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샤리즈 후작가의 저택은 훌륭했다. 후작가는 대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와 명예를 지켜 왔다. 그 대가가 바로 지금의 어마어마한 저택이었다.
트리샤는 벌써 저택의 입구에서부터 조금 기가 죽었다. 디아나의 공작저도 수도에서 손꼽히는 저택이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부를 과시하진 않았다.
“이 방입니다.”
시종의 안내에 트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 시종이 노크하고 문을 열자 창밖을 보는 낯선 신사의 뒷모습이 보였다. 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화려한 장식뿐, 블랑 남작은 보이지 않았다.
“트리샤 블랑?”
신사가 뒤를 돌아 트리샤를 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사는 트리샤의 아버지 또래였다. 부를 과시하기 좋은 화려한 취향이었다.
“난 샤리즈 후작이다.”
“아…… 샤리즈 후작을 뵙습니다.”
트리샤가 예를 올리는 모습을 보며 후작이 멋지게 다듬은 콧수염을 매만졌다. 영민한 갈색 눈동자는 트리샤의 허름한 차림을 슬쩍 훑고는 묘하게 만족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저어, 아버님이 계시다고 해서 왔습니다.”
“아, 물론이지. 지금 옆방에서 한창 자고 있다네. 친우에게 방을 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후작이 담배 파이프를 문 채로 씩 웃었다. 아버지에게 저런 친우가 있었던가. 그것도 이렇게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후작이라니, 블랑 남작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블랑 남작과 친분이 있다는 것이 이상한가?”
트리샤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자 후작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짓궂게 목소리를 낮췄다.
“내게도 조금 나쁜 취미가 있거든.”
후작의 손이 카드를 펼치는 모양을 해 보였다. 그제야 트리샤는 이 기이한 관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도박에 빠지는 데 신분의 고하는 관계없었다.
“어제 무척 오랜만에 들렀는데 마침 블랑 남작을 만났지.”
파이프 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트리샤는 여전히 후작의 뜻을 읽지 못했다.
“블랑 남작이 제게 아주 대견한 딸이 있다고 자랑을 하던데.”
그럴 리는 없었다.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에 약간의 의심이 서렸다. 물론, 노련한 후작은 거기까지 읽었다.
“뭐…… 실은, 블랑 남작이 어려운 형편에 대해서 하소연을 하더군. 남작 부인은 병으로 일을 못 하고, 열여덟인 영애인 너로선 더욱 그렇겠지.”
“네, 부끄럽지만…….”
“네 잘못은 아니야. 블랑 남작은 유독 나쁜 패를 잘 뽑거든.”
가까이에서 후작의 갈색 눈동자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네가 카를가의 영애와 친분이 두터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던데?”
“아, 예……. 디아나 영애가 워낙 인품이 훌륭해서 제가 많은 신세를 졌어요.”
“그래, 블랑 남작이 하도 자랑을 해서. 본래는 카를가의 영애의 시중을 들면서 수고비를 받아 살림에 큰 보탬이 됐다고 말이야.”
트리샤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샤는 디아나와 우정을 나눈다고 생각했고, 대가를 바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속이 깊은 디아나는 트리샤의 사정을 알고 여러 명목을 대서 수고비를 주곤 했다.
그땐 그나마 나았다. 디아나의 우아한 일상을 공유하면서 아버지에게도 맞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디아나가 열여덟이 되면서 공작저에선 트리샤를 찾지 않았다.
“참 기특한 일이야.”
“마침 동갑이고…… 어릴 때, 인연이 있어서요.”
“블랑 남작은 카를 공작저의 수고비가 끊겼다고 불평을 하던데, 공작 영애와 다툼이라도 있었나?”
“아뇨. 그냥, 이제 성인이 되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사실 트리샤도 멀어진 계기를 알 수 없었다.
“저런. 카를가의 영애는 어릴 때부터 무척 병약했다지. 트리샤, 네가 큰 도움이 됐을 텐데 말이다.”
몸이 약한 디아나의 간호를 도맡았던 트리샤다. 야속하게도 디아나는 그 시간을 전부 잊은 것 같았지만.
“아, 서론이 길었군.”
후작이 싱긋 웃음을 지었다.
“블랑 남작가의 어려움은 안타깝게 생각한다만, 흐음…… 블랑 남작에게 당장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것은 큰 소용이 없다고 본다. 말했다시피, 네 아버지는 나쁜 패를 잘 뽑으니까.”
그건 사실이다. 도박에 미친 블랑 남작에게 돈을 쥐여 줘 봐야 남 좋은 일을 시킬 뿐이다.
“허나, 모르는 체하는 것도 내 마음이 불편해. 마침 내게도 딸이 있다. 카를가의 영애와 같은 나이지.”
그렇다면 트리샤와도 동갑이다.
“내 아내는 아주 엄격한 사람이야. 덕분에 내 딸아이는 친구도 없이 귀족 영애의 소양을 갖추기 바빴지. 하지만 이젠 배울 만큼 배웠으니 조금 여유를 주고 싶구나.”
트리샤가 의아한 듯 후작을 봤다.
“어때. 내 딸의 주변을 돌봐 주는 것은? 그 김에 말 상대도 해 주고 말이다.”
뜻밖의 제안이었다.
“물론 보수는 지급하지. 블랑 남작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다.”
“너무 감사하지만, 저는…… 어린 동생이 있어서…….”
“그 부분은 걱정할 것 없다. 넘치는 것이 하녀인데, 그중 한 명을 남작가에 보내 주마.”
트리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여태 트리샤는 고용인을 부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녀의 월급도 후작가에서 내니,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믿기지 않는 행운이었다. 어쩌면 생애 최초로 아버지의 덕을 본 것 같았다.
“내 호의를 거절하진 않겠지?”
트리샤는 넋을 놓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트리샤에게 이 현실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한 줄기 동아줄이 내려온 것이었다.
후작 영애의 곁에서 지내면 다시 상류층의 생활을 공유할 수 있었다. 카를 공작저에서 찾지 않으면 다신 누릴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들이다.
“물론입니다, 샤리즈 후작님. 절대…… 후작님과 영애를 실망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트리샤의 상기된 뺨을 보는 후작의 시선이 느긋했다. 그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배었다.
“앞으로 자주 볼 테니 이름을 알려 주지. 난 칼 샤리즈다. 칼 경이라고 부르면 된다.”
“예, 칼 경……!”
“내 딸의 이름은 비비안이야. 착한 아이지.”
툭, 칼의 손이 트리샤의 어깨에 얹혔다. 갑작스러운 접촉이었다.
“좋은 친구가 되어 주렴, 트리샤.”
“물론입니다.”
트리샤의 가슴이 다시 희망으로 두근대기 시작했다. 이제 옆방에서 술에 절어 잠들었을 아버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분명한 것은 트리샤가 이 기회를 꽉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
디아나는 초조하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기다렸다. 아직 뚜렷한 결과는 없었다. 미래가 이어질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다.
지난 두 번의 죽음은 너무 허망했다. 한 번은 견딜 수 없는 충동이었고, 한 번은 무방비 상태에서 당했다. 디아나에게 죽음이란 항상 갑작스러웠다.
“도착했습니다.”
디아나의 상념이 끊겼다. 제롬은 디아나에게 다시 한 번 관청가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나와 달라고 요청했다. 이 시기에 외출이 내키진 않았지만, 제롬은 꼭 필요한 요청만 하는 사람이었다. 디아나는 살짝 분홍 물이 든 것같이 은은한 드레스를 입은 채, 제롬의 조수가 인도하는 응접실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제롬은 평소처럼 싱긋 웃고는 손짓으로 디아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번 달에 관청에서 해결할 일이 또 있던가요?”
“아뇨.”
너무 뻔뻔한 제롬의 답에 자리에 앉은 디아나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유는 있습니다.”
당장 설명해 줄 작정은 아닌 것 같았다. 디아나는 그런 제롬을 빤히 바라봤다.
“우선 제 용건은…… 트리샤 블랑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무 변화가 없다는 보고를 들었다. 하긴, 그 트리샤가 언제까지나 가만히 허름한 집에 갇혀 살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일을 대비해 제롬에게 보수를 지불하고 있었다.
“뭐죠?”
“샤리즈 후작이 손을 썼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블랑가를 돕기 위해서라고 하며 트리샤를 제 딸의 시중을 드는 역할로 고용했습니다.”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트리샤와 샤리즈 후작이 무슨 접점이 있죠?”
“뭐…… 그거야 후작이 정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쉽게는 블랑 남작과 친분이 있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입니다.”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때론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다.
“후작의 목적은…… 날 경쟁자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걸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영애의 그 비밀이 밝혀졌을 때, 어릴 적 영애의 시중을 들었던 친구가 증언한다면 더 효과적이겠죠.”
“후작은 영리하군요.”
제롬은 대답 대신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난 아무래도 좋아요. 트리샤가 그리 증언한다면, 오히려 내게도 도움이 되죠.”
그 희생양이 될 후작 영애가 가여웠지만, 그런 아버지를 둔 탓이니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샤리즈 후작은 트리샤를 편리한 장기 말로 이용할 생각일 것이다. 언젠가는 트리샤를 저택에 들인 일을 후회할 줄도 모르고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 트리샤 블랑은 영애를 친구로 생각할 텐데…… 그리 쉽게 배신할까요?”
“두고 보면 알겠죠.”
디아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말했다.
“우문현답이군요. 그럼, 제 용건은 여기까지입니다.”
푸른 눈동자에 의아함이 서렸다. 이 말을 하려고 디아나를 여기까지 불렀다는 것은 쉬이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용건은 끝났다고 하지 않았나요.”
“전, 그렇죠. 아무튼, 다음 의뢰를 수행해야겠습니다.”
제롬의 금빛 눈동자에 흥미가 가득했다.
“어떤 고귀하신 신사분께서 이 응접실을 빌려 달라고 하셔서요.”
디아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물론, 영애를 초대한 후에 말입니다.”
제롬은 예를 갖추고 떠났다. 그러자 곧 노크가 울리고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저벅, 저벅, 그의 발소리는 항상 일정하게 울렸다. 조금씩 그가 풍기는 특유의 향이 디아나의 코끝을 간질였다. 디아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곳엔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가 있었다.
“공작저로 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때라.”
에드윈 나름의 변명이었다. 실은 그가 고민 끝에 떠올린 묘수라는 것까지 말하진 않을 거다.
“무도회 이후론 처음이군.”
낮은 목소리가 안정적으로 공기를 울렸다. 디아나는 에드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냈나?”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드윈에겐 무척 괴롭고 초조한 시간이었다. 여전히 달밤에 검을 휘두르며 몸을 혹사해야 잠을 잘 수 있었고, 꿈에서조차 선명한 디아나의 향기가 느껴졌다. 작은 디아나의 손을 잡고 제 품으로 끌어당기던 왈츠의 순간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네. 전하도…… 잘 지내셨나요?”
청아한 목소리를 듣자 에드윈의 입매가 풀어졌다. 이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참 우스운 일이다. 그리도 길고 괴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고작 한마디에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지다니.
“나는.”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가 디아나를 따스하게 비췄다.
“잘 지내지 못했다.”
디아나의 눈이 깜박였다. 그러나 에드윈은 그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날카로운 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약간의 미소만으로도 무척 다정한 기색이 담겼다.
“그러나 이제 괜찮아졌다.”
두근, 심장이 박동했다. 그리 특별하지도 않은 한마디였다. 그런데도 디아나는 뺨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직선적인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디아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돌려서 말하는 법을 몰랐다. 근사하게 꾸며 내거나 은밀하게 전하는 것은 더욱 모른다.
“그리고 그대가 잘 지내는 것을 확인해서…… 안심이 됐다.”
에드윈은 항상 제 마음을 디아나의 눈앞에 담담히 내려놓았다.
“저는…… 뭐라 답해야 좋을지.”
그럴 때면 언제나 침착하고 영민한 디아나조차 바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디아나는 자신을 속이려는 사람들에게 강해지는 법은 알았지만, 이렇게 순수하고 꾸밈없는 마음에는 무어라 답을 해야 하는지 아직 몰랐다.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그대를 보고 있으니.”
에드윈이 낮고 따스한 목소리를 내려놓았다. 잠잠해질 사이도 없이, 다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