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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52화 (52/184)

52화

제롬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건 제가 드리는 결과가 아니라 상상력을 덧붙인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뭐라도 좋아요. 듣겠어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디아나의 표정엔 놀라움이나 의아함이 전혀 없었다. 마치 이런 결과를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다.

“제국의 교황청은 이단에 있어서 무척 극단적인 교리를 수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 심문은 역사에 묻혀서 사라진 것으로 여겨지죠.”

“그러나 불과 몇십 년 전에도 일어났군요. 바로 그 동쪽 땅에서.”

“그렇습니다. 더 자세한 자료를 열람할 권한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딱 한 번 언급된 단어가 무척 마음에 걸리더군요. ……‘이단은 붉은색을 하고 있다’라고.”

마녀의 힘은 실존했다. 트리샤가 직접 고백했다. 그것도 디아나의 죽음이 확실시된 시점에서 오만하고 신랄하게 말했다. 붉은 마녀, 어떻게 그 단어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

“만일 블랑 남작가에 수상한 일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 붉은색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제롬은 드물게 디아나의 의견을 묻고 있었다.

“질문은 경의 역할이 아닐 텐데요.”

디아나가 선을 그었다.

“하지만 내게도 어떤 의심이 있다고 해 두죠. 그것을 남에게 설명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요. 나는 내 의심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요.”

아무리 제롬이라도 디아나의 모든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다행히 제롬은 유능한 사람이었다. 의뢰인의 이 정도 설명이면 만족하는, 그리고 나머지 진실은 제 손으로 파헤치고 싶어 하는 호기심의 주인공이니 더욱.

“제가 만났던 사제에게 혹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냐고 묻자 안색이 흐려졌습니다. 부정하지도 않았지요. 또 한 번 더 교황청의 서고에 숨어들었을 때…… 아, 이건 못 들으신 걸로.”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의회가 인정한 변호인이라도 모든 서류에 열람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상대가 교황청이라면 더 까다로웠다.

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디아나가 판단한 제롬은 자신의 호기심과 의뢰를 위해선 남의 서고에 숨어드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인물이었다.

“동쪽 땅엔 붉은 머리카락을 한 이가 드물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엔 구휼의 대상이라 여긴 듯한데, 교황청의 교리가 아닌 그들만의 토착 신을 섬긴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규정된 것 같습니다. ……즉, 사라 블랑은 동쪽에서 왔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동쪽에서만 쓰는 약재의 가공법, 제국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그녀의 출생, 그리고 그녀처럼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많은 동쪽 이단의 땅. 필요한 퍼즐 조각은 충분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은데.”

“벌써 제 조수 중 하나를 동쪽 땅으로 파견했습니다.”

역시, 제롬의 일 처리는 빨랐다.

“동쪽에서 이주해 결혼하고 자식을 낳은 것까지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만.”

“그래도 자세히 알고 싶어요.”

“아니, 그것엔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제롬이 잠시 적당한 단어를 찾았다.

“제국의 교황청은 이단 심문에 있어서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입니다. 실제로 거의 사라졌다고 봐야 할 과거의 유물 수준으로 알려져 있죠.”

“그렇죠.”

디아나가 아는 것도 같았다. 제국에서 교황청은 그저 종교로 모두를 통합하는 구심점이자 자비의 원천일 뿐, 폭정이나 종교재판으로 세상을 휘두르는 곳이 아니었다. 아주 먼 과거엔 그런 일이 성행했다고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모든 제국인은 교황청을 평화와 자비의 상징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교황청에서 불과 수십 년 전에 이단 심문을 했다는 것은…… 그 상대가 무척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트리샤 하나로도 충분히 위험한데, 그들의 일족이 있다면 교황청이 나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디아나는 그들을 쫓는 것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적이라는 것은 모두 위험한 존재죠.”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정면을 주시했다. 트리샤에게 지지 않으려면, 트리샤를 알아야 했다. 설령 아직 트리샤 본인이 모르는 일이라고 해도, 그러므로 더욱 먼저 알아야만 한다.

“영애는 역시 영명하십니다.”

입가의 미소와는 달리 제롬의 눈빛이 퍽 진지했다. 이미 발을 들인 이상, 제롬은 이 사건에서 손을 뗄 수 없을 것이다. 그리도 찾아 헤매던 호기심의 원천이 바로 제롬의 눈앞에 있었다.

“반드시 그 밑바닥까지 밝혀낼 겁니다.”

“경을 믿어요.”

둘의 이해관계는 언제나 그렇듯이 일치했다.

“한 가지…… 내가 사라 블랑의 신변을 보호하려고 해요.”

그러나 다음 말은 제롬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째서인지 여쭤도 됩니까.”

“아까 말했듯이, 내게는 어떤 확신이 있어요. 사실을 전부 밝혀내서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 전까진 왠지 사라 블랑의 신변을 확실히 해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전의 삶에서 트리샤의 부모는 화마에 숨졌다. 그러나 곧 그것은 살인사건으로 번졌다. 밖에서 문을 열지 못하도록 막아 둔 나무와 끝까지 문에 칼자국을 내면서 탈출하려고 했던 블랑 남작의 시신이 증명한 것이다. 그것은 트리샤의 소행일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것은 트리샤뿐이었다.

“아직 의문이 있어요.”

굳이 부모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궁에 들어가게 된 트리샤에게 부모는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고 걸림돌이 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사건을 벌였다. 그것은 트리샤에겐 어떤 이유가 있었다는 방증이 될지도 모른다.

“직감은 중요한 법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남의 시선을 끄는 건 좋지 않습니다만.”

“카를가에서 후원하는 요양원이 있어요.”

“그거 아주 자연스러운 방법이군요.”

제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수를 더 지불할 테니, 제롬 경이 믿는 사람을 그쪽에 붙여 줘요. 물론 나도 공작저의 인원을 보내겠지만, 서로 감시할 수 있는 영역은 다를 테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씩, 미소를 지은 제롬이 디아나의 빛나는 눈동자를 봤다.

“영애께서도 탐정의 재능이 있으시군요.”

“경의 농담도 서비스인가요? 돈을 지불할 정도로 재미있진 않네요.”

싱긋, 디아나가 웃었다. 제롬은 그제야 자신이 드물게 한 방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블랑 남작가에 디아나의 제안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매력적이었다. 당장 트리샤는 아픈 어머니를 돌보는 일에서 벗어나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고, 블랑 남작은 그 지겨운 기침 소리에서 벗어나게 되는 일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 좋은 곳에서 보살핌을 받으시면 금방 나으실 거예요.”

“다 네 덕분이다. 내가 그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지…… 그런 곳은 귀족들만 가는 아주 비싼 곳이라고 들었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디아나가 전부 맡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럼 어머니가 쾌차하실 거라고요.”

“네가…… 디아나 영애의 좋은 친구가 되어 준 보답을 염치도 없이 내가 받는구나.”

친절하게도 카를 공작가에서 보내온 마차 앞에서 트리샤는 사라의 손을 꼭 쥐었다. 여윈 사라의 손마디가 거칠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사실 우리 집은 병이 낫기엔 힘든 환경이잖아요…… 그곳에 가시면 정말 다 나아서 오실 거예요.”

늘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습기 찬 골방에서 누워 있던 사라는 오랜만에 해를 보았다. 트리샤 역시 오랜만에 밝은 곳에 선 어머니를 봤다. 트리샤의 생각보다 더욱 마르고 창백한 사라의 모습은 마음을 아프게 했다.

“트리샤, 가기 전에 당부할 게 있다.”

“저도 자주 찾아뵐 텐데요, 뭘.”

“아니…… 중요한 이야기야.”

사라는 오랜만에 기운을 내어 딸의 붉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자신을 닮은,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는 혈연의 증거였다.

“내가 그때 건네준 책 있잖니. 남들에겐 반드시 비밀로 해야 해. 알겠지?”

“네. 몇 번이나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없어도 공부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 그 책을 다 외워서 베끼어 쓸 수 있어야 해.”

실제로 그 비서는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후계자가 책을 외울 수 있게 되면 비서는 불태워진다. 그리고 다시 전달할 후계가 생기면 그때 다시 적는 것이다. 지금 트리샤가 외우는 책은 사라가 직접 손으로 쓴 것이었다.

“이해가 안 가는 내용이 나와도,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무조건 받아들이고 외우거라. 내 말 알아들었니?”

그것은 약초학을 표방한 금단의 비서였다. 당연히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과 어려운 단어가 많았다. 하지만 그것을 외운 후에 힘을 갖게 되면 마치 번역이 되는 것처럼 뒤늦게 모든 것을 깨우칠 수 있었다. 그제야 어엿한 붉은 마녀 일족의 한 명이 되는 것이다.

“네, 항상 말씀하시잖아요.”

트리샤는 이 모든 게 잔소리라 생각하겠지만, 사라로선 지금 어린 트리샤에게 그런 것까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래…… 니콜라를 잘 보살피고. 아무래도 또래보다 부족한 아이잖니. 네 아버지도 잘 살펴 드려야 해.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네 아버지는 어릴 때 널 참 예뻐하셨어.”

그럴 리가. 아니, 그랬다고 해도 지금의 아버지는 학대를 가하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트리샤. 네 아버지도 원해서 그렇게 되신 건 아니야. 네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던 거지 그러니, 네가 이해해 드리렴.”

“알았어요. 이제 가세요. 가서 어서 나으셔야죠.”

사라가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려야 했던 제 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목숨은 남아 있었고, 시간도 있었다. 디아나가 가져다준 행운으로 사라의 건강이 나아진다면 그땐 트리샤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많은 것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래.”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떤 핏줄을 이었는지.

교황청의 박해로 거의 명맥이 끊긴 힘이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

붉은 마녀가 지닌 힘과 그 대가가 무엇인지. 또한,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

“고맙다, 내 딸.”

언젠가는 트리샤도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사라는 주어진 마력에 미치거나 정신을 지배당한 동족과 같은 길을 가지 않도록, 바른길로 이끌 의무가 있었다.

“트리샤 넌 잘 해낼 거야.”

마차에 오르던 사라가 다정한 말을 건넸다. 트리샤는 어린 나이부터 궂은일을 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았고 대견하게도 어린 동생 니콜라를 마치 엄마처럼 돌봤다. 난폭한 아버지를 적당히 대하는 법도 알았고 꽤 빠른 속도로 주어진 책과 공부를 마치곤 했다. 그 와중에도 그리 고귀한 영애를 친구로 둬서 제 어미를 돌보는 아이였다.

그러니 정말 깨달아야 할 때가 오면 다른 일족들처럼 불행한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의 말에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창문 너머로 트리샤가 손을 흔들었다. 사라는 자신의 딸을 믿고 있었다. 그 또한, 불행한 선택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하…….”

트리샤는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하나 해방인가.”

사라는 몰랐다. 트리샤의 어린 나이에 지워진 짐이 얼마나 가혹했던지를. 기억은 본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법이었다. 트리샤도 한때는 불평하고 반항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것을 무시한 것은 그녀의 부모였다.

“역시, 날 위해 주는 건 디아나뿐이었어.”

트리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사라는 자신의 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트리샤의 순종은 체념에서 나온 결과였다는 것도, 이미 가족에 대한 애정 따윈 한 톨도 없다는 것도, 이젠 다시 딸을 가르칠 기회가 없다는 것도.

“오늘부턴 지겨운 기침 소리에서 해방이네.”

사라는 자신의 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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