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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64화 (64/184)

64화

연인의 밤은 길지 않았다. 에드윈은 좀처럼 디아나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지만, 디아나가 억지로 등을 떠밀어 보냈다. 그러자 곧 멀리서 동이 터 왔다. 디아나는 그제야 기절하듯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동안의 피로가 한 번에 몰려드는 것 같았다.

“아가씨, 아무래도 최근 무리하셨나 봐요.”

“응…….”

샬롯이 그런 디아나를 살뜰하게 보살폈다.

디아나는 에드윈과 밤을 보낸 이후로 부쩍 말수가 적어졌다. 괜히 샬롯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진 탓이다. 가끔 상류사회에서도 야밤의 밀회를 보내다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샬롯은 디아나가 바로 그 밀회를 보냈다는 것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몸과 마음이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시 까무룩 쓰러지듯 잠이 들면, 에드윈의 체온처럼 달콤한 꿈을 꿨다.

***

디아나가 간만의 휴식으로 지친 몸을 쉬고 있을 때, 소리 없이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독보적으로 앞선 것은 샤리즈 후작가였다.

후작 내외는 자신들이 들은 발칙한 소문을 역병처럼 퍼트리기 시작했다. 황태자비로 정해진 디아나 카를이 후계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이라는 치명적인 스캔들은 불이 번지듯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 호사가들의 입에 올랐다.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어.”

후작부인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실비아의 성정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게 사실이 아니었다면 당장 소문을 막고 난리를 쳐댔을 테다. 그런데 정작 카를 공작가에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게다가 실비아가 앓아누워 외출을 일절 삼가는 중이라니,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또 있을까.

“그런 치명적인 단점을 숨기고 황태자비가 되려 하다니, 파렴치하기도 하지.”

샤리즈 후작부인 밀라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침부터 진작 마차를 타고 대공저로 향하고 있었다. 분명 선대공비의 귀에도 이 소문이 들어갔으리라. 그레이스는 한때 대공가의 가신이었던 샤리즈가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이 발칙한 소문을 황후에게 전달해 줄 적임자이기도 했다.

“선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후작부인이 알현실에 들어서자마자 예를 갖췄다. 그레이스는 평소처럼 우아한 모습이었지만, 안색이 그리 좋진 않았다.

“전하. 기쁜 소식입니다.”

들뜬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로 후작부인이 말했다. 그레이스는 그런 밀라를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는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디아나 카를에 관한 이야기인가.”

“역시 전하께선 영명하십니다.”

“그래. 하지만 자네는 내게서 배운 게 전혀 없는 것 같군.”

선대공비의 마뜩잖은 목소리에 후작부인의 표정도 굳어졌다.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꾸짖어 주십시오.”

“하…… 자네가 들은 소문을 내가 못 들었을 것 같나.”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그레이스는 차갑게 후작부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왜 자네를 진작 부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아…… 그것은…….”

“부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대공비는 언제나 남보다 한 수를 미리 내다보고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후작부인은 제 딸이 황태자비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 들뜬 나머지 그레이스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잠시 잊고 말았다.

“하오나…….”

“황태자비는 카를 공작가의 영애다. 달라지는 것은 없어.”

그레이스가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그 어린 영애가 감히 제 뜻을 거스르고 이리도 발칙한 행보를 보일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해 줄 생각도 없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후작부인은 쉬이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여태 당연히 선대공비도 자신의 딸을 지지하는 줄 알았는데, 왜 이런 기회가 왔음에도 움직일 생각조차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하, 제 여식은…….”

“비비안 영애도 좋은 혼처를 찾을 것이다.”

용기를 낸 후작부인의 질문에 차가운 답이 돌아왔다.

“이번에 밀레타 공국에서 영애와 함께 온 영식이 있었지. 내 공작부인과 말을 나눠 보니 서로 좋은 혼처가 될 것 같더군.”

“밀레타…… 공국, 말씀이십니까?”

카를가와 샤리즈가, 밀레타 공국은 여태 황태자비를 두고 경쟁했던 가문이었다. 당연히 서로 감정이 좋을 리도 없었다.

무엇보다, 황태자비가 못 되면 대공비라도 될 수 있을 줄 알고 그레이스를 섬긴 것인데 이제 와 제 아들은 주지 못하고, 패배자들끼리 손이나 잡으라는 소리다.

“어쨌든, 지금 논할 일은 아니다.”

선대공비는 다시 두통이 일어나는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인상을 썼다. 후작부인은 차마 대들지 못했지만, 반발심까지 막진 못했다. 여태 충성을 바쳤는데 돌아오는 대우가 이거라면, 의미가 없었다.

최소한 자신의 딸이 대공비는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을 은근히 암시한 것도 선대공비였다. 물론 그녀는 꼬리가 잡힐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후작부인의 목이 턱 막혔다.

“물러가라. 결코 경거망동하지 말고……. 이 소문에 관여했다간 내 용서치 않겠다.”

“예, 전하.”

예를 갖추고 돌아서는 후작부인의 얼굴도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당했어.”

그녀가 혼잣말을 짓씹었다.

“저 늙은 여우한테 놀아난 거야.”

그레이스의 실수는 여식의 혼처를 둔 어머니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과 후작부인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이대로 밀레타의 영식 따위에 만족하고 물러설 수는 없지.”

대공가의 가신이었던 것은 과거다. 특히, 결혼해서 샤리즈의 일원이 된 후작부인으로선 충성심을 가질 이유가 희미했다.

“누굴 개처럼 쓰다 버리려고…….”

성질 같아선 당장 황후에게 달려가 고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딱히 여의치는 않았다. 어쨌거나 그들은 친자매였고, 아직 그들의 아버지인 드노아 경이 건재했다. 즉, 후작부인이 파문을 일으켜도 그들끼리 원만하게 수습하면 혼자서만 피를 볼 수도 있었다.

“방법을…… 찾아봐야지.”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조력해 줄 것 같았던 선대공비는 후작부인의 편이 아니었다. 오늘은 그 사실을 안 것으로 충분했다. 샤리즈 후작부인은 반드시 답을 찾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과 여태 딸을 키워 온 보람이자 의미였다.

***

샤리즈 후작저에선 매일같이 먹고 마시는 파티가 벌어졌다. 저택의 주인인 후작이 워낙 풍류를 즐기는 인물인 탓이었다. 후작부인도 만만치는 않았다. 아마 실비아와 정면으로 붙으면 장관이 연출될 성격이었다.

“비비안 영애, 차를 가져 왔어요.”

트리샤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향해 말했다. 도대체 그런 부모 사이에서 어떻게 이런 영애가 나왔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아, 트리샤구나.”

책에서 시선을 뗀 비비안의 갈색 눈동자가 트리샤를 온화하게 비췄다.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는 아버지인 후작을 빼닮았는데, 특유의 거만함과 수상쩍은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후작부인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을 닮지도 않았다.

“그냥…… 편하게 불러 달라니까.”

처음 비비안의 시중을 들어 달라고 했을 땐 만만치 않은 일을 맡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막상 만난 비비안은 너무도 온화하고 순진한 영애였다. 그녀의 선량함은 마치 어릴 적의 디아나를 연상시켰다.

“그래도…….”

“괜찮아. 아버지도 친구처럼 지내라고 해 주셨어.”

비비안이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충분히 아름다운 영애였다. 온몸에 배인 예법은 그녀가 얼마나 엄격한 귀족 교육을 받았는지 잘 보여 줬다.

아마 상대가 디아나만 아니었다면 찬사를 한 몸에 받는 것은 비비안이었을 것이다. 그래, 비비안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디아나가 너무 뛰어난 것이었다.

“우린 동갑이었지? 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이야기 나누자.”

“으응…….”

트리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안은 굳이 따지자면 초식 동물에 가까웠다. 트리샤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느꼈다. 그녀의 부모가 어떤지는 몰라도, 비비안은 누구에게 이빨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건 타고 나는 성정이었다. 벌레 하나 못 죽이는 나약하고 힘없는 순진한 사슴과도 같은 존재.

“보통 친구들은 뭘 하고 놀지?”

디아나가 온실 속의 화초라면, 비비안은 정원에서 기른 사슴이었다. 트리샤의 눈에 그들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르게 비쳤다. 디아나의 또렷한 의지와 빛나는 생명력,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움…… 비비안에겐 그런 특별한 느낌이 없었다. 그저 무던하고 순한 소녀일 뿐, 그 인상조차 무척 희미했다.

“글쎄, 나도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거드느라…….”

트리샤가 말끝을 흐리자 비비안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아냐. 그러고 보니 어릴 때 디아나 영애와 자주 놀곤 했었는데, 그땐 디아나가 몸이 약해서.”

“그렇구나. 디아나 영애와는 어린 시절 이후로 말을 나눠 본 적이 없어서. 지난번 무도회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는 것 외에는…….”

디아나가 무도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모두가 이해했다. 왜 디아나가 최고인지, 어째서 그녀여야 했는지. 비비안도 밀레타 공국의 영애도 알았다. 자신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라는 것을.

“비비안도 무척 예뻐.”

“나 정도는…… 디아나 영애에 비하면.”

“다른 매력이 있는 거지, 사람마다.”

순진한 비비안의 눈동자에 감동이 어렸다. 어머니조차 비비안에게 그런 칭찬을 해 준 적은 없었다. 언제나 부족함을 찾아 다그치기만 했으니까.

“정……말?”

“그럼. 난 비비안을 처음 본 순간 상상보다 아름다워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하지만 난 예쁘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걸.”

싱긋, 트리샤가 미소를 지었다. 붉은 눈동자에 비비안의 주저하는 모습이 그대로 담겼다. 이곳에도 역시나 트리샤가 파고 들어갈 틈은 있었다. 그런 건 어디에나 있었다. 트리샤 한 명쯤이 교묘히 파고들어서 들러붙을 수 있는 지점이.

“모두 예법을 따지느라 그런 거야. 난 수많은 영애를 봐 왔지만, 비비안은 그중에서도 특별히 예뻐.”

트리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누구도 진심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눈동자였다.

“고마워, 트리샤.”

비비안의 뺨이 수줍게 붉어졌다. 트리샤의 눈동자는 여전히 빛나는 채였다.

“당연한 사실인걸. 난 어릴 때부터 디아나 곁에 있어서 잘 알아. 비비안도 절대 부족하지 않다는 걸.”

“자꾸 그러니까 내가 너무 쑥스럽잖아.”

“그게 사실인데 어떻게 해.”

싱긋, 트리샤가 웃자 뺨을 붉히던 비비안이 손을 뻗었다.

“아버지가 널 보내 주셔서 정말 다행이야.”

디아나가 소녀의 놀이 시간을 끝내 버리겠다면, 트리샤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린,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아.”

“응, 비비안.”

하지만 다른 소녀를 찾을 수는 있었다. 역시, 운명은 트리샤를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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