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에드윈은 맞은편의 소파에 앉는 대신, 손수 의자를 가져와 디아나의 대각선에 앉았다. 무릎이 닿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이젠 이 거리가 낯설지 않았다. 은은하게 서로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거리, 움직이는 기척이 생생해지고 숨결이 생명력을 품는 거리다.
“제롬 경에게 지금 상태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는 디아나가 오기 전, 이미 상황을 정리했다.
“전하께서…… 저를 도우셨다는 걸 들었습니다.”
“그건.”
에드윈이 살짝 곤란한 듯 말을 끊었다. 고작 그 정도로 생색을 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에드윈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 것뿐이니, 굳이 부담을 가질 필요 없다.”
디아나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푸른 눈동자가 조심스레 에드윈을 담았다. 처음, 신비롭게만 느껴졌던 디아나의 눈동자엔 여러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에드윈은 그 눈동자에서 자신에게도 익숙한 감정 몇 가지를 읽었다. 아마 자신의 눈동자에도 같은 빛이 깃들어 있을 거다.
“전하께 도움을 요청한 건 저였는걸요.”
“하지만 내게 정확한 걸 요구한 적도 없다. 난 그저 내가 생각하고 판단한 대로 행동한 거야.”
“그래서…… 더 감사했습니다.”
디아나의 장밋빛 입술이 살며시 움직였다.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빼앗겼다가 이내 다시 디아나의 눈을 봤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 감사를 코앞에서 보고 있자니 에드윈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저는 전하께 제가 원하는 것과 처지를 알려 드렸을 뿐. 그 이상의 지혜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최선이었다. 디아나는 타인을 쉬이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만큼, 그런데도 믿을 수 있는 타인이 있다면 그 존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도 알았다. 디아나가 생각할 수 없는 면을 볼 수 있는 보다 큰 사람의 존재라면 더욱 그랬다.
“우리는 지인이 아닌가?”
에드윈이 호쾌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대는 나란히 같이 걸어가며 서로를 알아 가는 것이 지인이라고 했지. 그 후로 나도 지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이 세계에 지인이란 개념은 드물었다. 무엇보다 대공과 공작 영애 사이를 정의하는 단어로는 무척 신선했다. 그래서 에드윈에겐 더 특별한 단어가 됐다. 디아나는 에드윈의 첫 지인이자, 유일한 지인이었다.
“나는 더 오래오래 알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본능 같았다. 처음 디아나의 모습을 본 순간부터 더 오래, 미래라고 말할 수 있는 곳까지 함께 걷고 싶어졌다.
“나란히, 그러나 내가 반 발짝 앞서서 걷고 싶어. 영애도 알다시피 내 발은 튼튼하니 거친 덤불을 걷어차긴 제격이다.”
에드윈은 디아나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디아나도 일방적인 보호가 필요할 정도로 연약한 존재는 아니었다.
에드윈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단지 반 발짝, 디아나의 고운 발로 쳐내기 거친 것들을 먼저 걷어차 주고 싶었다. 그건 사내로서의 본능이기도 했고, 에드윈의 뼛속까지 밴 기사도 덕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더 먼 길을 보고 싶다. 지금 이곳에선 아직 보이지 않는 풍경도.”
다정한 온기를 담은 검은 눈동자가 디아나를 향했다.
“내가 원해서다.”
에드윈이 딱 잘라 말했다.
“더 알고 싶고, 더 함께 걷고 싶다. 그러니 앞길을 살피는 것도, 덤불을 밟아 버리는 것도 전부…… 내가 원해서다.”
에드윈의 말엔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한 줄기 서려 있었다. 딱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표현이었다.
“내가 지인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지금 에드윈은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딱 반 발짝, 디아나를 위해서 앞서 나가도 되는지였다.
“실은 저도 잘 모릅니다. 지인은…… 처음이라서.”
“나와 같군.”
에드윈의 눈이 기쁨으로 빛났다. 그에게 디아나가 특별한 존재이듯, 그도 디아나에게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 기뻤다.
“그럼, 이제부터 함께 알아 가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지인이라는 관계의 정의를.”
부드러운 저음이 디아나에게 달콤한 제안을 건넸다. 디아나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움츠러들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떠올린 제안이었다.
“저는…….”
그런데도 디아나는 살짝 망설였다. 디아나 카를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마 앞으로의 운명도 평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에드윈에 대한 감정에 색이 입혀질수록, 디아나는 자신이 그에게 끼치게 될 영향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차라리 호의적인 인물에 머물렀다면 하지 않았을 고민이었다.
“그대의 대답도 내가 알아 가겠다.”
에드윈이 디아나의 상념을 끊었다. 끝내,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을 걱정하는 마음을 가리는 것은 이토록 믿음직한 에드윈을 향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었다. 무엇보다, 디아나가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불행한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 그가 말하는 풍경을 보고 싶었다.
“아마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겠지.”
디아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깊은 에드윈은 이미 디아나의 처지를 잘 알고 있을 테다.
무엇보다 디아나는 선대공비를 배반했다. 그것을 배반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선대공비는 그렇게 느낄 것이다. 감히 선대공비를 향한 도전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에드윈의 모친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내 주위의 일은 내가 정리할 문제다. 그게 설령…… 누구라고 해도.”
잠시 말을 흐린 사이에 에드윈은 제 어머니를 떠올렸다.
“나는 옳지 못한 일을 알고도 방관할 수 없다. 그것은 대공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내 원칙에 어긋난다.”
선대공비가 한 일은 옳지 못했다. 에드윈은 불효자가 될 수는 있지만, 비겁자가 될 수는 없었다. 체스터 대공가의 혈통이 그렇게 했고, 그의 타고난 천성이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 희생자가 디아나라고 생각하면, 당장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전하께서는 정의로운 분이군요.”
사람들은 방관에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루카스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고도 지나치는 것은 죄악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무엇보다 방관은 편리했다. 오히려 방관을 거부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 되기 마련이었다.
“비겁자가 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내 욕심이지.”
“그런가요? 저는…… 비겁자인데요.”
디아나는 이미 에드윈에게 위험을 지우고 있었다. 제롬을 이용했고, 트리샤를 감시하며 방관한다. 앞으로의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방관자를 넘어서 방해자가 될 결심도 있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비겁자는 없다고 아는데.”
툭, 에드윈이 위로 비슷한 것을 던졌다.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불행을 방관할 수도 있어요.”
“그건 타인이 아니라 영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이겠지.”
“그건…… 그렇지만.”
디아나의 가슴에 루카스와 트리샤가 할퀴고 간 상처가 두꺼운 흉으로 남아 있었다. 아이를 잃었던 원한도,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독에 잠식되어 죽어 가던 기억까지.
그들은 비겁하고 사악했다. 그러니 디아나도 똑같이 갚아 주고 싶었다. 흔들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마음이다. 그런데 지금 곧은 에드윈의 눈동자를 보니, 자신의 모습에 혼란이 일었다.
“가장 큰 비겁은, 자신의 인생을 방관하는 것 아닐까.”
에드윈은 그 혼란에 자상한 답을 건넸다. 마치 손수건을 건넸을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이 한 방울의 물감처럼 톡, 디아나의 마음에 퍼져 나갔다.
“전하께…… 큰 가르침을 얻는군요. 아니, 위안이라고 해야 할까요.”
“난 그런 건 할 줄 몰라.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뿐.”
디아나의 칭찬을 받는 게 쑥스러운지, 에드윈은 늘 이럴 때마다 한 발짝 물러선다. 디아나는 그 서툰 모습이 좋았다. 오히려 어떤 능수능란함보다 디아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모습이다.
“음…… 아니야. 이번에는 영애의 말이 맞는 것으로 하지.”
문득, 에드윈이 제 말을 고쳤다. 디아나가 의아한 시선을 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가르침보단 위안이 좋다. 그리고 그 보답을 하나 요구해도 될까?”
깜박, 디아나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에드윈이 입꼬리를 올려서 미소를 지었다.
“지금만은 잠깐 비겁자가 되려고 한다.”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짓고 하는 말에 디아나가 참지 못하고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엔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이내 디아나도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에드윈의 장난에 응했다. 그러자 에드윈이 입꼬리에 맺혔던 웃음이 더 진하게 번졌다.
“디아나 카를.”
“……네.”
그러나 다음 순간, 정말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채로 에드윈을 향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앞으로는 그대를 이름으로 부르고 싶은데.”
에드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고는 바로 디아나의 안색을 살폈다. 푸른 눈동자에 서린 감정을 다 읽을 수가 없었다.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혹은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건지.
“디아나……라고만 불러도 될까.”
이전, 디아나만이 기억하는 생에서도 에드윈은 같은 것을 바랐다. 그때를 떠올린 디아나는 이제 기억보다 더 단단해진 에드윈을 봤다.
“네.”
청아하게 울리는 답에 에드윈의 입가가 금세 풀어졌다. 그리도 기세가 높은 대공도 디아나의 앞에서는 한낱 사내란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가끔은 비겁자가 될 만하군.”
“그럴 리가요.”
“아니, 충분히 가치 있었다.”
대공은 디아나의 이름을 부르기에 충분한 신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명의 신사로서 영애의 이름을 부를 권리를 청한 것이다. 권위가 아닌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일이었다. 디아나는 그런 에드윈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디아나.”
단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에드윈의 저음이 울리자 괜히 심장이 뛰었다.
“네, 전하.”
디아나는 그 감정을 피하지 않은 채 에드윈을 봤다.
“또…… 이렇게 초대해도 될까. 그대가 세간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까지 말이다.”
“언제나 환영입니다.”
아쉽게도 창밖으로 석양이 저물고 있었다. 그러나 둘의 시선은 아직 서로에게 고정된 채였다.
둘의 간격이 한 발짝 좁혀졌다. 에드윈은 앞으로도 이렇게 서로를 알아가며 걸어갈 나날이 많이 남았기를 바랐다. 그래. 디아나가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한다면, 둘의 길은 더 먼 곳까지 이어질 것이다.
***
한껏 차올랐던 달이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루카스의 표정이 서늘했다.
무도회 이후로 잡념이 많아졌다. 그게 정확히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복잡한 광경들이 그의 뇌리에 남았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거늘, 정확히 집어서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었다.
“전하, 약을 드실 시간이옵니다.”
창가의 루카스에게 전의가 눈치를 살피며 다가왔다. 자칫 때를 잘못 골랐다가는 호된 꾸짖음을 들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루카스는 순순히 약을 받아 들었다. 황후는 루카스의 건강에 아직도 염려가 컸다. 쓴 약을 들이켜자, 의원이 사탕을 내밀었다.
“됐다.”
“하오면, 물러가겠사옵니다.”
루카스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입안에 남은 쓴맛은 꼭 머릿속의 상념을 닮았다. 그때, 문득 루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떠오른 탓이다.
“……잠깐.”
“예, 전하.”
전의가 조심스럽게 루카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 후계를 생산하지 못하는 여인이 있지 않으냐.”
달 아래에서 디아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간혹 있습니다.”
“결혼 후에 오래도록 후사를 못 본다면 알겠지만, 그 전엔 어찌 알지?”
지극히 원론적인 질문이었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고 신비로운 빛으로 반짝이던 디아나는 자신의 안타까운 처지를 고하고는 가련하게 물러갔다. 그 뒷모습이 어쩐지 뇌리에 오래 남아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