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에드윈을 주시했다. 에드윈은 대담하고도 발칙한 영애의 말을 듣고도 침착한 시선이었다.
“물론 영애를 도울 수 있다.”
에드윈의 낮은 목소리가 디아나를 안심시켰다. 사실, 에드윈에겐 처음부터 이런 마음이 있었다. 저물어 가던 석양 속에서 반짝이는 디아나를 본 순간, 뭐든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에드윈의 마음이 디아나를 그렇게 각인했다.
“하지만 영애가 원하는 정확한 도움이 무엇인지 모르겠군.”
“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음? 그건 무슨 뜻이지?”
저음이 부드럽게 마차 안을 울렸다. 어째서인지 에드윈 앞에 서면 솔직해지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은 항상 올곧았고, 낮은 목소리와 너른 품은 안심이 됐다.
“저는 황태자비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디아나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제 의지만으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랬다. 디아나는 이전의 생에서도, 지금의 생에서도 황태자비가 되는 것을 피하려 노력했다. 자신의 계책이 충분히 통할 거라 여긴 순간마다 변수가 튀어나와서 무너지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애초에 디아나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일이었다. 그 책의 커다란 흐름이기도 했고, 디아나가 무언가를 바꾸려 수를 써도 좀처럼 통하지 않는 문제였다.
“제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도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디아나는 이미 선대공비를 움직이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디아나의 눈앞에 새로운 가능성이 있었다. 디아나는 그 가능성에 자신의 운명을 걸어 보기로 했다.
“전하께 고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에드윈이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에드윈은 디아나를 채근하지 않았다. 디아나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입을 열었다.
“대공가에서 전하와 처음 마주친 날을 기억하시나요?”
“물론.”
즉답이었다.
“그때, 선대공비 전하를 알현한 것은 어떤 사실을 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군.”
에드윈은 그 내용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전 어릴 때부터 병약한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황태자비라는 중책을 맡기 전에 비밀리에 의원을 들여 저의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여러 명의 의원에게 보였지요.”
디아나는 이번 생에도 착실히 자신이 불임이라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현대의 기본적인 의학 상식과 지나간 삶, 아픈 유산의 경험…… 그것은 의원에게 불임이란 판단을 내리게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 시대엔 귀족 여성의 몸을 내밀히 진찰할 수도, 과학적으로 검사를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즉, 대부분의 진단은 증상을 관찰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디아나로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저는.”
차분한 목소리가 울리자, 에드윈이 시선으로 계속하라는 뜻을 비쳤다.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어느 시대건,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물며 이 시대에 미혼인 남녀에겐 있을 수 없는 화제였다. 그래도 디아나는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후계를 생산할 수 없는 몸입니다.”
이번만큼은 에드윈의 눈에도 당혹감이 서렸다. 그 사실 자체와 그것을 고스란히 제게 말하는 디아나, 둘 중 어느 것이 더 놀라운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걸 내게 말하는 이유는? 아니, 잠깐…….”
디아나는 그 사실을 고하기 위해 선대공비를 알현했다고 했다. 순간, 에드윈의 뇌리에 어떤 밤이 스쳤다. 완벽한 황태자비라며 웃던 어머니의 눈동자엔 묘한 빛이 반짝였다. 황후와 어머니의 관계를 잘 아는 에드윈으로선, 쉬이 넘기기 어려운 단서였다.
“어머님께도 그 사실을 고했는데, 어째서.”
“한낱 영애인 제가 어찌 선대공비 전하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나마 적절한 대답이었다. 에드윈이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선대공비는 황태자비 후보인 디아나가 후계를 생산하기 어렵다는 말을 본인에게서 직접 들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기뻐했다.
“허.”
에드윈이 허탈한 실소를 뱉었다. 하긴, 그레이스의 처지에서만 따지면 황태자인 루카스가 후계를 얻든 말든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황후와의 관계를 떠올리면,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라면, 충분히 그 사실을 알고도 묵인할 수 있었다.
“내 어머님을 찾아간 것은 실수였다.”
“……네.”
“하지만 지금 내게 말한 것은 그 실수를 돌이킬 기회였어.”
디아나의 눈빛에 한 줄기 희망이 어렸다.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물론.”
에드윈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흑안에 안심하라는 의미의 온기가 서렸다. 에드윈이 정말로 디아나의 불행을 막을 수 있을진 몰라도, 디아나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그 말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디아나가 황태자비로 공표되기 전이었으며 에드윈이 그것을 막을 기회가 남은 것이다. 무엇보다 에드윈이 마음 한구석에서 내내 원하던 것이기도 했다. 그건 감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마음이었지만, 이제 에드윈에겐 타당한 이유가 생겼다.
“약속하지, 내가 그대를 돕겠다.”
디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 분홍빛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배었다. 같은 순간, 에드윈의 흑안에도 분명한 빛이 떠올랐다.
***
황실 무도회는 무척이나 성대했다. 호화로운 귀족들의 마차가 줄줄이 늘어섰고, 한껏 치장한 부인들과 영애들이 정원의 꽃보다 많았다. 대공의 마차는 줄을 제치고 무도회장의 입구에 멈췄다. 시종장이 격식을 갖춰 마차의 문을 열자, 에드윈이 먼저 내린 후에 마차 안으로 손을 뻗었다.
“발밑을 조심하길.”
대공가의 마차가 도착하는 순간부터 모두의 이목이 에드윈에게 쏠려 있었다. 특히, 그가 마차 안으로 손을 뻗었다는 것은 일행이 있단 뜻이었다. 선대공비가 아까 입궁한 것을 본 사람들은 그 행운의 주인공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네.”
에드윈의 커다란 손 위에 장갑을 낀 작은 손이 얹혔다. 이내 아름다운 드레스 자락이 마차의 문 사이로 비추더니, 곧 디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까지 저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입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뚝 멎었다.
“멋진 무도회가 될 것 같군.”
“그러게요.”
둘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듯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그리 화려했던 부인들과 영애들의 한껏 꾸민 모습은 디아나의 등장과 함께 일순간에 색을 잃어버렸다. 오직 디아나와 그런 디아나를 에스코트하는 에드윈의 모습만이 회색의 배경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떤 그림보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예쁜 전쟁터 같아요.”
연회장에 들어선 디아나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에드윈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말에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무심한 표정으로 유명한 대공이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웃었다는 것만으로도 사교계의 화젯거리가 될 터였다.
“딱 들어맞는 표현이군.”
에드윈은 벌써 둘을 주시하는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을 느꼈다.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다. 가까이엔 실비아와 샤리즈 후작부인이 각각 다른 곳에서 디아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저 멀리 상석에 있는 황후와 선대공비 그리고 황태자 루카스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 광경이 그들에게 즐거울 리는 없었다.
“황후 폐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시종장이 두꺼운 봉을 쿵쿵, 바닥에 내리치자 연회장이 고요해졌다. 황후는 천천히 일어서서 좌중을 둘러보곤 붉은 입술을 열었다.
“오늘의 연회는 제국과 황실의 번영을 기리는 자리다.”
디아나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란다.”
말을 마친 황후의 눈빛이 디아나를 주시했다. 디아나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한결같이 고아한 표정을 유지했다. 황후의 말이 끝나자 시종장이 다시 봉을 두 번 내리쳤고, 오케스트라가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내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이제, 시작이군.”
“네.”
에드윈이 창밖의 석양을 보며 말했다. 본격적인 무도회는 밖이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 때부터 시작이었다. 아마 오늘은 여러 사람에게 긴 밤이 될 것이다.
“우선 그대를 에스코트하는 사람으로서, 웃전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을 돕고 싶은데.”
디아나를 배려한 말이었다. 아무리 디아나라도 혼자 그들 앞에 서는 것은 아직 부담스러웠다. 그때 마침 에드윈이 제 몫을 해 주는 것이다.
“조금, 용기가 나네요.”
그 말에 에드윈은 묘한 미소로 디아나를 응시했다. 그리 당당하고 곧은 자세를 한 디아나였다. 에드윈에게 했던 언행을 떠올리면 무척이나 용기 있고 대범한 사람이기도 했다.
“겸손이 지나치군.”
디아나는 달리 대답하는 대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에드윈은 디아나를 에스코트하던 팔의 자세를 반듯하게 잡은 후에 조심스럽게 디아나를 이끌었다.
둘이 걸음을 딛는 곳마다 사람들이 갈라지며 절로 길이 생겼다. 그러자 이내 눈앞에 연단이 보였다. 이 연회의 주인들이 앉은 자리였다.
“준비됐나.”
“……네.”
서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디아나의 답을 들은 에드윈이 연단 앞에 나서서 먼저 예를 갖췄다. 에스코트하는 자가 먼저 예를 갖춘 후에 영애를 소개하는 것이 무도회의 관례였다. 이 경우엔 대공이란 신분이 있어서 묘했지만, 어쨌거나 에드윈 본인이 이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기쁜 날을 맞아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 그리고 선대공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에드윈이 살짝 굽혔던 상반신을 들었다. 예상대로 그리 유쾌하지 않은 얼굴들이 보였다.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에스코트를 맡은 카를가의 디아나 영애를 소개하겠습니다.”
디아나의 차례였다. 디아나는 앞으로 한 발짝을 살포시 내밀고 드레스 자락을 들어 우아하게 예를 올렸다. 그 몸짓이 얼마나 유려했던지 마치 꽃송이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
“카를가의 디아나가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 선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든 디아나의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묻어났다. 앞을 보는 시선은 조심스러웠지만, 그 눈동자만은 맑고 깨끗하게 빛났다.
“흐음.”
예상외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루카스였다.
“그대가 디아나 카를인가?”
살짝, 눈썹을 찡그린 루카스의 목소리에도 디아나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다만, 본능적으로 의지가 되는 에드윈의 팔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예, 전하.”
“그래, 그렇단 말이지.”
루카스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묘하게 빛났다. 그것은 몇 번의 생이 반복되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곧 차갑게 식어 버릴 눈동자다. 모든 걸 이미 알고 있는 디아나로선 그런 것에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었다.
“루카스 전하의 귀한 손님이니, 내 특별히 대공을 보내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선대공비 그레이스가 먼저 연막을 던졌다. 제 아들의 독선적인 행동에 대한 부드러운 무마였다.
“선대공비의 마음이 고맙군요.”
“디아나 영애는 황실의 손님. 황실의 품위를 지키는 일인데, 당연히 도와야지요.”
싱긋, 닮은 듯 닮지 않은 자매가 입으로만 웃으며 말을 나눴다. 디아나는 약간 착잡한 기분으로 선대공비를 봤지만, 선대공비는 마치 지금이 첫 만남인 것처럼 태연했다.
“마침 왈츠가 시작됐군요.”
등 뒤로 울리는 선율에 에드윈이 말을 꺼냈다. 지금 디아나의 에스코트는 자신이었다. 첫 왈츠는 에스코트와 함께하는 것이 예법이다. 디아나는 문득 예전 에드윈과 첫 왈츠를 췄던 기억을 떠올렸다. 다시 한 번 에드윈과 춤을 출 생각을 하니 어쩐지 처음보다 더 떨리는 것 같아 이상했다.
“……아니, 왈츠 따위 시시할 뿐이다.”
루카스의 서늘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시종장.”
“예, 전하.”
“공작 영애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라.”
예상치 못한 변화였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돌아온다고 해도 동시에 모든 일이 급변했다. 마치 평범한 인생이 그러하듯이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었다.
“영광입니다, 전하.”
디아나가 우아하게 예를 갖췄다. 그제야 루카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제 디아나는 누구나 그러하듯, 정해지지 않은 현재와 알 수 없는 미래를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