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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53화 (53/184)

53화

과연 제국의 수도에서 정평이 난 헤일리 부인의 솜씨는 남달랐다. 모처럼 카를 공작저에 소녀다운 활기가 찬 날이었다. 응접실엔 온통 거울과 옷을 갈아입기 위한 태피스트리가 쳐졌고, 헤일리 부인의 조수들은 지시에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영애의 눈동자가 워낙 보석같이 아름다워서…… 이 푸른 원단이 빛을 보네요.”

헤일리 부인은 연신 디아나를 보며 감탄사를 쏟아 냈다. 그건 시중을 드는 조수들과 시녀들, 샬롯도 마찬가지였다.

디아나의 눈동자보다 조금 더 짙은 푸른빛의 원단으로 만든 드레스는 레이스 장식 하나하나도 장인이 공을 들여 만든 하나의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화려함이 아닌 디아나 본인이 가진 청초한 아름다움을 잘 살렸다. 이건 헤일리 부인의 안목 덕분이었다.

“제가 만든 옷이 이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처음이에요.”

수도 제일의 살롱을 운영하는 헤일리 부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였다. 디아나는 거울 속 제 모습을 보다가 샬롯이 미리 골라 둔 몇 개의 보석함 앞에 섰다. 긴 고민은 필요치 않았다. 가느다란 백금 줄에 눈물 모양의 푸른빛을 머금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마치 이 옷에 맞춘 듯이, 어쩌면 디아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반짝였다.

“이걸로 할게.”

“네, 아가씨. 완벽한 선택이에요.”

거울 속의 디아나가 싱긋 미소 지었다. 푸른 드레스가 겹겹이 꽃잎처럼 우아한 자태로 디아나를 감싸고 있었다. 청초한 매력과 특유의 기품이 풍기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유품인 목걸이가 더해져 아름다우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응.”

황실의 무도회는 디아나가 처음으로 나서는 큰 무대였다. 어차피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면, 디아나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것은 수줍은 소녀의 모습도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도 아니었다.

과하지 않게 몸의 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덧그려진 드레스, 그리 튀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푸른빛, 달리 눈에 뜨이는 장식이 없음에도 소매와 드레스 끝자락이 움직일 때면 살며시 보이는 섬세한 레이스 장식. 모두 디아나가 원한 것들이었다.

오히려 디아나의 의뢰를 받은 헤일리 부인은 처음에 염려를 했다. 무도회의 의상으로 삼기엔 너무 단순한 디자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영애처럼 아름다운 고객을 만나다니, 이 드레스가 영광이네요.”

“헤일리 부인의 솜씨 덕분이죠.”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거울을 봤다. 꽃같이 아름다운 영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디아나만의 선전포고였다. 한껏 화려한 치장을 하는 것을 거부하고 최소한의 것들로 자신이 가진 기품과 당당함을 보이고 싶었다.

“참, 한 가지…….”

“네, 영애. 말씀하세요.”

“구두의 굽을 좀 높여 줘요.”

헤일리 부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는 에드윈에 비해 초라한 체격의 루카스를 떠올린 것이다. 아무리 높은 신발을 신는대도 에드윈의 곁에선 똑같겠지만, 루카스는 아닐 수도 있었다. 이 또한 디아나 나름의 심술이었다.

주위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디아나는 여전히 황태자비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것도 전혀.

***

무도회의 날이 다가왔다. 그간 트리샤가 몇 번이고 감사 표시를 한다며 찾아왔지만, 디아나는 그때마다 부재중이거나 요양 중이라며 핑계를 대서 돌려보냈다. 일단 그녀의 어머니인 사라 블랑의 신변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에 마음이 조금 편안했다.

“아가씨, 정말 아름다우세요. 무도회장의 주인공이 되실 거예요.”

샬롯의 말은 사실이 될 것이다. 디아나는 말없이 묘한 미소만 지었다. 샬롯은 그런 디아나의 뒤로 다가와서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선대 공작부인을 섬기던 솜씨는 어디로 가지 않아서 머리의 반을 땋은 채 올린 모양이 무척 아름답고 섬세했다.

“마님께서도 이 장식을 아끼셨는데. 지금쯤 하늘에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어머니의 유품인 머리 장식을 꽂으니 디아나의 백금발이 한층 눈부셨다. 디아나가 그 장식에 눈길을 준 것은 평범한 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개의 머리 장식과 다르게 작은 나뭇가지 형태를 한 백금에 열매가 맺힌 듯 작은 다이아몬드가 빛났다.

“몇 시지?”

디아나가 창밖을 응시하며 물었다. 무도회는 통상 밤에 열리고, 입궁하는 시각은 그보다 조금 빨라야 했다.

“곧 대공 전하께서 오실 시간이네요.”

“아, 그랬지.”

평소와 다른 것은 동행이 있다는 점이었다. 디아나가 굳이 시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에드윈이 알아서 오리라는 것을 샬롯이 넌지시 알려 준 셈이다.

“대공 전하께서는 참 자상하세요.”

“그런가?”

“그럼요. 에스코트는 영예인 동시에 모두의 시선을 받는 위치인걸요.”

디아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에드윈도 누군가를 에스코트하는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 대담한 호의를 받아들인 것은 그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사랑이라고 할 만큼 깊은 감정은 아니었지만, 호의와 설렘은 확실했다.

“그래도 전 대공 전하께서 그 역할을 맡아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왜?”

“그야…… 아무래도 카를 공작님은 무도회장에 나설 분이 아닌걸요.”

“그건 그렇지.”

아무리 상상해 보려고 해도 무도회장의 아론은 떠올리기 어려웠다. 간신히 떠올린다고 해도 그 구석에서 책이나 보고 있는 모습 정도였다.

“그렇다고 에스코트 없이 입장하실 수는 없고. 그때, 대공 전하께서 나서 주시다니 참 좋은 일이죠.”

아마 샬롯은 그런 문제로 혼자서 마음을 졸였던 모양이다. 정작 본인인 디아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게다가 대공 전하는 한결같이 평판이 좋은 분이셔요.”

“그래?”

샬롯은 에드윈의 이야기에 반응하는 디아나를 보며 잠시 허튼 생각을 했다.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는 둘의 모습은 샬롯의 눈에 아주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광경으로 보였기에 당연한 상상이었다. 게다가 대공은 지금 제국 수도에서 손꼽히는 신랑감이었다. 그 정도면 디아나의 짝으로 꼭 어울릴 것이다.

“네, 고귀한 신분을 타고나신 것은 물론이고 벌써 의회에 출사하셔서 유능한 모습을 보이신대요. 무엇보다 선 대공 전하를 닮아서 어질고 다정한 분이라고 들었어요.”

디아나는 잠시 에드윈을 떠올렸다. 곧 만나게 될 테지만, 자신이 모르는 에드윈의 모습에도 궁금증이 일었다. 디아나가 아는 에드윈도 좋은 사람이었다. 아니, 디아나는 또 다른 면도 알고 있었다. 과감하고 선명한 그의 흑안이었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아직도 생생했다.

“응, 나도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어.”

드물게 디아나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샬롯은 내심 그것을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아랫것들에게도 무척 너그러우신 분이셔요. 그보다 성품이 좋다는 평판은 없을 정도랍니다.”

“그렇구나.”

그런 에드윈이 지금 디아나를 위해 오고 있었다. 디아나는 지금 그런 남자를 루카스와의 사이에 방패로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영명한 디아나가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이다. 디아나는 그런 제 마음까지 전부 직시해야 했다.

“대공 전하께 감사해야겠네.”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만, 일부는 사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에드윈의 대공이라는 지위와 디아나 자신에게 이성적으로 끌림을 가진 남자라는 것, 두 가지 요소는 루카스와의 접전에서 디아나에게 든든한 방패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현실을 위해서 잠시 자신의 감정을 접어 둘 때였다. 디아나는 그런 제 모습이 싫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적어도 오늘의 무도회에서 황태자비 후보라는 뜨거운 시선 외에 다른 것으로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은 큰 패였다.

디아나는 손거울을 들어서 자신의 모습을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결심을 한 번 더 굳혔다. 에드윈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 되더라도, 절대 루카스의 반려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

오늘따라 유난히 에드윈의 단장 시간이 길었다. 오죽하면 집사장이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들어왔을 정도다.

“……전하?”

집사장은 낯선 주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말을 붙이고 말았다. 그러자 고개를 든 에드윈이 손짓을 했다. 집사장이 다가서자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의 에드윈이 그를 주시했다.

“하프먼. 그대는 나를 어릴 때부터 봐 왔지.”

“예, 전하. 무척 영광스러운 책무입니다.”

에드윈이 한 번 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표정이었다.

“전하, 무슨 문제라도…….”

“내 질문에 솔직히 답해 주게.”

“물론입니다. 하문하십시오.”

에드윈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집사장인 하프먼의 시선도 자연히 에드윈의 등을 따라갔다. 이제 보니, 벽에는 에드윈이 가진 무수한 예복이 주르륵 걸려 있었다. 그 앞을 따라 걷는 그의 옆얼굴엔 수심이라고 할 만한 고민이 어렸다.

“여기까진 어찌 추렸는데.”

“……예.”

커다란 에드윈의 손이 앞쪽에 걸린 예복 세 벌을 가리켰다. 하프먼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얼떨떨했지만, 주인의 말에 거스를 수도 없었다.

“내게 어느 예복이 더 잘 어울리지?”

“예? 아…… 모두, 잘 어울리십니다.”

하프먼은 눈을 끔벅였다. 자신이 알던 에드윈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귀족 중엔 치장에 유난히 신경을 쓰는 이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 대공가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기품과 품위를 생각했다. 지나치게 치장을 하는 것은 오히려 천박한 일로 여기는 가풍이었다. 물론, 거기서 자란 에드윈도 마찬가지였다.

“한 벌만 골라야 해. 그러니 고민하고 있잖나.”

본래 하프먼이 아는 바로는 에드윈이 입을 옷 때문에 고민을 한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하지만 지금 에드윈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것도 표정을 보니 꽤 진심이었다.

“전부 전하를 위해 손수 맞춘 예복이니, 무엇을 고르셔도 잘 어울리실 겁니다.”

그나마 하프먼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건 나도 안다.”

다소 뻔뻔하게 들릴 뻔한 말도 에드윈의 풍모를 보면 바로 수긍하게 된다. 실제로 이 방의 어느 옷을 걸쳐도 옷이 알아서 그에게 어울릴 것이다.

눈에 뜨이는 장신에 흑발, 남자다운 강인한 얼굴선과 대비되는 다정하고 깊은 눈매는 그가 입은 옷이 뭐였는지 떠올리게 할 수도 없을 거다. 에드윈은 그야말로, 체스터 대공가의 살아 있는 걸작이라고 할 만한 남자였다.

“문제는 이것이야.”

에드윈의 커다란 손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들려 있었다. 불쑥 내민 그것은 작은 천 조각이었다. 무척 고급스러운 푸른빛의 원단은 에드윈의 손에 들리자 더욱 작아 보였다.

“이것이…… 왜…….”

“그러니까 나와 이것과 예복이 모두 어울려야 한다.”

하프먼의 머리가 아파졌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왜 이 방에 들어왔는지를 후회하는 중이었다.

“즉, 나와 예복은 모두 어울리니 이 푸른색과 어울리는 것을 찾자는 거다.”

도대체 에드윈이 무슨 경위로 저런 천 조각을 들고 있으며, 그것에 연연하는지 하프먼으로서 알 도리가 없었다. 실은 얼마 전, 선대공비의 무도회 의상을 맞추러 온 헤일리 부인에게 슬쩍 디아나의 정보를 알아냈다는 것은 더욱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저는 그런 것에는 영 무지한 자라서…… 그…… 시녀장에게 물어보심은 어떨까요.”

하프먼은 이 어려운 임무를 아무에게나 떠넘기고 제 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미 물었다.”

그러나 에드윈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었다.

“시녀장에게도, 베스와 릴리에게도, 그렉에게도.”

앞의 인선들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지만, 도대체 정원사인 그렉에게는 왜 의견을 물은 것인지. 하긴, 이미 지금 상황도 하프먼의 이해를 벗어나고 있었다.

“푸른색이니까…… 검은 것보단 하얀 것이 더 돋보이지 않을…… 까요?”

거의 반은 의문이었다. 하프먼도 대공가의 가풍을 따라 매일 같은 빛의 집사 복을 입었다. 그런 그가 예복에 대해서 뭘 안단 말인가.

“역시 그렇지?”

그러나 다행히도 에드윈에게는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다들 의견이 반반이라서 결정적인 한 수가 필요했거든. 과연, 집사장이군.”

이것이 집사장으로서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하프먼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원래의 목적을 떠올렸다.

“전하, 곧 나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 하프먼은 여러 가지 신기한 모습을 보았다. 마지막에 흠칫 놀라며 시계를 보는 에드윈의 옆얼굴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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