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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51화 (51/184)

51화

디아나는 샬롯에게 지시해서 꽤 넉넉한 액수의 은화와 여러 생필품을 챙겨 줬다. 그뿐만이 아니라 짐을 지고 가기 어려울 것이라며 공작가의 마차까지 내어 줬다.

트리샤는 오늘의 행운과 디아나의 변하지 않은 우정을 떠올리며 디아나가 건넸던 손수건을 소중하게 가슴에 품은 채 기쁜 소식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아가씨가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샬롯이 의아하게 물었다. 분명 트리샤 블랑을 저택에 들이지 말라고 했을 정도였다.

“맞아.”

디아나는 산뜻하게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저녁 시간이었다.

“이건 그냥, 내 예감을 시험하는 거야.”

모를 말을 하는 디아나를 보면서 샬롯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미 어엿하게 자라난 디아나의 말이니 전부 옳을 것이다.

직접 디아나를 길러 낸 샬롯은 디아나의 영명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게다가 얼마 전, 선대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라 말했던 디아나에게선 선대 못지않은 위엄과 기품이 있었다.

“제롬 경에게서 소식은?”

“아, 네…… 내일 아침에 공작저에 오신다고 했어요.”

“그래? 마침 잘됐네.”

샬롯의 어린 주인은 벌써 여러 일을 처리하는 데 능숙했다. 그에 따라 저택에도 자연스러운 하루의 규칙이 생겼다.

디아나는 일어나면 먼저 저택의 변화와 새로운 소식을 찾았고, 오전 중에 그에 대한 해결책이나 진전할 만한 일을 처리했다. 저녁에는 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거나 내일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미리 정하기도 했다. 마치 선대와 꼭 같은 모습에 샬롯은 내심 어찌나 마음이 뭉클했던지 모른다.

“그보다 아가씨, 곧 있을 황실 무도회 준비는 어떻게 할까요.”

“아…… 그게 있었지.”

또 하나, 골치 아픈 일이 남아 있었다.

“네, 원래는 카를 공작부인께서 주관하시는 게 경우에 맞긴 하지만…….”

“필요 없어.”

과연, 샬롯이 머뭇거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 유산 분쟁으로 인해서 실비아는 완전히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심지어 실비아가 대문 앞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을 모른 체했던 디아나다. 간신히 만나 줬을 때 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 실비아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둘의 관계는 이미 파탄이었다.

“어차피 나도 이제 성인인데, 이제부터는 내가 해 나가는 게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착잡한 샬롯의 표정을 읽었는지 디아나가 일부러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릴 때는 그렇게나 작고 병약한 아이였는데, 언제 이렇게 자라서 남의 마음을 배려하게 되었는지 샬롯은 이럴 때마다 감동이 일었다.

“그럼, 헤일리 부인을 부를까요?”

헤일리 부인의 살롱은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부인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의상실이었다. 귀족 사회의 연회는 이렇듯, 준비하는 과정부터가 계급별로 나뉘었다.

“그게 좋겠어. 보석은…… 어머니의 유품 중에서 고를래.”

“네, 작고하신 마님의 보석은 제국 어디에 내놔도 부족하지 않죠.”

“응, 너무 많아서 고르기 힘들다는 점이 있지만.”

과거 선친의 집무실이었던 방과 옆방을 터서 넓게 만든 곳엔 부모님이 남겨 주신 유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고귀한 혈통을 증명하듯, 디아나의 어머니가 남긴 컬렉션은 어지간한 황실의 것에도 뒤지지 않았다.

“아마 무도회장에선 아가씨만 보일 거예요.”

“그럴 리가.”

담백하게 답했지만, 아마 샬롯의 추측은 사실일 것이다. 그동안 사교계에 얼굴을 내민 적 없는 카를가의 영애인 데다 최근 소문이 무성한 카를가의 유산 분쟁의 주인공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이기도 했다. 이번 무도회 자체가 디아나의 사교계 데뷔를 위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무도회, 정확히 언제였더라?”

“이제 일주일 남았어요.”

디아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와의 필연적인 첫 만남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타고난 운명과 인연이었다. 디아나로 살아가는 이상, 트리샤는 언젠가 디아나를 위협하고 루카스와는 혼담이 오간다. 질기고 끔찍한 셋의 인연이 곧,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여전히 에드윈의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만이 디아나의 위안이었다.

***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친 디아나가 잠을 깨기 위해서 차를 마셨다. 본래 아침잠이 많은 것은 타고난 건지 아무리 노력해도 매번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에 한계가 있으니 가능하면 하루를 온전히 쓰고 싶었다.

“샬롯, 차 한 잔만 더 줘. 정신이 번쩍 드는 거로.”

“아가씨, 그러게 너무 일찍 일어나신다니까요.”

귀족 여인들은 대부분 늦게 일어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일찍 눈이 떠져도 괜히 뒤척이거나 한 번 더 눈을 붙여서라도 늦은 오전에 마지못해 잠에서 깨는 척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예법에도 맞지 않아요.”

그러면 시녀들이 달려와 아침 인사를 건네고, 침대와 창문에 내려진 커튼을 걷는다. 그 후, 시중을 받아 물수건으로 몸을 닦고 가져온 세숫물에 세수를 마치면 은쟁반에 아침 식사가 담겨 왔다. 즉, 아침 식사까지는 침대에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고위 귀족의 일상이었다.

“당분간은 바쁘니까 어쩔 수 없지.”

귀족들에겐 소모적인 예법이 많았다. 하지만 아침을 보내는 방법만은 디아나의 마음에 들었다. 눈을 뜨고 나서 두어 시간은 지나야 정신이 드는 체질인 디아나로선 더욱 그럴 수밖에. 하지만 지금은 그 달콤한 시간을 포기할 만큼 중요한 시기였다.

“아가씨, 제롬 경이 도착했습니다.”

그레이가 중후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마중을 부탁해. 난 집무실로 가지.”

“예.”

잠시 후, 집무실에 앉은 디아나의 시야에 제롬이 들어왔다. 금빛 눈동자엔 언제나처럼 활기와 호기심이 가득 넘쳤다. 지난번, 자신이 디아나에게 팔았던 정보가 유용하게 쓰였는지 알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제롬 경. 지난번의 그 정보는 잘 썼어요.”

“……역시, 영애께선 영명하시군요.”

제롬은 하나의 의문이 풀리자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싱긋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카를 공작님께서 방계로 상속됐던 공작령을 다시 직계로 되돌릴 수 있는지에 대해 정식으로 청원을 내셨습니다. 과거 몇 번 선례가 있었으니 어렵진 않을 거라고 예상됩니다. 사실, 영애라는 것이…… 이런, 실례.”

“아니, 사실인걸요.”

“영식이었다면 더 수월했을 테지만, 아무래도 반대파가 있을 겁니다. 물론 그 또한.”

“선례가 있죠.”

싱긋, 디아나가 웃었다. 디아나는 제롬이 만난 사람 중에서도 유난히 눈빛이 맑고, 영명한 사람이었다. 두 가지를 동시에 갖는 것은 제롬의 경험상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예, 시일이 좀 걸릴지는 모르겠으나 영애의 뜻대로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소식이네요.”

눈빛이 맑은 사람은 세속적인 것에 관심이 없기 마련이고, 영명한 사람은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아무리 고귀한 혈통이라고 하지만, 고작 열여덟의 영애가 이루기는 힘든 경지였다. 제롬으로선 그런 디아나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소득인 셈이다.

“그럼, 트리샤 블랑으로 돌아가 볼까요.”

제롬은 트리샤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미묘하게 흐려지는 디아나의 눈동자와 굳어지는 입매를 봤다. 물론, 제롬의 관찰력이 몹시 뛰어나기 때문에 아는 것으로,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변화였다. 최근 제롬의 호기심을 이토록 자극하는 사건은 또 없었다.

“본인 자체에 대한 보고는 그대로입니다. 다만, 범위를 좀 넓히라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 따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한 시선이 제롬을 주시했다. 덩달아 말을 잇는 제롬도 신중하게 될 정도로 깊은 시선이었다.

“지금의 블랑 남작가는 고작 3대째의 가문이더군요. 영지는 제국의 끝, 거의 의미가 없을 정도의 규모와 실속이라 주목할 게 못 됩니다. 본래는 지방에서 근근이 먹고살던 귀족인 것 같은데, 파산하는 바람에 작위와 영지를 팔게 되었고…….”

“그걸 사들인 게 지금 블랑가의 3대 전 가주라는 건가?”

“네, 보잘것없는 영지에선 가끔 일어나는 일이죠. 당대엔 장사를 크게 해서 꽤 부유했던 모양인데 후손들이 족족 술과 도박에 빠지는 바람에 이 지경까지 왔다고 합니다.”

새로운 사실이긴 했지만, 디아나에겐 별로 흥미가 가지 않는 결과였다. 지금의 블랑가가 평민 출신으로 작위를 사들였다는 것은 호사가들에게 입방아가 될 수는 있으나 디아나에겐 아니었다.

“트리샤 블랑의 모친인 사라 블랑은 아예 평민 출신입니다.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녀 모두가 붉은 머리카락에 적안을 갖고 있다는 거죠. 제국을 떠나 대륙 자체에서 드문 일입니다만.”

제롬은 늘 본론을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런데 오늘은 자꾸 화제가 빙빙 돌고 있었다.

“제롬 경.”

“예?”

“난 제롬 경의 조사 능력과 판단력을 믿어요. 그러니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부연 설명은 생략하는 게 어떨까요?”

디아나의 차분한 권유에 제롬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칭 명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간파당해선 안 되겠군요.”

제롬의 농담은 길지 않았다.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다음 이야기를 묻고 있었다. 그 시선을 보면 누구라도 이끌리듯이 대답을 할 것 같았다.

“사라 블랑에 대한 조사 결과는…… 없습니다. 그게 결정적인 결과이자 단서입니다.”

디아나가 의아한 시선으로 반문을 대신했다. 조사 결과가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왜 그것이 단서란 말인가.

“제가 여태 조사했던 사람 중에서 이토록 흔적을 찾기 어려운 인물은 처음이었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연결고리라는 게 있죠. 그런데 사라 블랑은 그게 없습니다. 그저 어느 날 블랑 남작부인이 되었고 아이들을 낳았다는 것뿐이죠.”

“그게 전부라면, 제롬 경이 여기 오지 않았을 텐데요.”

후, 제롬이 짧은 한숨을 뱉었다. 역시 디아나를 상대하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말씀드릴 내용은 조사 결과가 아닙니다.”

디아나는 편견을 버리고 틀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했다. 즉, 어쩌면 처음부터 이런 전개를 예상한 것 같았다. 제롬은 그 경위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물을 때가 아니었다.

“제 본업은 제국의 의회가 인정한 변호인입니다만, 저는 자신을 탐정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추리를 해 봤습니다. 실마리를 찾기 어려웠기에 상상력도 더해 봤죠.”

“그래서요?”

“현재 트리샤 블랑이 약초를 내다 파는 약재상에게 물은 결과, 사라 블랑과 오래도록 거래를 했더군요. 약재상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파는 약재들은 품질도 뛰어나지만, 제국엔 없는 특수한 방식으로 가공된 것들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가공법은 비밀이고요.”

제국에선 약재상도 허가가 필요한 직업이었다. 그들은 대개 평민이었지만, 어느 정도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전문적인 직업 아카데미를 수료했다. 그런 제국의 수도에서 약재상을 하는 이가 모르는 가공법이라.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 디아나에겐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제가 필요도 없는 약재를 마차 두 대만큼 샀더니 한 가지 추측을 말해 줬습니다. 제국의 동쪽 끝으로 가면 그런 식으로 만든 약재를 살 수 있다는 소문을요.”

“동쪽 끝…… 그곳은 거의 주민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국의 동쪽은 숲이 우거지고 산세가 험한 곳이었다. 원래 그곳에 거주하던 소수의 주민만이 명맥을 이어 갈 뿐, 실질적으로는 제국으로 치기 모호한 땅이 동쪽이다.

“다만, 그곳에 다녀온 사람은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교황청의 사제단은 의무적으로 소외 지역에서 봉사하고 오는 것이 수행의 하나거든요.”

제롬의 정보망은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 건지, 디아나는 내심 놀랐다.

“동쪽은 여전히 척박하고 인구가 아주 적다고 합니다. 그 땅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극히 꺼리는 눈치였어요. ……호기심이 들었던 터라, 교황청의 기록을 열람했습니다. 아, 물론 저는 제국의 적법한 변호인이니까요.”

“뭔가, 발견했나요?”

“네. 동쪽 땅에서는 불과 몇십 년 전에 이단 심문이 이뤄졌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고, 열람할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무니 비밀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디아나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붉은 마녀라는 트리샤의 마지막 말이 느릿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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