와 자신들의 영달이 빛나는 것에 눈이 멀어 버린 탓이다. 그래서 몰랐다. 그들이 몸소 집안에 들인 위험한 씨앗을,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 그 또한 트리샤의 운이었다.
***
며칠 후, 황실이 발칵 뒤집혔다. 황후가 성질을 못 이기고 내던진 크리스털 잔이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고, 붉고 우아했던 입술이 표독스럽게 뒤틀렸다.
“감히, 그런 발칙한…….”
지금 황후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체면이었다. 직접 간택한 황태자비 후보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은 곧 황후의 결정을 모욕하는 말이었다.
큰일엔 어느 정도 소문이 따르는 법이었지만, 후보 중 하나였던 밀레타 공국에서 정식으로 검토를 요청하면 더는 소문으로만 취급할 수 없었다.
샤리즈 후작가는 제국의 신하였지만, 밀레타 공국은 외국에 가까웠다. 즉, 이번 간택에 대한 의문점을 제시하고 공론화시키기 좋은 위치였다.
“이 황실의 결정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면…… 그따위 작은 공국에서 참견을 해!”
손에 잡히는 것은 이미 다 집어 던진 후라 더 깰 물건이 없었다. 시녀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어서 황후의 아버지인 드노아 경이 입궁해서 저 난폭한 황후와 이 상황을 진정시켜 주기만 기다렸다.
황제가 병상에 누워서 거의 의식이 없는 채였으니 이 제국의 실권은 전부 황후와 그 아버지인 드노아 경의 일파가 장악했다. 즉, 지금 이 상황을 정리해 줄 수 있는 것도 드노아 경뿐이었다.
“후…… 공국이라는 이름을 빼앗겨야 정신을 차릴 텐가.”
황후가 분을 짓씹으며 가느다랗고 긴 파이프를 물었다. 그 끝에서 독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붉은 입술 사이로도 하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다행히 파이프의 연기가 끊어지기 전에 드노아 경이 다급하게 입궁했다. 그는 이미 노인인데도 기세등등한 황후보다 더 강렬한 안광을 갖고 있었다.
“황후 폐하, 그리 흥분하시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드노아 경의 말에 뼈가 있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아버지의 기세에 황후가 파이프를 내려놨다.
“아버님, 오셨어요.”
“내 아무리 늙은 몸이 무거워도 오지 않을 수가 없지요.”
제 딸의 성질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황후인 스텔라와 선대공비인 그레이스는 같은 배에서 태어났는데도 이렇게 달랐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늘 반목하는 것이다.
“국혼을 앞두고 악담을 퍼부어 황실의 명예를 훼손시킨 밀레타에 무슨 벌을 내리실 건가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 내는 스텔라의 인상이 매섭게 찌푸려져 있었다.
“황태자비에 관련된 소문 때문이라면, 밀레타만 처벌해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다. 여러 사람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퍼트렸으니 그 근원을 찾아낼 수도 없었고, 당연히 멈출 수도 없었다. 그게 황후를 더욱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뭐, 이 정도 반발이야 예상치 못한 것도 아니고.”
드노아 경이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는 평생을 세도가의 권력가로 살았고 두 딸의 결혼을 포함해 많은 일을 해냈다. 결과적으로 그는 제국을 좌우하는 세력의 수장이 됐다. 그가 헤쳐 온 수라장이 얼마인데 고작 이 정도로 눈 하나 깜박하진 않는 것이다.
“카를가의 영애는 선친이 없는 것이 장점이지만, 이런 반발을 막아 줄 자가 없었지. 그래도 차라리 잘됐습니다.”
“황태자비로 즉위하기도 전에 이런 소문이 퍼지는 것이요? 후사를 생산할 때까지 얼마나 떠들어 댈지, 정말…….”
그건 스텔라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딱히 그런 소문이 없어도 후사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가시방석이며 피가 마르는 일인지, 그녀도 이미 겪어 봤다. 그러나 드노아 경은 편안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 이 기회에 확실히 해 두자는 것입니다. 아예 모든 것을 분명히 해 두면 헛소리가 나오지 않을 테니.”
온화한 표정과 달리 드노아 경의 안광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 황후조차 제 아버지의 눈빛을 보고 한풀이 꺾였다.
“국혼 전에 아예 황태자비 후보의 자질을 검증합시다.”
“……예?”
“예전엔 드문 일도 아니었습니다. 황후 폐하의 국혼 때 내가 반대한 것뿐이지.”
드노아 경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시 그에게 남은 딸은 스텔라 하나였고, 후계자를 생산할 수 있든 없든 황후의 자리에 올려야 했기에 절차를 생략한 것이다. 다행히도 지금 디아나에겐 그렇게 해 줄 친부모가 없었다.
“그래도 황태자비가 될 몸인데 어찌 시침 시녀와 같은 검사를…….”
“아니, 아니요…… 그러자는 게 아닙니다. 어찌 감히 그런 것들과 같이 대하겠습니까.”
황후는 아직 의심이 덜 풀린 눈으로 제 아버지를 응시했다. 국혼 상대자의 건강을 검사하는 것은 전에도 있던 일이지만, 이 경우는 쟁점이 불임이었다. 여인에게는 가혹한 의심이다.
“황실 전의와 교황청의 수녀들을 부르지요.”
“결국…… 하는 일은 같잖습니까.”
“같으면요?”
드노아 경이 다시 지팡이에 체중을 싣고 몸을 일으켰다. 황후는 바로 반박하지 못했지만, 표정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게 그들의 역할입니다, 황후 폐하.”
“황태자비가 될 영애는 아직 열여덟이에요. 루카스도 아직 젊다 못해 어린 나이고요.”
아직 자연스러운 혼인을 하고 때를 기다려도 좋았다. 고작 소문 때문에 국혼도 치르기 전에 황태자비의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에요.”
스텔라는 딱히 디아나의 편을 드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도 국혼을 통해 황실로 온 여인이었다. 루카스를 낳기 전까진 후사를 생산할 능력이 없는 거냐고 매일 시달려야 했고, 루카스를 낳은 후에도 한 명으로는 불안하다며 난리를 쳐 대곤 했다.
스텔라는 세 번의 유산을 겪으면서도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황제의 씨앗을 받아 내야 했다. 그때 나타났던 것이 바로 황실의 전의와 교황청의 수녀들이었다. 스텔라는 그들에게 품었던 거부감과 수치심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이참에 분명히 해 두면 좋을 겁니다. 혹여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으니.”
“그들도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에요, 아버님.”
“모르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스텔라는 그들의 진단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낳을 수 없을 거라고 했던 아이는 태어났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던 아이는 사산됐다. 그때마다 그들은 태연히 신의 뜻이라고 했다. 그들의 눈에 스텔라는 황후가 아니라 황실을 위한 자궁에 불과했다. 혼인 후에도 그 정도였는데, 국혼 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아버님!”
“그만하세요, 황후 폐하.”
드노아가 황후에게 다가와 인자하게 어깨를 다독였다.
“이번에는 내 뜻대로 합시다.”
그러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황후 폐하를 내진하겠다는 것도 아니니까…… 이제 조용히 하세요. 예?”
섬뜩한 안광이 빛났다. 황후의 관을 쓴 스텔라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제 딸에게도 이리 말하는 드노아가 카를가의 영애를 상대로 자비를 베풀 리는 없었다.
새로운 황태자비는 국혼을 치르기도 전에 마음이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그게 스텔라의 자식이었다면 목숨을 걸고 드노아에게 맞섰겠지만, 그 정도의 이유는 없었다.
“아버님. 혹시 제가 아들을 낳지 못했으면…… 어쩌려고 그러셨나요.”
“황후 폐하도 참. 당연한 것을 물으십니까.”
“저를 폐하셨을 겁니까.”
“그럴 리가요. 황후 폐하는 내 친딸인 것을.”
드노아가 따스한 목소리로 제 딸을 얼렀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황태자비로 들어앉힌 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쉬세요, 좀. 몰골이 말이 아니잖습니까.”
툭툭, 다시 어깨를 두드린 드노아가 눈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동시에 황후를 향해 짓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삭 사라졌다. 늘 눈에 차지 않는 둘째 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나이가 되도록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드노아 경.”
황후의 처소에서 나오는 드노아를 보고 한 청년이 달려왔다. 기사의 복장을 한 알렉은 드노아의 심복이자 귀족 세력의 일원인 피어드 백작가의 장손으로 드노아의 심복이었다.
“쯧쯔…… 저리 마음이 약해 빠져서야.”
마뜩잖게 혀를 차는 드노아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저러니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제 언니만 못한 게야.”
알렉의 임무 중 하나는 드노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잠자코 듣는 거였다. 대답도 질문도 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비밀에 부치는 것이야말로 심복의 주 임무다.
“제 몸을 들쑤시는 것도 아닌데 무에 저리 감정적인지. 제 어미의 나쁜 점만 배워선. 그런 면에선 역시 그레이스가 낫지. 날 닮았으니, 대담하고 초연한 게야.”
“드노아 경, 저택으로 돌아갈까요?”
마차에 이르러서 드노아를 부축하던 알렉이 조용히 물었다.
“아니, 대공저로 간다. 늙은이가 모처럼 나왔는데 공평히 딸 둘을 다 보고 가야지, 암.”
중얼거리는 드노아를 두고 정중하게 마차의 문이 닫혔다.
“공평히라…… 퍽 우스운 말이었군.”
드노아가 출발하는 마차에 앉아 혼잣말과 함께 실소를 뱉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두 딸에게 공평한 아버지였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