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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61화 (61/184)

61화

정해진 시각이 되고 제롬의 사무실에서 일어서야 했을 때, 에드윈은 소리 없이 쪽지 하나를 디아나의 손에 쥐여 줬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그 쪽지를 펼치자 익숙한 그의 필체가 디아나를 반겼다.

「한밤중, 달밤의 밀회를 청하니…… 허락한다면 창문을 열어 두고 촛불을 밝혀 주길.」

절로 미소가 번지는 문장이었다. 그러나 쪽지 위로 이내 눈물이 툭, 떨어졌다. 지나간 생에서도 에드윈이 밤을 틈타 몰래 디아나의 침실로 들어왔던 일이 떠올랐다.

그건 디아나에게만 있는 기억이었다. 열여덟의 몸에서 눈을 떴을 때, 트리샤에 대한 증오와 닥쳐올 현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애써 에드윈과의 감정을 잊으려고 했던 디아나다.

“그 사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어떤 것은 다시 깨어나도 변하지 않는다. 에드윈의 마음이 그랬다. 처음에도 다음에도 에드윈은 늘 디아나를 만나게 됐고, 첫눈에 반했다. 그리고 언제나 먼저 디아나에게 다가온다. 그로 인해 어떤 상처를 받게 돼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디아나에게 직진해 왔다.

“이 방법밖엔 모르는 건가, 바보.”

마음과는 달리 얄궂은 혼잣말이 나왔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디아나의 입가에 분홍빛 미소가 떠올랐다.

디아나는 열여덟로 깨어난 이후, 에드윈과의 추억을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를 다시 만나고, 어쩌면 그의 호의를 이용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하면서, 왜 그의 마음이 그대로일 거라고 확신하지 못한 걸까.

“그래. 난 상처받는 게 무서웠던 거야.”

일부러 그와의 연애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에드윈의 미소나 숨결을 더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슬퍼질 것 같아서, 아무 일도 없던 체를 했다.

그러나 마음은 감기처럼 숨길 수가 없는 거였다. 게다가 에드윈은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다시 디아나에게로 돌진한다. 어떻게 그 남자를 밀어낼 수가 있을까.

“그는 달라.”

이번에야말로 디아나가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에드윈은 루카스와 달랐다. 여태 디아나가 아는 누구와도 다르다.

그렇기에 디아나는 오늘 밤, 창문을 열고 설레는 가슴을 품은 채 에드윈을 기다릴 것이다. 벌써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비가 오지 않기를, 달이 밝아서 그가 오는 길을 비춰 주기를…… 디아나는 작은 소망을 품기 시작했다.

***

디아나의 소망이 닿은 것인지, 유난히 달빛이 환했다. 디아나는 하얀색의 실내용 드레스를 입은 채 창가에 촛불을 밝혔다.

다소 목이 파인 드레스는 분홍빛 실크 리본으로 장식되어 디아나의 싱그러운 미모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이미 고용인들에게 침실에 접근하지 말라는 당부도 해 뒀다.

“한밤중은 아직인가…….”

밀회의 묘미는 정확한 시간을 모른다는 데 있었다. 잠시 후, 애타게 기다리던 디아나의 시야에 창밖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디아나는 반갑게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커다란 몸집이 유연하게 창틀을 넘어서 디아나 앞에 섰다. 검은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쓴 에드윈이었다.

“디아나.”

후드를 벗은 에드윈이 디아나의 이름을 한 번 불렀다. 디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에 차를 준비한 테이블로 손짓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서 디아나의 맞은편이 아닌 대각선에 앉았다. 지난 기억을 잊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디아나의 심장이 세차게 박동했다.

“촛불을 본 순간,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대는 모를걸.”

에드윈의 저음이 진중하게 울렸다.

“전하도 제가 촛불을 밝힐 때의 마음을 모르시잖아요.”

디아나는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에드윈은 그런 그녀를 잠시 눈에 담다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혹여나 거절을 당할까 봐 온종일 마음을 졸였다. 그런 식으로 마음을 졸여 본 것은 처음이었다. 대공인 에드윈을 초조하게 할 수 있는 이는 이제 달리 없었으니까.

“그래. 아무리 상상해도 알 수가 없군.”

귀족 영애에게 쉬운 부탁은 아니었다. 물론 비밀리에 마음을 나누는 연인들이 이런 밀회를 한다는 것은 에드윈도 잘 알았다. 즉, 디아나가 에드윈을 자신의 침실에 몰래 들이겠다는 것은 의미가 큰 행동이었다.

“나는…… 거절당할 각오도 있었다.”

“그랬나요?”

디아나가 태연히 물었다. 그러자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가 따라왔다.

“아니. 지금 막 그대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어. 이 모습을 놓친다니, 참기 어려웠을 것 같군.”

솔직한 에드윈의 소감이 디아나를 미소 짓게 했다. 청아하면서도 물기를 머금은 듯이 묘한 미소였다. 에드윈의 시선은 한창 분홍빛을 머금은 입술에서 떨어지질 못했다. 스물하나의 대공이 품은 연정은 꽤 노골적이었다.

“그대를 보기 위해서라면 난 비겁자뿐만 아니라 무뢰한도 될 수 있어.”

에드윈이 상체를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 무엇보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대공이 여인의 앞에서 이런 말을 속삭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둘 다 전하에겐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걸요.”

디아나가 수줍게 말하자 에드윈도 따라서 미소를 머금었다. 이미 둘의 간격이 가까웠다. 에드윈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하얀 디아나의 손을 쥐었다. 커다란 손엔 그의 긴장감을 보여 주듯 뜨거운 체온이 가득했다.

모든 순간이 지금의 에드윈에겐 처음이었다. 디아나는 그것이 아쉽기도, 오히려 떨리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디아나가 에드윈의 이 체온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각해 봤다. ……난, 그대를 지인으로서 도운 게 아니야.”

에드윈은 언제나 솔직한 남자였다.

“내가 보내기 싫었던 거다.”

에드윈의 엄지손가락이 디아나의 손등을 덧그렸다. 세게 쥐면 바스러질 것같이 작고 하얀 손이었다. 에드윈은 무예를 연마하느라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이고 굵어진 마디의 제 손이 거칠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디아나의 살결은 어떤 촉감보다 부드러웠고, 처음부터 에드윈의 손에 맞춰진 것처럼 쏙 들어왔다. 마치 이제야 제 짝을 찾은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거다. 난 그대를 황실로 보내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겠어.”

디아나로선 든든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가슴이 떨리기도 했다.

“그러니 모든 일이 끝나면…… 내게 오지 않겠나.”

에드윈의 묵묵한 고백이었다. 그는 사랑을 논하는 법을 잘 몰랐다. 세레나데 따위와는 더욱 거리가 멀었다. 그저 이렇게 제 진심을 꺼내서 보여 주는 게 에드윈의 전부였다.

“전하의 비가 되어 달라는 말씀인가요.”

“그래.”

디아나가 뭐라 말하려는 찰나, 에드윈이 먼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바람일 뿐. 언젠가 그대의 의지로 내게 와 주길 바란다.”

푸른 눈동자가 에드윈의 마음을 캐묻고 있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룬 후에 말이다.”

디아나가 이루고 싶은 것은 단지 행복한 결혼생활이 아니었다. 언제 루카스가, 또 트리샤가 자신을 위협할지 몰랐다. 이번 위기를 헤쳐 나가더라도 다음이 없다는 보장 또한 없었다. 그러니 디아나는 스스로 강해져야 했다. 카를가의 정당한 후계자로서 서야 했다.

“제가 그렇게…… 이기적이어도 되나요?”

누구보다 디아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에드윈은 지금 연정을 품은 한 명의 사내로서 자신의 처지를 희생하려고 하는 것이다. 오로지 디아나를 위해서.

“그대가 내 연인이라면, 그래도 된다.”

에드윈의 낮은 목소리에 똑같이 뜨거운 체온이 배어 있었다.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뺨을 붉혔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것만 허락해 준다면.”

그가 디아나의 손을 끌어다 입가로 향했다. 디아나의 손등에 에드윈의 입술이 닿았다. 동시에 에드윈이 검은 눈동자를 들어 디아나를 봤다.

예전의 디아나였다면 망설였을 거다. 하지만 이제 디아나는 에드윈의 체온을 놓치지 않기로 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디아나는 이미 여러 번의 생을 거치며 깨달았다.

“좋아요.”

분홍빛 수줍음으로 물든 디아나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 그러자 에드윈의 입가가 눈에 띄게 풀어졌다. 그 자리는 곧 안도와 기쁨이 뒤섞인 미소로 채워졌다.

“에드윈 전하라면…….”

처음으로 디아나가 에드윈의 이름을 불렀다. 지난 생에서 미루다 결국 부르지 못한 이름이었다. 이젠 그런 후회를 겪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게, 이 남자의 구애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기꺼이, 전하의 연인이 되겠어요.”

수줍은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드윈의 입술이 디아나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꾹, 디아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에드윈은 망설이지 않고 디아나를 끌어당겼다.

맞닿은 입술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어졌다. 에드윈은 기다렸다는 듯이 디아나의 입술 틈으로 제 혀를 밀어 넣었다. 말캉하고 따스한 혀가 디아나의 입천장을 훑고, 뜨거운 체온으로 속을 헤집자 틈은 더욱 벌어졌다. 그러나 입맞춤은 깊어질수록 더욱 두 사람의 애를 태웠다. 심장의 온도는 속수무책으로 높아지는데, 벌써 숨이 가빴다.

“하아…….”

에드윈이 얽히고설켰던 혀를 놓고 잠시 입을 떼자 투명한 타액이 디아나의 입술에서 번들거렸다. 에드윈은 그 광경을 보다가 디아나의 허리를 감싸 안고 번쩍 들어 제 무릎에 올렸다.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휘청이는 것이 불안해서 에드윈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에드윈이 다시 진득하니 입술을 맞대 왔다.

서로를 탐하는 것 같은 몸짓이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디아나의 허리를 잡고 있던 에드윈의 손이 점차 여린 몸의 실루엣을 따라 움직였다.

“아…….”

한 손으로 디아나의 등과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한 손으로 조심스레 가슴을 쥐자 디아나가 살짝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숨처럼 흘러나온 디아나의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에드윈의 손짓에 더 불을 지폈다.

에드윈은 그 부드러운 가슴을 손에 쥐었다가 이내 가운데 부분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얇은 실내용 드레스 자락 아래로 그의 뜨거운 체온이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몸의 안쪽에서 야릇하고 간지러운 느낌이 퍼졌다.

“앗.”

에드윈이 가슴의 중앙 부분을 세게 쥐었다 놓자 디아나의 입술에서 야릇한 소리가 샜다. 그럴수록 에드윈의 손짓이 더 대담해졌다. 다시 잘록한 허리를 쥐었다가 풍만한 엉덩이를 스친 에드윈의 손이 발칙하게도 드레스 자락 아래로 들어왔다.

디아나가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지만, 그는 주저 없이 거꾸로 올라와 얇은 속옷을 제쳐 내고 디아나의 맨가슴을 쥐었다.

“저, 전하.”

파르르, 디아나의 목소리가 에드윈의 바로 귓가에서 속삭였다. 에드윈은 보드라운 속살을 음미하며 손을 펼쳐 디아나의 가슴을 전부 담았다. 에드윈의 귀에 닿는 숨결이 한층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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