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54화 (54/184)

54화

무도회에 참가할 준비를 마친 선대공비 그레이스가 우아하게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검은색의 고급스러운 원단에 황금색의 실로 수를 놓은 드레스는 그녀의 품위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에드윈은?”

“곧 나오실 겁니다만…….”

집사장이 말끝을 묘하게 흐리자, 그레이스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뭐지?”

“전하께선 다른 마차로 가신다고 하셔서, 마차를 두 대 준비했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그레이스가 조금 황당한 표정을 지으려는 찰나, 에드윈이 등장했다. 평소처럼 어두운 빛의 예복이 아닌 하얀색의, 에드윈치고는 꽤 화려한 예복 차림이었다.

“에드윈, 마차를 두 대 준비시켰다던데?”

“아, 제가 말씀 안 드렸던가요.”

에드윈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에드윈이 그 사실을 잊었다고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치미를 떼는 거다.

“그래, 처음 듣는구나. 무슨 이유라도?”

“따로 일행이 있습니다.”

“일행이라니?”

“에스코트를 맡았거든요.”

여태 말을 안 하던 것치고는 솔직한 대답이었다. 하긴, 에드윈은 언제나 정면돌파를 했던 제 아버지를 닮았다. 즉, 지금은 그레이스가 말려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 행운의 영애가 누구인지…… 나도 알 수 있을까?”

“카를가의 디아나 영애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에드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레이스는 표정이 굳어지려는 것을 애써 누른 채,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미리 알았다면 당연히 반대했을 일이다. 심지어 에드윈은 디아나가 황태자비로 낙점됐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제 아들이라지만, 그레이스는 지금 에드윈의 속을 읽기가 어려웠다.

“우연히, 나도 아는 영애구나.”

“아, 그랬었죠.”

“뭐…… 그래. 영애의 선친이 없으니 명예를 지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신사적인 일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그레이스의 입가가 살짝 굳어졌다.

“그래…… 헌데, 카를가의 영애와 네가 친분이 있었던가?”

모르는 체 툭 던지는 그레이스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했다.

“아, 우연한 기회였습니다. 지인이라고…… 해 두죠.”

에드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레이스도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야 할 순간이었다.

“그럼, 이따 무도회장에서 뵙겠습니다.”

“그러자. 무사히 영애를 에스코트하렴.”

“예.”

꾸벅, 인사를 올리고 나서는 에드윈의 뒷모습이 평소보다 경쾌하게 보였다. 늘 예의와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였지만, 어머니인 그레이스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에드윈의 발걸음이 아주 가볍다는 것과 내심 서두르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평소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하얀색의 화려한 예복까지.

“도대체…… 저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레이스가 씁쓸하고 혼란스러운 혼잣말을 뱉었다.

“느낌이 안 좋아.”

어머니의 직감은 그 어떤 논리보다 정확했다. 그레이스는 지난날 만났던 디아나를 떠올렸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눈에 반할 만한 미인이었다. 게다가 그레이스의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영명한 모습과 차분한 태도까지 완벽했다.

“지인이라…….”

그레이스가 혼잣말을 짓씹었다.

“골칫거리가 아닌지 모르겠군.”

에드윈에겐 앞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여겼다. 여태 자라면서 속 한 번 썩이지 않던 아들이라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일말의 불안감이 들었다. 에드윈의 나이가 벌써 스물하나였고, 그사이 교제를 한 영애나 그 비슷한 문제조차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기분 탓이면 좋으련만.”

어차피 디아나는 황태자비가 될 것이다. 그레이스가 그렇게 유도할 것이고, 황후인 스텔라가 그리 결정할 것이다. 그전까지 에드윈이 선을 넘지만 않으면 된다.

“전하,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시녀장의 말에 멈춰 있던 그레이스의 발이 움직였다.

“그래, 무도회는 이제 시작이지.”

꽤나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그레이스는 마차에 올랐다. 여러 사람의 운명이 걸려 있는 무도회가 곧 시작된다.

***

에드윈은 에스코트의 정석을 그대로 실현했다. 우선 화려한 마차로 저택의 입구까지 도착한 다음 직접 내려서 디아나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대공의 신분을 생각하면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에드윈은 남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듯이 저택에서 나오는 디아나를 눈으로 반겼다.

그러고는 무도회장에서 왈츠를 시작하기 전에 인사하는 것처럼 살짝 팔을 벌려 예를 갖췄다. 누가 봐도 대공으로서가 아닌, 한 명의 영애를 대하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너무 상투적인 말 같지만, 오늘 영애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답군.”

이 또한 에스코트의 역할 중 하나였다. 디아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에드윈의 눈동자엔 진심이 흘러넘쳤다. 푸른 천을 손에 쥔 후로 디아나의 모습을 몇 번 상상하긴 했지만, 상상은 디아나의 실물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디아나는 한 떨기 꽃처럼 청초하면서도 달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드레스, 장신구, 어두워지는 밤까지 모두 디아나를 위해서 꼭 맞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전하께서도 멋지십니다.”

디아나야말로 상투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봐 준다니 고맙군.”

에드윈이 지금을 위해 평소에 전혀 하지도 않던 고민을 얼마나 했을지, 디아나는 알지 못할 것이다. 에드윈은 마차의 문을 열고 디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디아나는 그 손을 살짝 잡고서 마차에 올랐다. 에드윈은 둘 다 착용한 연회용 장갑이 조금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함께 마차에 타는 것은 처음인가?”

마차가 조심스럽게 출발하자, 에드윈이 정적을 지우려 입을 열었다. 그 말이 애꿎은 디아나의 마음을 쿡 찌르는 것 같았다. 디아나는 붉어지려는 뺨에 잠시 몰래 숨을 골랐다.

“네, 그런 것 같네요.”

디아나가 조금만 미소를 머금어도 싱그러움이 꽃처럼 피어났다. 디아나의 모든 것이 성큼 에드윈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는 뵌 적이 없나?”

“네, 없어요.”

에드윈은 알면서도 물었다. 루카스의 말로는 아주 어릴 때 한 번 만난 적이 있다지만, 디아나의 마음에 루카스의 존재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 디아나의 답에는 그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 내심 만족스럽기도 했다.

“오늘 처음 뵙게 되겠군.”

“……네.”

보통의 영애라면 설렐 만한 날이었다. 황실 무도회, 황태자, 모두의 주목을 받을 아름다운 자신의 자태까지. 하지만 지금의 디아나에게선 그 어떤 감정도 찾을 수 없었다. 평소처럼 차분한 디아나의 눈동자엔 설렘보다 수심이 어울렸다.

“그래. 루카스 전하는 사적으로 나와 이종사촌 되신다. 총명하고, 재기발랄하신 분이지.”

“네…….”

에드윈의 입에서 마음과는 다른 말이 나왔다. 디아나의 반응도 썩 시원치는 않았다. 사실 에드윈이 알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제 어머니에게서 들은 황태자비라는 단어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황태자 전하는 제 사람에겐 무척 다정한 분이야. 금발의 미청년이기도 하시고. 아마 영애와 같은 나이로 알고 있는데.”

입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대신 자꾸 반대의 말만 튀어나오게 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디아나는 잠시 입을 닫았다가, 고개를 들어 에드윈을 바라봤다. 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자 에드윈은 그제야 할 말을 잃었다.

“전하께서는 황태자 전하를 위해 절 에스코트해 주시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다. 우린 지인이잖나. 난 그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왜냐면…….”

디아나가 말을 이었다.

“전 황태자 전하께는 관심이 없거든요.”

너무도 직설적인 디아나의 말이 둘뿐인 마차에 울렸다. 에드윈은 그 순간 제 심장 박동 소리를 확연히 느꼈다.

“그리고 황태자비가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

에드윈이 무심결에 반문을 흘렸지만, 푸른 눈동자에 깃든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전하께선 그게 궁금하셨던 것 아닌가요.”

디아나의 시선은 이제 열여덟이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성숙했다. 그 시선은 에드윈의 속내를 이미 꿰뚫고 있었던 거다.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디아나가 얼마나 영명한지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뻔한 소리를 해 대다니, 자신이 허술했다.

“내가 괜한 짓을 했군.”

에드윈이 곧바로 인정했다.

“하지만 영애를 떠보려던 건 아니야. 그저 궁금했을 뿐.”

디아나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여쭤도 될까요?”

“물론이지.”

에드윈의 시선이 이내 차분해져서 디아나를 봤다. 디아나는 처음부터 그 검은 눈동자에서 신뢰를 느꼈다. 그에게는 어떤 부드러운 위압감이 있었다. 루카스의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기운과는 전혀 달랐다. 어쩌면 그 점이 가장 끌렸던 걸지도 모른다.

“그전에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가.”

차분하고 검은 눈동자가 디아나의 다음 말을 끈기 있게 기다렸다.

“다시 한 번 분명히 해 두지만, 저는 황태자비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에드윈은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무척 강경한 태도가 느껴졌다. 의아한 일이다. 공작가의 영애로서 만나 보지도 않은 황태자의 비가 되는 것을 싫어할 이유가 있긴 했던가.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제 생각이 바뀌는 일은 없어요.”

“너무 장담하는 것 아닌가?”

“더 장담할 수도 있습니다.”

싱긋, 디아나가 심각한 분위기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게 묻고 싶은 것은?”

“제가 황태자비 후보라는 것을 알고 계셨죠?”

“……그래.”

“이미 낙점됐다는 것도요.”

디아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에드윈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때에 따라선 아니, 이것이 남에게 알려진다면 굉장히 힐난을 받을 큰 문제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마차엔 단둘뿐이었고 황실까진 아직 긴 길이 남았다.

“모든 걸 아시면서도, 제 에스코트를 자청하신 이유를 알고 싶어요.”

그 책에서 에드윈의 비중은 무척 적었다. 모든 기억을 종합해도 에드윈이 정직하고 호의적인 남자라는 것만 알 수 있었지, 그 속내까진 나오지 않았다. 즉, 디아나가 스스로 알아내야 할 새로운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그의 감정은 알고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전하가 곤란해지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디아나는 정면돌파를 택했다. 의문이 여러 가지일 때는 어떤 추측도 삼가는 게 좋았다. 적어도 그는 정직한 남자라는 구절이 있었다. 디아나는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우선 발표된 것은 없으니 아직 곤란할 일은 없다. 그런 일이 생기면 영애의 명예에도 누가 될 테니, 나도 굳이 청하지 않았을 거야.”

“선대공비 전하는 알고 계셨을 텐데요.”

“그래. 하지만 달리 꾸짖으실 명분은 없었다.”

과연 그럴까. 디아나는 그레이스의 기백을 떠올렸다.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심지어 그 알현을 받고도 그 모든 사정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황태자비 후보에 올렸다. 그 속내가 너무 어둡고 깊어서 도저히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이유라…….”

에드윈이 다시 한 번 디아나의 질문을 상기했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그에게 긴 고민은 필요치 않다는 듯이.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뿐이다.”

정직한 남자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저돌적일 정도로 솔직한 남자였다. 디아나조차 잠시 놀랐을 정도다.

“적어도 뭔가 할 수 있는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어.”

“무슨…….”

“나의 이유다.”

에드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서렸다.

“그리고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군.”

우아하고 귀족적인 말투가 도발적이었다.

“게다가 우리 의견에 일치점이 있는 것 같은데?”

에드윈은 그때와 같은 선택을 했다. 그는 여전히 디아나가 황태자비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책의 큰 흐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단지 그게 이유가 아니길 바랐다. 달콤했던 밀회와 제 입술을 덮쳤던 숨결은 에드윈의 마음 그 자체라고 믿고 싶은 거다.

“그렇군요.”

디아나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흔히 부정하거나 빙빙 돌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 에드윈은 그런 점이 더 좋았다.

“저는 아직 전하의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그저 흐름에 불과한 것일까, 제게 진심을 품은 것일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에드윈은 괜찮다고 하는 것처럼 턱 끝을 살짝 끄덕였다. 특유의 검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감히, 전하의 도움을 청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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