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디아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는 그저…… 황태자비가 될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전하께서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허, 뭐라?”
루카스가 냉소를 뱉었다. 이제야 디아나가 아는 루카스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몇 번이고 이 대화를 반복했던 디아나다. 루카스는 뿌리칠수록, 선을 그을수록,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것만은 디아나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저는 황태자비가 될 수 없습니다.”
디아나는 그때와 똑같은 말을 했다. 물론 지금의 루카스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요……. 그런 제게 오늘 베풀어 주신 자비에 감사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보다 한 마디가 늘었다. 언제까지나 똑같아서는 되풀이하는 의미가 없었다. 디아나는 착실하게 성장했다.
“내가 뭘 안다는 거지?”
“……예?”
디아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더니 이내 강렬한 당혹감이 서렸다. 아까부터 담담하던 디아나의 급변한 태도가 루카스의 호기심을 끌었다.
“무엇이냐, 내가 안다고 믿은 것이.”
“전하, 저는…… 실언했습니다.”
디아나가 어쩔 줄 모르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놨다. 그럴수록 루카스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디아나를 채근했다.
“고해라, 명령이다.”
지엄한 황태자의 명령에도 디아나는 끝까지 주저했다.
“다시 말하지 않겠다, 소상히 고하라.”
디아나가 탄식을 뱉었다. 은은한 달빛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비췄다. 고아했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초조함으로 가득했다. 루카스는 그런 디아나를 내려다봤다.
“송구하오나…… 저는 이미 전하께서 아신다고…….”
“그러니까, 무엇을?”
“고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디아나가 고개를 떨궜다. 당연히 루카스가 용납할 리 없었다. 디아나는 루카스를 바꿀 수는 없었지만, 그를 이용할 수는 있었다. 선대공비처럼 가면을 쓰는 것도 가능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열여덟의 영애를 연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다른 누군가와 연관이 있군.”
루카스도 아예 바보는 아니었다.
“그 책임은 묻지 못하게 하겠다. 황태자인 나보다 고귀한 자라고 생각하면 계속 침묵하라.”
병상에 있는 황제가 연관됐을 리 없다. 그렇다면 루카스보다 고귀한 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반역이었다. 여기까지 몰렸으니 디아나는 나름대로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은 한 셈이었다.
“전하, 저는…… 하아.”
디아나가 한숨을 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선대공비 전하께서 먼저 사실을 고하신 줄 알고…… 먼저 실언을 했습니다.”
배신은 그레이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레이스는 불과 조금 전에 기세 좋게 디아나를 협박했다. 그 협박에 복종하는 것이나, 이렇게 배반하는 것 사이의 선택은 너무 쉬웠다.
“전하께서도 이미 제가…… 후계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들으신 줄 오해했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디, 잊어 주십시오.”
“……뭐라고?”
“아직 전하께 말씀을 드리지 못했나 봅니다. 곧 아뢰실 것인데 제가 순서도 모르고 이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보다, 그 말이 사실인가?”
루카스에게 내막은 중요치 않았다.
“예, 저는 어릴 적 앓은 병의 영향인지 후계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이라 진단받았습니다.”
디아나가 무릎을 굽혔다.
“부족한 제게 오늘 베풀어 주신 자비, 감사드립니다.”
처연한 표정을 보는 루카스는 뭐라 입을 떼지 못했다.
“더는 전하의 시간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저를 가엾이 여기신다면, 선대공비 전하보다 먼저 고한 실수를…… 묻어 주십시오.”
루카스는 분명 책임을 묻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조했다. 디아나는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건 내 약속한 바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디아나가 다시 한 번 예를 갖추고 돌아서 루카스의 시야를 벗어났다.
처음으로 루카스는 디아나를 붙잡지 않았다. 디아나가 지난 실패에서 배운 대로였다. 애초에 루카스가 디아나에게 곁을 주지 않은 것은 말수가 적고 차분한 성격이 지겨워서였다. 활발한 트리샤에게서 웃음을 찾은 것도 같은 이치였다.
그런데 루카스에게서 벗어나겠다고 고요한 디아나의 모습을 내려놓은 것이 패인이었다. 디아나는 은은한 달그림자에 제 본심을 감춘 채로, 생기 없고 시든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필요한 말은 전부 전했다.
“나도 배우는 게 있어야지.”
아무도 모르게 디아나의 혼잣말이 울렸다. 시린 냉소가 아름다운 입가에 묻었다.
“가르침을 주셨으니, 더욱.”
선대공비의 협박에 굴종해도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둘의 밀담이었다. 그리고 이 중대한 사실을 숨기려 들었다는 것은 중죄였다. 즉, 이 사실이 밝혀질수록 디아나는 떳떳했고 그레이스가 불리한 게임이었다.
물론 선대공비로선 충분히 잘 해냈다. 상대가 보통의 열여덟 영애였다면, 승패는 분명했다. 그래. 선대공비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다. 이번에는 디아나가 너무 뛰어났다.
어두운 달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승부가 결정됐다. 이번에는 그들이 속을 차례였다.
***
각자의 속내를 모르는 채로 무도회가 저물었다. 길고 긴 밤이었다.
디아나는 오랜만에 꿈 하나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드디어 한 단계를 넘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짧은 시간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틀리지 않았다. 그 증거로 루카스는 디아나에게 집착하지 않았고, 디아나는 올바른 거절의 방법을 찾았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하지만 앞날은 모르는 거야.”
디아나는 이제 순진하지도 안일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존엄성과 독립적인 지위를 지키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다. 그것은 선친이 물려준 작위나 유산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뛰어넘어야 하는 거였어.”
붉은 입술의 황후와 자애로운 표정으로 칼을 꽂던 선대공비에게 밀려선 안 된다. 그 시점에서 디아나는 이미 그들의 유용한 장기 말이 되는 것이다.
디아나는 여태 자신의 적을 착각하고 있었다. 실비아 따위는 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루카스는 분명히 원수였지만, 조금 결이 달랐다. 배후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것은 우아하고 품위 있는 여인들이었다. 싸워야 하는 상대는 트리샤만이 아니었다.
“이젠, 지지 않아.”
디아나가 똑바로 앞을 봤다. 싸움이나 권력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디아나의 고요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매번 승부를 걸어야 했다.
“평온은 포기가 아니라 승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거였어.”
선대공비의 가르침은 확실히 전달됐다. 덕분에 디아나는 그 가르침 이상의 것을 깨우쳤다.
***
무도회의 열기가 가시기 무섭게 묘한 기류가 흘렀다. 며칠의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질 정도였다. 디아나에겐 퍽 초조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공작저에 특별한 소식이 오진 않았다. 단지, 제롬이 단순한 보고를 하러 디아나의 집무실에 들렀다.
“황실 무도회가 대단했다지요?”
제롬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디아나를 내심 놀리는 것이다. 그로선 나름대로 친밀감의 표시였다.
“대단……했지요.”
디아나는 말도 하기 싫다는 듯이 푹, 한숨을 쉬었다.
“트리샤 블랑 쪽은 움직임이 없습니다. 사라 블랑이 있는 수도원에도.”
“그렇군요.”
“나머지도 딱히 변한 건 없습니다.”
그제야 디아나가 의아한 시선을 들어 제롬을 봤다. 제롬 하이든의 시간은 곧 돈이었다. 아무런 변화나 보고할 사항이 없다면 왜 공작저에 왔다는 것인가.
“또, 팔고 싶은 정보가 생겼습니다.”
“……사죠.”
싱긋, 제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샤리즈 후작 부인이 저택에서 열기로 했던 파티를 전부 취소했습니다. 그 이유가 좀 재미있지요.”
“샤리즈라면…….”
같은 황태자비 후보였던 가문이다.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제롬을 재촉했다.
“후작 부인은 가문의 영달을 위해서 악마와도 거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진짜 악마의 끄나풀 같은 소식통을 많이 갖고 있죠. 아마 거기엔 수도의 하수구에 드나드는 쥐들도 포함될 겁니다.”
짓궂은 농담이었다. 디아나는 그보다 본론이 궁금했다.
“소문이라는 건, 그 출생이 불분명하기 마련입니다. ……네, 마치 하수구의 쥐들이 소리도 없이 새끼를 치는 것처럼 말이죠. 샤리즈 후작 부인의 귀에 들어간 것도 그중의 한 마리일 겁니다.”
“어떤…… 소문이죠?”
“황태자비로 내정된 아주 고귀한 신분의 영애에게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있다는 발칙한 소문입니다. 정말 무서운 이야기죠.”
디아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제롬 경은 그 사실을 어떻게…….”
선대공비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루카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황후가 움직이지 않은 것을 보면 확실하다. 제롬은 묘한 미소를 짓더니 목소리를 한층 낮췄다.
“그야, 그 쥐새끼들에게 먹이를 준 게 저니까요.”
참으로 명쾌한 해답이었다.
“물론 서비스는 아닙니다. 어떤 고귀한 신사께서 의뢰하신 일이죠.”
디아나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제롬은 드물게 디아나의 감정이 동요하는 것을 보며 내심 흥미를 느꼈다. 젊고 멋진 대공과 공작 영애라, 확실히 재미있는 그림이었다.
“어떻게…… 오늘의 구매엔 만족하셨습니까?”
제롬의 금빛 눈동자가 디아나를 봤다.
“네. 역시 경은 최고군요.”
“그야, 당연한 말씀을.”
뻔뻔하게 답한 제롬은 일부러 과장되게 예를 취했다. 이제 다른 쥐새끼에게 먹이를 주러 갈 시간이었다.
혼자 남은 디아나는 자신을 돕겠노라고 했던 에드윈의 존재를 떠올렸다.
“정말로…….”
그 방법은 디아나도 알지 못했다. 에드윈은 스스로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실제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디아나가 직접 흘리기엔 너무 위험한 일이었지만, 에드윈은 빈틈없이 했을 거다. 중간에서 제롬을 이용한 것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의 말처럼 소문이란 어디서 태어나는지 모르는 법이니까.
“그가 나를 도왔어.”
햇살이 밝았다. 디아나의 마음에도 한 자락, 그 따스한 햇볕이 드리웠다.
***
트리샤는 약재상에 갔다가 얻은 싸구려 기름을 머리에 정성껏 발랐다. 세상에선 붉은 머리카락을 터부시했지만, 트리샤는 나름 자신의 머리카락에 애정이 있었다. 강렬한 붉은색은 트리샤 자신의 성격을 나타내 주는 것 같았고, 어딜 가나 눈에 뜨였다.
“누나!”
“니콜라, 잠시만.”
디아나의 자비로 어머니인 사라가 수도원에서 요양을 할 수 있게 된 후로 한 자락 여유가 생겼다. 어린 동생을 돌보는 게 쉽진 않아도 병자까지 간호하는 것보단 나았다.
“그나저나 아버지가 안 오시네.”
블랑 남작의 외박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개 오전 중에는 고주망태가 돼서 돌아오곤 했는데 오늘은 한낮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뭐, 트리샤에겐 잘된 일이었다.
“오늘은 좀 수월하겠다.”
그러나 그 말을 뱉는 순간, 낯선 마차가 초라한 주택 앞에 멈춰 섰다. 인근에 다른 집은 없으니 목적지는 분명했다. 곧 마차에서 시종이 내렸다. 시종이지만 근사한 차림으로 봐서 대단한 귀족가의 사람 같았다.
“여기가 블랑 남작가입니까?”
“네…… 누구세요?”
시종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낡은 회중시계를 꺼냈다.
“이건…… 아버지의 물건인데.”
블랑 남작은 다른 건 다 저당 잡혀도 저 시계만큼은 내놓지 않았다. 선친의 유품이라나, 귀족의 증거라나.
“블랑 남작께선 지금 샤리즈 후작가에서 쉬고 계십니다.”
“……네?”
“모르셨군요, 영애의 아버님은 샤리즈 후작과 친분이 있으셨죠.”
트리샤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게 대단한 귀족이 왜 블랑 남작과 친분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열여덟이 될 때까지 처음 듣는 얘기였다.
“후작가에서 영애를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증표로 이 시계를 보내셨고요.”
“아버지의 시계가 맞아요. 하지만…….”
트리샤가 곤란한 표정으로 제 곁의 니콜라를 응시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애가 돌아올 때까지 저와 동행한 후작가의 하녀가 영식을 돌볼 겁니다.”
트리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낡은 회중시계가 부르트고 해진 트리샤의 손안에서 딸각거렸다. 운명이 어딘가로 향하며 흘리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