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디아나는 선대공비의 손짓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선대공비가 재차 손짓했다.
“괜찮다. 이리로 가까이…….”
망설이던 디아나가 선대공비에게 다가섰다.
“아름다운 영애에게 이런 먼지가 묻어서는 안 되지.”
“아, 이런 것은 제가 직접…….”
“사양치 말라.”
선대공비가 어느새 디아나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둘의 뺨이 닿을 듯 가까웠다. 선대공비는 디아나의 어깨에 묻은 티끌을 털어 내듯, 손가락으로 튕겨 냈다.
“고귀한 것엔 티끌 하나도 묻어서는 안 되느니라.”
부드러운 어투엔 대공가를 제압했던 카리스마가 담겨 있었다.
“내, 그대가 청했던 가르침의 답을 지금 돌려주마.”
멀리서 보기엔 선대공비가 자애롭게 영애를 돌보고 몸소 아끼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디아나의 등에 식은땀이 주룩 흐르는 긴장감이 엄습했다. 부드러워서 더 두려운 목소리였다.
“그대에게 묻었던 사소한 티끌은 이렇게 털어 내면 된다. ……아무도 눈치채기 전에.”
디아나의 입가가 굳어졌다. 그것은 디아나가 후계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이라는 고백에 대한 답이었다. 끝내 선대공비는 은폐를 택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하오나…….”
“끝까지 들어라.”
툭툭, 선대공비가 디아나의 옷자락을 털어 냈다.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내가 이리 손수 그대의 티끌을 털어 주었는데, 아직도 흠결이 있는 채여서는 안 되겠지?”
디아나가 무거운 숨을 삼켰다. 과연, 그 황후와 자매였다. 인자한 인상과 현명하다는 평판에 휘둘린 디아나 자신이 어리석었을 뿐이다.
“그대를 아끼는 나의 마음을…… 이해하겠는가?”
“……예, 전하.”
지금 선대공비는 자신의 선에서 숨기는 것을 넘어서 디아나에게도 침묵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것을 어기는 대가가 무엇인지 말하진 않았지만, 무슨 일을 당해도 이상할 것 같진 않았다.
“또한 그대 자신이 한낱 하찮은 티끌이 되어 손짓 한 번에 튕겨 나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레이스가 정확히 디아나의 귓가에 대고 우아한 입술을 열었다.
찰나, 자애로운 표정이 가시고 눈빛에 섬뜩함이 감돌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만에 하나라도 내 아들에게 티끌이 된다면, 용서치 않겠다.”
그 경고는 진심이었다. 어디서부터 눈치를 챈 것일까. 아니, 그리 현명하다던 선대공비가 제 아들의 일을 모를 리 없었다. 디아나는 섬뜩한 협박을 하고선 다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미소를 짓는 선대공비를 조금 망연한 눈으로 봤다.
“이제 깨끗해졌구나.”
기품 있는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문득 황후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만 황태자 전하께 가 보거라.”
“……예, 전하. 물러가겠습니다.”
디아나는 예를 갖추고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루카스가 기다리는 정원이 도피처로 생각될 만큼, 방금의 그레이스에겐 살기가 서렸다. 그래, 그건 분명 살기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장이 둘의 대화가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디아나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기도 전에, 루카스를 향해 걸음을 옮겨야 했다. 예상대로 무척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에드윈은 시종의 인도를 받아 정원 쪽으로 나서는 디아나의 뒷모습을 보고는 조금 쓴 입맛을 다셨다. 여태 단 한 번도 루카스의 것을 부러워한 적이 없는데, 지금만큼은 황태자의 권위라는 것이 마냥 좋아 보였다.
만일 에드윈에게 그런 권리가 있었다면, 루카스를 대신해서 영애들에게 얼굴을 비추는 대신 디아나와 달밤의 정원을 산책할 수 있었을 테니까.
“대공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아.”
자신을 향해 예를 갖추는 여인의 목소리에 에드윈은 다시 주의를 돌렸다.
“샤리즈 후작부인.”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대공 전하.”
검은 공단 드레스를 입은 후작부인이 기쁜 듯이 미소를 지었다. 아까부터 황태자의 주목을 받는 디아나의 존재 때문에 속에서 천불이 나는 터였지만, 귀족의 가면은 꽤 튼튼했다.
“전하께 제 부족한 여식을 인사시켜 드리고 싶사온데.”
“안 그래도 황태자 전하께서 안부를 전하라셨다.”
“어머, 영광이라고 꼭 전해 주셔요.”
후작 부인이 부채를 살랑이더니 뒤에 서 있던 제 딸을 끌어왔다. 영애는 배운 대로 에드윈 앞에서 무릎을 굽혀 예를 갖췄다.
“샤리즈 후작가의 비비안입니다.”
디아나를 보고 오지 않았다면 꽤 미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영애였다. 황태자비 후보로 낙점된 셋 중의 하나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전혀 부족하지 않은걸, 후작부인의 겸양이 과하군.”
나쁘지 않은 에드윈의 반응에 후작 부인은 딴청을 하며 슬쩍 자리를 비켰다. 황태자비가 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차선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대공비였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살짝 떨리는 비비안의 목소리가 울렸다. 엄격한 귀족의 예법이 배인 몸짓이었지만, 아직 떨리는 마음을 전부 숨길 수는 없는 또래였다.
“영애는 나이가 몇이지?”
“올해로…… 열여덟입니다.”
“같군.”
에드윈이 무심결에 디아나를 떠올리고 말을 뱉었다.
“예?”
“아, 황태자 전하와 같다는 뜻이다.”
“네에, 그렇사옵니다.”
잠시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사실 에드윈의 본 모습이었다. 디아나에게 먼저 이런저런 말을 붙였던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디아나는 그저 눈만 마주쳐도 어색하지 않았는데, 이런 상황이 되자 본래 자신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이래서 여인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인데.
“황태자 전하를 뵌 적이 있나?”
공통의 화제는 그 정도였다.
“자란 이후로는 없습니다.”
“그렇군.”
비비안은 갈색 눈동자를 조심스레 들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단정한 미인이었다. 디아나가 없었다면 아름답다는 찬사를 들을 만도 했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테지만요.”
열여덟 영애의 시선이 퍽 씁쓸했다. 오늘 연회에서 보여 줬듯 황태자비는 거의 디아나로 확정됐다. 자신이 밀려난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태도였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제게 자격이 부족했던 것뿐입니다.”
비비안이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에드윈은 자신의 처지를 떠나서 순수하게 동정심이 들었다. 황태자비란 자리 하나를 두고 얼마나 많은 영애가 어린 나이에 제 부모의 기대감을 짊어져야 했을까. 루카스가 어떤 인물인지를 아는 에드윈으로선 무척 씁쓸한 사실이다.
“내가 보기엔 부족하지 않다.”
에드윈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서글픈 눈빛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외람되오나…… 청이 있습니다, 전하.”
어째 최근엔 영애로부터 청을 듣는 일이 잦다.
“뭐지.”
“방금 같은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내가 그럴 만한 말을 했던가.”
비비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가 관대한 분이라는 것은 풍문으로 들었습니다. 인품이 무척 훌륭한 분이라고도.”
잠깐, 비비안의 입가가 굳어졌다가 움직였다.
“하오나 전하의 관대함을 특별한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비비안은 조심스럽게 눈짓으로 제 어머니 쪽을 가리켰다. 후작 부인은 아까부터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흘끔흘끔 제 딸과 대공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았다.”
황태자비가 안 된다면, 대공비였다. 비단 비비안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아까부터 에드윈에게 따라붙는 눈초리 중에는 밀레타 공국에서 몸소 찾아온 공작부인도 있었다. 열여섯 된 딸의 손을 붙든 채였다.
“피차 고생이 많군.”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드윈은 잠시 비비안을 주시했다. 황태자비의 자리에 충분히 어울리는 영애였다. 무엇보다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면 디아나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면 에드윈에게도 기회가 온다.
“모두를 위해서…… 더 나은 방법이 있을지도.”
낮은 에드윈의 혼잣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현재 에드윈이 아는 것은 디아나가 황태자비의 관을 원치 않는다는 것과 후계를 생산할 수 없다는 비밀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부드럽게 전할 수 있는 최선의 통로인 선대공비는 침묵을 택했다. 하지만 과연 선대공비만이 유일한 답이었을까.
“그래, 다른 방법이.”
뭔가 깨달은 듯한 에드윈의 중얼거림이 낮게 울렸다.
“전하, 방금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초점이 또렷해졌다. 여태 생각지 못했던 가능성이 떠오른 덕분이다. 그것을 일깨운 건 우습게도 비비안 너머로 보이는 후작 부인의 긴장된 시선이었다.
그뿐인가, 밀레타 공작부인도 계속 에드윈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황태자비 자리를 놓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드윈은 어디까지나 차선이었다. 아직도 그들의 최선은 황태자비였다.
“내가 좀 편협했던 것 같군.”
알 수 없는 에드윈의 말에 비비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드윈과 디아나 모두, 황태자비가 이미 내정됐다는 것을 전제로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연회장에 나오니 이토록 영욕을 꿈꾸는 시선이 많았다. 게다가 그들과 디아나의 이해관계는 일치할 것이다.
“영애도 쉽게 낙심하지 마라. 가능성은…… 생각보다 여러 가지인 법이니.”
에드윈이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
은은한 달빛 아래 비친 디아나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루카스는 잠시 디아나의 조각 같은 옆얼굴을 주시했다.
연회장에 디아나가 들어서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 모두엔 루카스도 포함이었다. 본능적으로 시선을 줄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대는 좀처럼 말이 없군. 웃음도.”
그게 묘한 이질감을 줬다. 그리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 한 번이 피지를 않으니 보는 루카스로선 기이한 노릇이었다. 적어도 루카스의 안전에는 항상 그 비위를 맞춰 대느라 입꼬리에 경련이 일도록 웃어 대는 여인들뿐이었으니 더욱.
“어려서부터 병약한 탓에. 송구합니다.”
디아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사이로 정원에 바람이 불었다. 바람결에 달빛을 닮은 디아나의 백금발이 흩날렸다. 그 바람은 디아나의 향기를 실어 루카스의 코를 간질이고 지나갔다.
“그래? 나도 그랬다.”
루카스의 입가에 살짝 온기가 스몄다.
“어릴 때부터 병약해서 늘 갇혀 지냈지. 그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예?”
침착했던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루카스가 이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 놀라웠다.
“남들은 모르는 것이지. 그 갑갑함이라든가, 무료함…… 허나, 막상 이렇게 사람이 붐비는 곳에 오면 그 또한 지겹고 숨이 막힌다. 안 그런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대는 나와 닮았구나.”
깜박, 디아나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 또한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디아나의 예상 안에서 루카스는 크게 두 가지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 디아나에게 자신의 호감을 강요하고, 자신을 거부하는 이유를 집요하게 묻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해라니, 이건 변수치고도 심했다.
“그럴 리가요.”
“아니. 이 고요한 정원에서 그대를 보니 연회장보다 훨씬 즐겁다는 생각이 든다.”
변덕이 심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에드윈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다가 금세 관대한 체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짓는 루카스를 보자 절로 심란해졌다. 하지만 디아나는 변수에 적응할 각오가 충분했다.
“전하께서 절 이해해 주신다니 다행입니다.”
“그 마음은 겪어 본 이만 아는 것이지.”
그제야 디아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루카스는 잠자코 그것을 주시했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병치레의 흔적이 남은 전 황실의 일원이 되기에는 참으로 부족하지요.”
루카스의 미간에 금이 갔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무슨 뜻이지.”
“제가 감히 황태자비 후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찌 제 처지를 전할지 고민했으나, 관대하신 전하께서 이렇게 너른 마음으로 기회를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것은 어깨너머로 에드윈을 흉내 낸 것이다. 루카스는 자신의 고귀함과 관대함을 과시하고 싶어 안달이 난 아이나 다름없었다. 체면 때문이라도 디아나의 말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루카스가 그리 만만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