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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56화 (56/184)

56화

어느새 연회장 가득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모두 높은 신분의 귀족으로, 황실의 무도회에 초대받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더 높은 곳이 있었으니, 그런 그들이 왈츠를 추고 샴페인을 즐기는 모습을 연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황실의 주인이었다.

디아나도 본의 아니게 한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황족의 것보다 조금 장식이 덜한 의자였다. 고작 그 차이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의전이란 황실에서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디아나라…… 예쁜 이름이군.”

루카스의 목소리에 디아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와 같은 말이다. 디아나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토록 변하길 원하는 루카스와의 관계나 그의 관심은 항상 그대로였고, 새로 변하는 것들은 모두 툭 튀어나와 디아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나이는 몇이지?”

“열여덟입니다.”

“나와 같군.”

선대공비와 황후가 담소를 나누던 중, 이쪽을 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그들은 타인에게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 루카스가 디아나에게 말을 거는 광경이 흥미로운 것 같았다.

디아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연회장으로 향했다. 각양각색의 드레스 자락이 꽃잎처럼 나풀거렸다. 멋진 음식과 샴페인은 끊임없이 채워졌고, 모두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실비아라든가, 샤리즈 후작부인이라든가.

“본래 말수가 적은가? 아니면 긴장한 것이냐.”

루카스의 시선은 이미 디아나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무슨 생각이 담겼는지 알 수는 없었다.

“사교계에 처음 나오는지라.”

“그간엔 뭘 했지?”

“어려서부터 병약해, 죽 공작저에서 요양했습니다.”

“뭐, 그렇다면…….”

디아나의 말에 루카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낯설겠군. 특히나 의지할 에스코트가 자리를 비웠으니 더욱.”

그 말에 가시가 있었다. 디아나는 에드윈을 향한 루카스의 복잡한 감정을 모르는 채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목소리에 언짢음이 살짝 묻어난 것을 놓치진 않았다.

디아나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황후와 선대공비의 담소에 낀 에드윈 쪽은 일부러 보지도 않았는데.

“대공 전하께선, 선친이 작고하신 제 사정을 배려해 주셨지요.”

“아아.”

첫 사교계 데뷔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가문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어쨌거나 사교계의 첫걸음이니 그 영애의 앞날을 축복하는 의미였다.

“대공은 무척 친절하니까.”

그래도 루카스는 이 조합을 어느 정도 납득한 것 같았다.

“안 그런가, 에드윈?”

루카스가 목소리를 높여 황후와 선대공비 곁에 서 있는 에드윈에게 외쳤다. 에드윈은 두 여인에게 양해를 구한 후에 루카스의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그대가 무척 친절하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다.”

에드윈은 살짝 입가를 느슨하게 풀었다. 루카스의 곁에 앉은 디아나를 보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디아나의 눈동자에 어린 수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왠지 에드윈의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다.

“황태자 전하의 도량만 하겠습니까.”

“게다가 겸손하기까지. 어떤가, 영애. 대공은 참 멋진 사람이 아닌가.”

루카스가 다시 디아나에게 시선을 줬다. 그 유치한 속내는 뻔했다. 굳이 디아나의 입으로 부정을 듣고 싶은 것이다. 에드윈처럼 황태자인 자신을 찬양하는 한마디까지.

“네…….”

그러나 디아나는 애매한 답을 흘렸을 뿐, 결코 루카스가 원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걸 보는 루카스의 미소가 슬쩍 비틀렸다.

“두 번째 왈츠 곡이 곧 시작한다는군요.”

에드윈이 경직된 분위기를 풀었다.

“이왕 에스코트로서 나섰으니, 영애에게 왈츠를 청해도 될까요.”

디아나는 그 말에 미소가 나오려는 것을 순간적으로 눌렀다. 이 불편한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까부터 연회장에서 춤을 추는 영애들의 발그레한 두 뺨을 보며 혼자만 간직하는 에드윈과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왈츠 따위, 시시하지 않나.”

루카스의 시비에도 에드윈은 굳이 제 말을 거두지 않았다.

“영애의 첫 사교계 데뷔이니 빠트릴 수는 없죠.”

오히려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황태자 전하처럼 존귀한 분이 서투른 첫 왈츠에 나서시는 것도 안 될 말이니까요.”

에드윈은 꽤 능숙하게 루카스를 다뤘다. 곧 루카스가 대충 고갯짓을 했다.

“그도 그렇지. 난 존귀한 몸이니.”

루카스는 연회장에서 춤을 춘 적이 없었다. 황실의 예법으로 배우긴 했지만, 그리 실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루카스보다 먼저 사교계에 데뷔한 에드윈은 첫 왈츠부터 완벽하단 찬사를 들었다. 그러니 루카스가 에드윈보다 못하단 말을 듣지 않으려 아예 무대에 발을 올리지 않은 거다.

“그럼, 잠시 영애를 데려가겠습니다.”

“난 여기서 지켜보겠다.”

자못 권위적인 루카스의 말보다, 에드윈이 뻗은 손이 더 분명하게 다가왔다.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고 불편하기만 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둘이 무대에 다가갈 때쯤, 오케스트라가 경쾌한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왈츠도 처음인가?”

“실전은 처음입니다.”

그 말에 어째서인지 에드윈은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렀다. 다행히 루카스를 등진 채였다.

“그래도 걱정할 것 없다.”

“전하의 발은…… 튼튼하기 때문인가요?”

디아나는 이전의 삶에서 에드윈이 들려줬던 말을 돌려줬다. 그러자 에드윈의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훅 짙어졌다.

“그대는 내 마음을 읽는 것 같군.”

“우연이겠죠.”

첫 스텝은 에드윈의 리드에 따라 부드럽게 시작됐다.

“아니, 정말로 방금 그 말을 하려고 했거든.”

디아나는 그저 분홍빛 미소를 머금은 채, 사랑스러운 왈츠 선율에 몸을 실었다. 완벽하다고 할 수 없는 춤사위는 흩날리는 백금발과 드레스 자락, 디아나의 존재 자체에서 풍기는 우아한 분위기에 묻혀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냈다.

“영애의 첫 왈츠 상대가 될 수 있어서 기쁘군.”

핑그르르 회전했던 디아나의 손을 제 품 쪽으로 잡아끌며 에드윈이 낮게 속삭였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 속에서 커다란 에드윈의 등이 비밀스러운 공간을 만들어 냈다. 디아나는 그리워했던 기억보다 더욱 생생한 에드윈의 존재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저의 첫 상대가 전하라서…… 영광입니다.”

살짝 디아나의 뺨이 붉어졌다. 왈츠의 스텝 때문인지, 이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에드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방금의 말이 에드윈의 가슴을 꿰뚫었다는 것이다. 그 말 자체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디아나의 수줍은 자태와 함께하니 감히 떠올려선 안 될 감정이 훅 치고 올라왔다.

“나도 처음이다.”

에드윈은 제 심장이 난폭하게 뛰기 전에 솔직한 말을 뱉었다.

“왈츠의 곡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 것은.”

그리고 부드럽게 덧붙였다. 디아나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지만, 푸른 눈동자에서 닮은 마음이 느껴졌다.

은하수의 흐름처럼 아름다운 왈츠였다. 커다란 대공의 손을 잡은 공작 영애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두고두고 사교계에서 전해질 것이다. 적어도 이 모습을 본 사람은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그것은 루카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

무도회의 1부가 끝났다. 잠시 차려진 음식을 들고, 샴페인을 나누며 귀족 계급만의 사교를 나눌 시간이었다. 루카스는 에드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제 곁으로 돌아오는 디아나를 보며 건조한 시선을 들었다.

“첫 왈츠는 즐거웠나?”

어떤 답도 이미 틀렸다. 디아나가 망설이는 사이, 에드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의 앞에서 선보일 수 있다니, 좋은 추억이 되겠지요.”

“……그야, 그렇지.”

루카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디아나는 루카스를 이렇게까지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내심 놀랐다. 그 트리샤조차 미약의 힘을 빌렸고, 매분 매초 죽을힘을 다해서 맞춘 것이 루카스의 심기였다. 쉬운 일이 아니란 뜻이다.

“오늘 선을 보이는 귀족 영애들이 많다더군.”

흘깃, 루카스가 눈짓했다.

“어떤가, 친절한 대공이 귀찮은 날 대신해서 인사를 전해 주는 것은.”

권유가 아니었다. 에드윈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권유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곧 디아나가 루카스와 남겨질 것을 떠올리면 에드윈이 먼저 그의 기분을 달래 둘 필요가 있었다. 루카스는 한 마디에도 금세 기분이 변하곤 했으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루카스는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 둘이 남았다. 디아나는 루카스와 나란히 앉아서 연회장을 보던 기억을 상기했다. 아니, 그땐 둘이 아니었다. 트리샤가 있었으니 셋이다. 어쩌면 디아나의 존재감은 의미가 없을 때니 그들 둘이었는지도.

“연회는 따분하다.”

그 나름대로 대화를 시도하는 거였다.

“영애들은 이런 걸 즐거워하더군. 그대도 그런가?”

“처음이라 아직 어렵습니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대공비와 황후는 각각 귀족들에게 인사를 받느라 한창 바빴다. 그의 시선엔 에드윈도 보였다. 루카스의 말을 착실히 지키듯 연회장의 영애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었다.

디아나도 그것을 봤다. 그러나 딱히 마음에 동요가 일진 않았다. 루카스는 그런 디아나의 옆얼굴을 보며 약간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도 이곳에선 즐겁지 않아 보이는군.”

멋대로 내뱉은 루카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시종을 따라 정원으로 나와라. 보여 줄 것이 있다.”

디아나는 조금 쓴 미소를 지었다. 어떤 것은 변하지 않는다. 한 번은 지나쳐야만 하는 것이리라.

“난 먼저 나가서 바람을 쐬겠다.”

루카스는 거절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채로 먼저 자리를 떴다. 창밖으로는 새카만 밤 아래 무수히 많은 등을 밝혀 빛나는 정원이 보였다. 그곳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것은 황족과 그들의 초대를 받은 자들뿐이었다.

디아나에겐 얽힌 것이 많은 장소였다. 그 정원 자체에 위안을 받고 사랑했던 적도 있지만, 대개는 루카스와 관련한 안 좋은 기억이 더 많았다. 게다가 마지막 순간엔 저 정원 앞에서 황후의 명으로 꿇어앉아 찬물 세례를 맞았다. 그립고 씁쓸한 맛이 입안에서 엉켰다.

“공작 영애님.”

그때 시녀장이 조용히 다가와 귀엣말을 했다. 디아나가 상념에서 벗어나자 시녀장은 조심스레 황후와 선대공비를 향해 손짓했다.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일어서 그들 앞에 섰다.

“아까 인사만 겨우 드려 죄송합니다.”

디아나가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일어서라. 황태자와 환담을 나누던 중이니, 그럴 수밖에.”

황후의 붉은 입술이 만족스럽게 호선을 그렸다.

“어찌, 이야기는 많이 나누었느냐.”

“예…… 곧 정원을 산책하자고 하셨습니다.”

“호, 그래?”

루카스의 마음에 이 아름다운 영애가 꼭 들었나 보다. 황후는 한 시름 덜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면에 미소를 피웠다. 디아나는 지금 짓고 있는 거짓 미소 때문에 입가에 경련이 일 것 같은 것을 꾹 참았다. 그때, 자신의 뺨을 치고 표독스럽게 몰아붙였던 스텔라의 미소를 보는 건 괴로웠다.

“잘 됐구나. 잘 됐어.”

“저도 진작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요.”

선대공비가 차분하되 또렷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나 그 시선은 묘한 기색으로 디아나를 훑었다.

“폐하, 샤리즈 후작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알았다.”

황후가 시종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디아나를 봤다.

“황실의 정원은 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천천히 돌아보며 정취를 느끼거라.”

시종장의 부축을 받은 황후가 일어서 샤리즈 후작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디아나는 남은 선대공비에게 예를 올리고 정원으로 나설 생각이었다.

“그럼, 선대공비 전하께서도 즐거운…….”

“잠깐.”

무릎을 굽히는 디아나를 향해 선대공비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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