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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50화 (50/184)

50화

에드윈이 떠난 후, 디아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젊은 대공은 디아나의 예상보다 훨씬 과감했다. 물론 기억 속의 에드윈도 그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 빚어 준 절묘한 상황 덕분이었다. 지금의 에드윈은 스스로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때도, 과감했지…….”

디아나는 혼자만의 기억을 들췄다. 그날, 마차 사고 때문에 생긴 접촉은 지금까지도 생생했다. 단둘의 밀회에서 일어났던 농밀한 입맞춤까지…… 모든 기억이 생생했다. 디아나는 그 접촉이 싫지 않았다.

에드윈의 감정이 그저 지나는 이끌림인지, 그 이상의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 새카만 눈동자는 묘한 매력으로 디아나를 이끌리게 했다.

“아가씨, 대공 전하의 마차가 대문을 나섰어요.”

“그래.”

후, 짧은 숨을 내쉰 디아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내키지 않는 골칫거리를 처리할 때였다.

“트리샤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어요.”

가능하면 얼굴을 마주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트리샤는 그대로 방치하기엔 너무 위험한 존재였다. 디아나가 여태 긴 생각 끝에 내린 결론에 따르면 트리샤 역시 언젠가는 원작의 기억을 깨닫는 인물이었다. 그 과정과 정확한 계기를 모른다는 것은 디아나에게 큰 불안이었다.

“피곤하시면, 그냥 돌려보내시죠.”

샬롯의 권유가 달콤하게 들렸지만, 디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만나려고 했어.”

제롬의 조사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하루도 낭비해선 안 된다. 트리샤에게 한 발짝이라도 뒤처진다면 또 같은 불행을 겪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트리샤는 어디에 있지?”

“복도 끝의 가장 작은 응접실에요.”

디아나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계속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답니다.”

“……잘해 줬어.”

과연 샬롯은 디아나의 마음을 잘 알았다. 모든 내막은 몰라도 디아나가 트리샤를 경계하는 것은 사실이다. 샬롯은 혹여나 트리샤가 디아나와 에드윈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할까, 내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차를 새로 내올까요?”

“아니.”

차를 나눌 만큼 긴 대화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디아나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어 복도 끝의 작은 응접실에 도착했다. 잠깐 숨을 고른 디아나는 등을 곧게 폈다. 트리샤에게 보다 성숙하고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감히 친구 따위가 아니라 트리샤가 어찌 적수로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심어 주고 싶었다.

“트리샤.”

디아나는 응접실로 들어서며 조용히 트리샤의 이름을 불렀다.

“디아나! 정말 오랜만이야. 대공 전하와는 말씀 잘 나눴어?”

트리샤는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디아나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열여덟의 트리샤는 저런 얼굴이었던가. 디아나는 잠시 푸른 눈동자로 트리샤를 천천히 응시했다.

“실은, 오늘 약재상에 심부름을 갔다가 오는 길에 공작저를 지나게 됐거든. 그런데 우연히 대공 전하의 마차와 부딪칠 뻔해서…….”

초대받지 못한 주제에 공작저에 찾아온 변명을 하듯 트리샤가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디아나는 그것을 한 귀로 흘리며 먼저 자리에 앉았다.

우연.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런 우연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공작저 앞에서 대공의 마차와 부딪치다니, 우연치고도 참 절묘했다.

어쩌면 이런 것은 우연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트리샤는 그냥 공작저를 지나간 것이 아니라 매일, 기회만 된다면 한참을 서성였을 거고 에드윈은 먼저 디아나를 방문할 의지가 있었으니.

“안 그래도 조만간 널 만나려고 했어.”

그 말에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이며 뺨에 생기가 돌았다.

“정말? 디아나, 나는…… 네가 날 잊어버린 줄 알고. 아니, 물론 당연히 네가 그럴 친구는 아니라고 믿었어. 그동안 많이 바빴던 거지?”

디아나는 차분한 눈으로 트리샤를 봤다. 트리샤는 디아나의 짧은 침묵도 참지 못하고 잡일에 닳아 버린 손을 한시도 가만두지 못하고 옷자락을 쥐었다가, 의자를 만졌다가 부산스러웠다.

“그래, 바빴어.”

과연, 저 안에 있는 것은 열여덟의 트리샤일까. 디아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트리샤를 관찰하고 있었다. 확실히 지금 트리샤의 모습이나 행동은 열여덟 소녀의 것이었다. 그러나 기억을 되찾았던 트리샤도 마찬가지였다. 남들 앞에선 여느 소녀처럼, 그러면서도 영악하게 자신의 것을 취하고 디아나를 독살한 것이 바로 트리샤다.

“그동안 잘 지냈어?”

꽤 무성의한 질문이었지만, 이것조차 디아나에겐 큰 노력이 필요했다. 당장, 극독으로 죽어 가던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었던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를 쳐다보는 것은 아무리 회귀했다고 해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으응, 나야 늘 그렇지…… 그보다, 디아나 오늘 약재상에 갔다가 관청 근처에서 소문을 들었는데. 어려운 말이라서 다는 모르겠지만, 네가 유산 분쟁에 휩싸였다는 거 정말이야?”

“응.”

여전히 트리샤는 남의 일, 아니 디아나의 일에 지나친 관심을 가졌다. 지난번엔 그 사실을 너무 얕잡아 봤다. 그저 그 또래의 질투나 동경일 거라 치부한 것이 디아나의 패인이기도 했다.

“카를 공작가의 일이야.”

디아나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트리샤는 조금 주춤하는 것처럼 괜히 제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 그렇지. 나는 그냥 디아나 네가 걱정돼서……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붉은 눈동자는 티가 날 정도로 디아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디아나는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저 안에 기억을 깨달은 트리샤가 있었다면 그 자존심에 이런 모습까지 연기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넌 어떻게 지냈어?”

재차 디아나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야 뭐…… 똑같지. 니콜라가 아직 어려서 돌봐 줘야 하고,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약재상에 재료를 파는 일도 내가 많이 돕고 있어. 또, 어머니가 시키는 공부까지…….”

“공부?”

왠지 트리샤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 같았다. 할 일이 산더미 같을 텐데, 게다가 트리샤의 부모를 생각하면 과연 제대로 된 교육을 할까 싶은 것이다.

“앗, 아니야. 그냥…… 약초에 대해서만.”

“그렇구나.”

트리샤가 약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결국, 그렇게 배워서 극독을 만들어 디아나를 살해했다. 그것도 교묘하게 의심을 피하려고 먹이는 것이 아니라 피부로 흡수되도록 만들었고, 고통에 온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은데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는 상태로 몰아넣었다.

“디아나, 안색이…… 혹시 아직도 아픈 거야?”

“아니, 좀 피곤해서.”

“그렇구나……. 넌 어릴 때 자주 아팠잖아. 그때 널 간호하면서 재밌는 이야기 많이 했었는데.”

붉은 눈동자에 그리움이 서렸다. 아픈 디아나를 돌보던 시절은 트리샤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디아나는 자신을 필요로 했고, 공작저에서 보수를 지급했기에 아버지도 트리샤를 때리지 않았다.

디아나는 중병까진 아니었기에 주로 방 안에서 동화책을 읽거나 인형 놀이를 하곤 했다. 유일하게 트리샤가 영애로 사는 삶을 누려 본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며? 그럼, 네가 간호하느라 바쁘겠네.”

디아나의 차분한 목소리가 트리샤를 현실로 되돌렸다.

“으응, 아무래도 니콜라까지 함께 돌봐야 하니까.”

“너무 힘들지 않아?”

애써 억지 미소를 띤 디아나가 묻자 트리샤는 울컥, 마음에서 뭔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고된 나날이었다. 비록 예전처럼 가깝진 않았지만, 그래도 디아나는 유일한 친구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자 툭, 무방비한 눈물이 트리샤의 뺨을 타고 흘렀다.

“……미안, 나도 모르게.”

“괜찮아. 아프신 어머니와 어린 동생, 게다가 집안일까지…… 많이 힘들었지.”

아무도 트리샤에게 지금의 삶이 힘들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손에 박인 굳은살처럼 마음에도 굳은살이 박이고 있었다. 트리샤는 자신이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병든 어머니나 아무것도 모르는 니콜라보다 강해야 했다. 그래야 살 수가 있었다.

“응…… 사실 너무 힘들었어……. 하지만 다들 내게 더 바라기만 하고,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니콜라는 아직 철이 없고 장난만 심하지, 어머니 기침 소리는 밤새 울리지.”

투둑, 몇 방울의 눈물이 더 흘렀다. 디아나는 잠자코 그 광경을 보다가 손수건을 건넸다. 정말 친구였다면 제 손으로 그 눈물을 닦아 줬을 테지만, 이미 트리샤와 선을 그은 후였다.

“아버지도…… 실은 그대로셔. 아직 술집에 외상값도 못 갚아서.”

예전의 디아나였다면 이 모습을 동정했을 수도 있다. 아니, 사실 지금의 트리샤는 아무런 죄도 없는 불쌍한 소녀가 맞다. 단지 디아나에겐 그녀를 증오할 이유가 있었을 뿐.

“미안, 이런 구질구질한 얘기 하려던 게 아닌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은 트리샤가 일부러 미소를 지었다. 단지 자신의 고된 상황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줄은 몰랐다.

트리샤는 그걸 우정이라고 생각했다. 디아나는 지체 높은 공작가의 영애이기 때문에 이제 체면을 차려야 할 때가 온 것이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친구와의 우정은 잊지 않아 줬다.

“괜찮아. 사실, 네가 관청가에서 들었던 것처럼 내가 요즘 아주 조심스러운 상황이라서.”

“응, 당연히 이해하지.”

트리샤는 디아나의 체취가 묻어 있는 소중한 손수건을 꾹 쥔 채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널 도울 방법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디아나…….”

언제나 속이는 것은 트리샤였다. 연기에 능통한 것도, 그러면서 제 목적과 실속을 채우는 것도 항상 트리샤였다.

“실은 이번 일로 카를가에서 후원하던 수도원을 내가 맡게 됐어.”

하지만 디아나도 속일 수 있다.

“그곳은 신에 귀의한 수도자들이 병에 걸린 귀족들의 요양을 위해 힘쓰는 곳이야.”

“아, 그렇지만 우린 그런 곳에 갈 돈이…….”

“내가 후원하는 곳이라고 했잖아.”

싱긋, 디아나가 웃었다. 기만과 술수는 트리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디아나는 비록 트리샤처럼 마녀가 될 수는 없더라도 똑같이 속일 수는 있었다.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디아나는 영명하기로 유명한 영애였다. 하고자 했다면 트리샤 이상으로 잘 해낼 수 있는 것은 뻔했다. 그러지 않았던 것은 디아나에게 그럴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 트리샤.”

하지만 이제 디아나는 물러서지 않는다. 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승부를 걸어오기 전에 먼저 출사표를 던질 거다. 그 또한 여태 트리샤만이 누려 왔던 것이니 이제는 디아나의 차례였다.

“네 어머니도 그곳에서 요양하시면 틀림없이 쾌차하실 거야.”

“디아나, 그건…….”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감격에 찼다. 짧은 순간 트리샤는 어머니의 기침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생활을 상상하고 말았다.

“괜찮아, 모든 건 내가 준비할게.”

이 시대의 귀족을 상대로 한 요양 시설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물론 아주 지체가 높은 신분은 자신의 저택에서 요양했으나, 그 정도에 미치지 못하는 중위 귀족들의 경우엔 수준 높은 수도원에서 요양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저어, 디아나…… 너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사실 평민 출신이셔.”

“그래도 네 어머니신걸. 당연히 내가 도와야 할 분이야.”

긴 터널 같은 트리샤의 삶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옛날에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트리샤의 유일한 구원은 디아나의 빛에서 나왔다.

“난 너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항상 받기만 하고…… 이렇게 과분한 제안까지…….”

디아나는 이 순간 거의 확신했다. 이것은 아직 원작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 소녀 트리샤라고.

“그런 생각 하지 마, 트리샤.”

싱긋, 디아나가 미소 지었다.

“우린 친구잖아.”

이번에는 디아나가 그 말을 했다. 그것은 소리 없는 전쟁의 선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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