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49화 (49/184)

49화

샬롯의 기별을 듣고 응접실에 도착한 디아나는 가장 황당한 풍경을 보고 멈칫했다. 미리 듣고 알았지만, 막상 눈으로 보는 것이 더 어처구니없는 조합이었다. 어째서 에드윈이 응접실에서 트리샤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 디아나 영애.”

에드윈이 먼저 디아나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고갯짓을 했다. 디아나는 살짝 무릎을 굽혀서 예를 표했다.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는 반가움으로 디아나를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저, 디아나…… 나 우연히 저택을 지나다가, 에드윈 경께서 함께 만나지 않겠냐고 하셔서. 우리 너무 오랜만이지.”

“……그러게.”

디아나는 천천히 열여덟의 트리샤를 살폈다. 이번엔 처음으로 만나는 트리샤였다. 보는 것만으로 몸서리가 쳐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차분했다.

디아나의 마음이 더 강했던 것 같다. 트리샤의 꼴이 너무도 궁색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온통 부르튼 손과 거친 머리카락, 닳고 닳은 남루한 옷을 입은 트리샤가 감히 자신의 적이 될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내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의 시간을 방해한 건가?”

“아닙니다, 전하.”

트리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고서 다시 전하라고 불린 에드윈을 봤다. 이 제국에서 전하라는 호칭으로 불릴 수 있는 이는 별로 없었다.

“앗…… 체스터…… 대공 전하?”

뒤늦게 알아차린 트리샤가 자리에서 일어서 에드윈에게 무릎을 굽혔다.

“제 실례를 용서해 주세요, 전하.”

에드윈은 싱긋 웃으며 손짓으로 괜찮다는 뜻을 표했다. 디아나는 그 광경을 보는 것이 좀 우습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에드윈인가. 아니면 아직 루카스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어찌 됐든 트리샤는 또 구역질 나는 속셈을 품을 것이다. 그걸 아는 디아나로선 그 광경이 곱지 않게 보일 수밖에.

“트리샤.”

디아나의 맑은 목소리가 차분하게 울렸다.

“잠시, 대공 전하와 말씀을 나눠야 하니까 다른 응접실에서 기다려 줄래?”

“어? 아…….”

쭈뼛거리는 트리샤는 아마 에드윈의 만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디아나는 틈을 줄 생각이 없었다. 단둘의 시간을 고대하는 것은 에드윈도 마찬가지였다.

“샬롯, 트리샤를 안내해 줘.”

“네, 아가씨.”

디아나가 트리샤를 심상치 않게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샬롯은 재빠르게 트리샤를 데리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겨우 에드윈과 둘이 남은 디아나는 조금 여유를 찾고 자리에 앉았다.

“이런, 내가 엉뚱한 만남을 주선한 건가.”

그 말이 옳았다. 에드윈의 표정에 약간 난감함이 서려 있었다. 예전의 디아나였다면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조금요.”

그래, 예전의 디아나라면 말이다.

“난 영애의 친구라고 하길래.”

“친구란 한때는 누구보다 가까웠다가, 또 한순간에 누구보다 멀어지기도 하지요.”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에드윈을 똑바로 봤다.

“내가 알지도 못하면서 공연한 일을 만들어 버린 건…….”

“아뇨, 한 번은 만나려고 했던 친구라서요.”

막연히 어떻게든 계기가 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게 바로 오늘, 에드윈과 함께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디아나도 나름대로 트리샤를 위해 준비한 것이 있었으니 크게 잘못된 것은 아직 없었다.

“그 말을 들으니 우리가 지인이라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지는군.”

디아나는 희미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내 오늘 볼일이 있어서 외출했던 차에 마침 공작저가 보이기에.”

에드윈이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차를 마시기 좋은 시간이죠.”

디아나의 적당한 대답에 에드윈의 굳었던 입가가 풀렸다. 적어도 이 만남을 나쁘게 여기는 표정은 아니었다.

“최근엔 대공저에 방문하지 않는 것 같아서.”

더는 선대공비를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가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녀가 누구의 편이든, 디아나의 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졌다.

“선대공비 전하를 너무 귀찮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아서요.”

“어머님과 달리 나는 한가한 것을.”

특별한 말도 아닌데 디아나가 에드윈을 새삼 바라봤다. 에드윈은 차분한 풍모와 달리 과감한 면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영애도 곧 황실 무도회에 참가하겠군.”

“……네.”

에드윈이 찾아낸 화제는 디아나의 골치이기도 했다.

“마음 같아선, 내가 영애를 에스코트하고 싶지만.”

보통 영애를 공석에서 에스코트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면 꽤 대담한 발언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디아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디아나는 그 감정을 막연히 추측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직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설렘과 끌림이었다.

“내가 실언한 건가.”

에드윈은 공작저를 찾아오기로 했을 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물론 디아나가 황태자비 후보라는 것을, 아니 거의 결정된 바라는 것까지 알았지만, 한 번도 내색하지 못한다면 후회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영애에게 혼담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네, 아직은.”

적어도 지금만큼은 에드윈을 막아설 것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표현하고 싶었다.

모두의 뜻대로 디아나가 루카스의 반려가 된다고 하여도 한때 에드윈이 제게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나마 덜 씁쓸할 것이다.

“영애의 데뷔탕트 때엔 누가 에스코트를 맡았지?”

“저는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지라, 그 무렵엔 요양하느라 데뷔탕트는 하지 못했어요.”

“그래? 안타깝군.”

제 말과는 달리 에드윈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아직 디아나를 에스코트하는 영광을 가진 남자는 없었단 뜻이다. 그러자 오히려 더욱 욕심이 났다.

우스운 일이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는데, 루카스의 반려로 내정된 영애에게 이런 마음을 품는 것으로 모자라 가능한 선에서 그것을 넌지시 알리고 있다니.

“그럼, 이번 황실 무도회에선…….”

에드윈이 자꾸 같은 화제를 붙들었다. 대부분 영애는 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에 입장할 것이다. 예외는 약혼자가 있거나 결혼을 한 부인들뿐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엔 내세울 신분이 있는 남성에게 부탁하는 예도 있었다.

“아직 정해진 바가 없어요. 아시다시피 전 선친께서 일찍 세상을 뜨셔서요.”

“그랬지.”

숙부인 아론은 무도회장에 얼굴을 비추는 법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게다가 세간에선 상속 분쟁이 알려졌으니 마무리가 되기 전까진 자칫 우스운 그림이 될 수도 있었다.

“음…… 아까 했던 말을 살짝 고치고 싶은데.”

이건 에드윈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지극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네? 어떤 말씀을.”

“아까 내가 말했잖나. 마음 같아선…… 이라고.”

“네?”

디아나가 눈을 깜박였다. 대공이라는 신분은 주목도가 높았다. 설마, 에드윈이 자신을 에스코트하겠다는 뜻일까. 그것은 큰 파문을 몰고 올 것이다. 아직 혼담이 오가지 않았으니 법적으로는 괜찮았지만, 무엇보다 선대공비가 허락할 리가 없었다.

“마침, 우리는 지인이고 나도 딱히 무도회장에 함께 갈 파트너가 없어.”

에드윈도 미혼이었고, 약혼녀가 없으니 가능은 했다. 하지만 누구도 생각지 못한 전개였다. 디아나 본인에게도 그랬다. 아니, 실은 지금 청하고 있는 에드윈조차도.

“공작 영애를 에스코트하기 부족함이 없는 신분은 드물지. ……대공 정도가 되면 모를까.”

디아나의 대답을 청하는 듯이, 에드윈의 시선이 한곳에 박혔다. 그의 입가에는 여느 때보다 짙은 미소가 묻어 있었다. 에드윈 일생의 일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눈앞의 디아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하께서 곤란해지시지 않을까요.”

“고작 에스코트 정도로? 날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은데.”

어찌 해석하면 에드윈의 말이 맞았다. 문제로 삼기 위한 문제라고 했던가. 무도회의 에스코트가 바로 그런 일에 해당한다. 즉, 굳이 문제로 삼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혹시, 선대공비 전하께서 언짢으실까 걱정되기도 하고…….”

“영애. 나는 무도회 정도로 어머님께 혼이 날 나이가 아니야.”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실언이라면 죄송합니다.”

디아나의 말에 에드윈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멀고도 가까운 거리였다. 에드윈은 기다란 다리를 꼰 채로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디아나도 잠시 차로 입술을 적셨다. 부드러운 분위기가 다시 둘 사이를 감돌았다.

“데뷔탕트도 건너뛰었으니, 첫 사교계 데뷔인데…… 이왕이면 지인의 손을 잡는 건 어떤가.”

그 순간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에드윈의 커다란 손으로 시선이 갔다. 디아나는 애써 그 시선을 자연스럽게 돌렸다. 여태 디아나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트리샤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하나는 루카스의 덫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아니, 내 말이 잘못됐군.”

스륵, 에드윈이 일어섰다. 그의 큰 키가 더욱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디아나가 의아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사이, 에드윈은 디아나가 앉은 자리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카를 공작가의 디아나 영애.”

장갑을 낀 에드윈의 한 손이 디아나의 눈앞에 놓였다. 순간, 조금 심장이 빠르게 뛴 것 같았다. 몇 번의 삶을 살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디아나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영애의 첫 에스코트를 맡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느긋하고 다정한 저음 너머엔 약간의 초조함이 있었다. 이건 에드윈에게도 일생일대의 돌발적 행동이었다.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며 마음을 태우는 것은 에드윈을 보는 영애들의 몫이지, 에드윈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여태까진 그들의 애타는 마음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디아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저는…….”

디아나가 말끝을 흐리자 가슴 한곳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디아나는 고개를 들어 에드윈과 눈을 맞췄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온통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에 맺혀 있었다.

디아나는 그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봤다. 제거하고 벗어나는 것 외에도 인생은 있었다. 늘 압박감에 시달리던 디아나가 처음으로 찾은 호의였다.

“영광입니다, 전하.”

목적을 잊거나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떤 목적도 없이 그 커다란 손을 잡고 싶었다. 디아나가 망설이던 손을 살짝 에드윈의 손 위에 얹자 조금의 꾸밈도 없는 미소가 에드윈의 입가에 번졌다.

“나야말로, 영광이지.”

에드윈은 일부러 잡은 디아나의 손을 살짝 들어 올린 후에 아주 자연스럽게도 아까보다 더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디아나의 오른쪽에 앉자 조금 과장하면 무릎이 닿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상한 일이야.”

나지막한 혼잣말이었다.

“영애와 있으면, 나답지 않은 일을 하게 돼.”

“방금……도 그랬나요?”

에드윈에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디아나를 에스코트하는 것은 그에게 큰 기쁨과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새겨지겠지만, 예정대로 디아나가 황태자비가 된다면 그만큼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후회하는 것보다 상처로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건 그냥 어느 순간부터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사실, 처음이었다.”

“무엇……이요?”

“에스코트.”

디아나의 눈동자에 의아한 빛이 서렸다. 방금 에드윈은 무척이나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고 에스코트를 청했다. 게다가 대공의 신분으로 참석해야 할 무도회가 얼마나 많을지는 알 만했다.

“아, 전하께서 에스코트를 청하시는 일은 없었겠지요.”

에드윈의 인기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아마, 평범한 영애라면 누구나 한눈에 반할 만한 남자였다. 무수한 요청은 있되, 스스로 요청할 일은 없었으리라.

“물론, 그것도 처음이지만.”

묘한 미소가 에드윈의 입가에 서렸다.

“실은 누군가를 에스코트하는 것도 디아나 영애가 처음이야.”

쿵, 조금도 미동할 것 같지 않았던 디아나의 심장이 울렸다. 그것은 디아나가 잊고 있었던 감정이라는 것이고, 기대하지 않았던 작은 행복이기도 했다. 고작 그 사실 하나에 이리 마음이 일렁인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그……렇군요.”

“그래.”

그래, 잠시 잊고 말았다.

살아간다는 것엔 불행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지만, 마찬가지로 행복도 있었음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