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디아나의 표정이 금세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아가씨? 방금 뭐라고…….”
“잠깐, 혼자 있고 싶어.”
샬롯은 고개를 끄덕이고 금방 물러갔다. 디아나는 생각에 잠긴 채로 창가의 의자에 앉았다. 제롬이 판매한 정보는 바로 내부적인 황태자비 간택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과연, 디아나에게 필요한 정보였다.
“어째서.”
디아나는 이미 선대공비를 만나 자신이 불임이라는 이야기를 전달했다. 물론 꾸며 낸 이야기였지만, 의원들에게 그 사실을 믿게 만들 수 있는 몇 가지 증상도 생각해 뒀다. 후계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은 혼인에 있어서 치명적인 조건이다. 설마, 선대공비의 의견이 묵살당한 것일까.
“……아냐.”
그것은 묵살할 수 없는 중대한 조건이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선 후계에게 고귀한 핏줄을 물려주기 위하여서 하는 것이 정략혼이었다.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허공을 주시했다. 자신이 아는 황후는 무슨 일이 있어도 후계 생산을 하지 못하는 황태자비를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 전하지 않은 거야.”
결론은 한 가지, 선대공비가 그 사실을 침묵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지금의 디아나로서 알 수가 없었다. 선대공비와 황후는 친자매였으며 선대공비 역시 황태자비 간택에 참여하는 인물이었다. 서찰도 아닌 디아나 본인이 직접 알현해서 고한 일인데, 일이 이렇게 흘러간다는 것은 선대공비가 제 생각과 다른 행보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유가 뭐든지…… 내게 도움이 되지 않을 인물이었어.”
디아나는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트리샤에게 그리 당하면서도 또 사람을 단순하게 평가했다. 선대공비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만났을 때 받았던 인상. 그것만으로 디아나의 생각대로 움직여 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오만이었다.
“그리고 만나서 한 말은 의미가 없겠지.”
후일 디아나가 선대공비에게 했던 말을 전한다고 해도 선대공비가 부인하면 끝이었다. 그땐 이미 혼인을 무를 수 없을 테니, 디아나만 손해를 보게 된다. 한 가지 편견이 옳았던 것은 선대공비가 그 인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영애는…… 다른 후보는 전혀 없는 건가.”
디아나가 다시 일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디아나를 포함한 세 명의 영애 외에도 다른 영애들이 초대됐을 것이다.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라면 분명 꼼꼼한 샬롯이 일지에 기록했겠지.
“어디…… 모임은 성공적이었고, 디아나 영애께선 어린 나이에도 차분하고 기품 있는 모습을 보이셔서 황후 폐하와 선대공비 전하께서 크게 칭찬하셨다. 여러 영애가 모였지만, 두 분께서 언급하신 것은 디아나 영애님뿐이었으니 참으로 영광이었다.”
순간 욕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사람의 성정이 어디 안 간다더니, 디아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조숙하고 차분했다. 나머지 영애들이 어땠을지는 모르겠으나 보통 그 또래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두 웃전의 눈에 차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디아나만을 언급하며 칭찬을 했다고 하니, 이미 어느 정도 낙점이 된 셈이었다.
“하…… 이렇게나 과거에 시작된 일이라니.”
아무리 회귀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원작 디아나의 충고처럼, 회귀할수록 주어진 시간은 짧아진다. 즉, 지금 아는 것을 그대로 기억하면서 더 과거로 갈 수는 없었다.
“……잠깐.”
디아나의 시선이 일지 구석에서 멈췄다. 혹시나 다른 영애의 언급이 또 없을까 해서 살핀 것인데, 그보다 더 엄청난 구절이 있었다.
“왜 여기에서 트리샤가…….”
몇 번이고 눈을 깜박여도 일지에 적힌 글씨는 또렷했다. 디아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일지를 읽어 나갔다.
“영애께서 귀가하실 때, 블랑 남작가의 트리샤 영애를 데리고 오셨다. 모임에 초청된 영애가 아닌, 그 자리의 일을 돕기 위해 참여한 모친과 동행한 가엾은 처지의 영애였다.”
문제의 첫 만남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해도 바뀌지 않는다.
“선량하고 마음씨가 따뜻한 디아나 영애께선 트리샤 영애를 괴롭히던 다른 영애들을 꾸짖으시곤, 가엾은 트리샤 영애와 친우가 되겠노라고 하셨다. 과연, 선친의 따스한 인품을 닮은 모습이셨다.”
디아나는 계속해서 일지를 넘겼다. 드문드문 트리샤가 공작저에 방문했다는 것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
그 빈도는 때에 따라 달랐지만, 적어도 한 달에 여러 번 방문했다. 게다가 따스하기만 했지, 사람 보는 눈은 없었던 디아나가 어려운 트리샤의 가정을 고려하여 여러모로 베풀었음도 함께 기록됐다.
“그곳에 트리샤도 있었다니.”
황망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결국,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모를 만큼 어린 나이에 이뤄진 셈이었다. 그 문제의 사교 모임에서 황태자비로 내정되었고, 트리샤를 만났다. 가혹한 운명이 전부 그날 정해진 것이다.
“후…….”
마음이 무거웠다. 어떤 실수를 해서가 아니었다. 모두 디아나가 너무 잘 해냈기 때문이었다. 어린 영애들 사이에서 유난히 조숙하고 기품 있는 모습을 보여서, 다른 영애들이 트리샤를 업신여길 때 온정 어린 손길을 내밀었기 때문에, 그래서 디아나는 불행해졌다.
“아니, 지난 일은 됐어.”
디아나가 자신을 채근하듯 일부러 단호한 말을 뱉었다. 디아나의 손에 있는 일지는 과거의 일을 적었지만, 지금 눈앞의 테이블 위에 있는 황궁 무도회의 초청장은 현재이자 미래였다.
“바꿀 수 있어. ……아니.”
다시는 황실에 갇혀서 초목처럼 말라 가는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지금 디아나에겐 아직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 그리고 남은 인생이 있었다. 루카스와 트리샤 사이에 끼어서 또 한 번 고통스러운 생을 보내기 위해서 회귀한 것이 아니다.
“바꿔야만 해.”
시간은 디아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
트리샤는 약재상에 약초를 내다 팔고 돌아오는 길에 위풍당당한 카를 공작저를 올려다봤다. 지름길이 있었지만, 매번 트리샤는 기회가 될 때면 카를 공작저의 앞을 지나갔다. 비록 최근의 디아나는 자신을 찾지도 않았어도 공작저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꿈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저 정원에서 같이 뛰어놀았었는데…….”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혼잣말이었다. 카를 공작저는 트리샤에게 있어서 마법의 성 같았다. 꿈도 꿔 보지 못한 것들이 당연한 듯이 넘쳐 났고, 천사 같은 디아나는 트리샤에게도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눠 줬다.
“누군가 참견이라도 한 걸까.”
곧 성인이 될 나이니까, 누군가 신분을 가려서 사귀라고 충고를 했을 법도 했다. 그건 디아나의 성정과 둘의 우정을 모르는 어리석고 파렴치한 자가 분명했다. 그 말을 저 대문 너머로 들어가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디아나도 날 만나면…… 알아줄 텐데.”
트리샤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오늘 다녀온 약재상은 수도 시장의 중심에 있었다. 그 근처는 공관을 비롯한 기관들이 몰려 있는 길이였다.
하도 오랜만에 외출을 한 탓인지 지금 장안의 화제가 바로 카를 공작가의 유산 문제라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그 주인공이 바로 자신의 친구 디아나라는 것도.
유산 이야기나 작위에 대한 것은 아직 트리샤에게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와닿는 것도 있었다. 대부분 사람이 누군가 디아나를 조종하고 있다고 떠들어 댔다. 여태 공작저에서 교양을 쌓아 온 영애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재산권을 그렇게 주장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래, 디아나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어.”
트리샤가 아는 디아나도 그랬다. 세속적인 것이나 물건에는 관심이 없었던 디아나가 갑자기 숙부 내외에게 간 재산을 되찾기 위해 변호인까지 고용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디아나를 조종하며, 친구인 트리샤까지 멀리하게 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답답했다.
“거기, 비켜요!”
혼자만의 생각에 넋이 나간 트리샤에겐 그 말이 조금 늦게 들렸다.
“위험해!”
그제야 마차를 이끄는 말들이 앞발을 치켜드는 것을 보았다. 막상 코앞에 위험이 닥치면 몸이 굳는다더니, 트리샤도 그랬다. 말들은 거친 숨결과 난폭한 외침을 뱉었고 마부는 욕지기를 뱉으며 고삐를 단단히 붙들었다.
“감히 공작저의 대문에서 넋을 놓고 있다니…… 저런 몹쓸.”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트리샤는 다리가 풀려 비틀거리다가 대문 곁의 돌담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그런다고 마부의 신랄한 욕설이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이 안에서 뛰어놀던 시절도 있었다고, 난 사실 이 공작저 주인의 친구라고, 그렇게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거란 사실이 더 썼다.
“하마터면 귀한 말이 다칠 뻔했잖아! 이 마차에 누가 타고 계신 줄 알고.”
마부의 힐난은 멈추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문지기가 와서 대문을 열어 줬으면 좋겠다. 그럼 저 무서운 눈길에선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만.”
그때, 마차의 문이 열리고 귀족적인 풍모를 한 남자가 나왔다. 마부는 그를 보자마자 감히 대답조차 못 하고 고개만 조아렸다.
“이곳은 길이니 누구나 다닐 수 있다. 오히려 이렇게 큰 마차를 몰고 있으니 지나는 사람을 조심해야지.”
“송구합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다음부터 주의하면 된다.”
저음의 목소리가 무척 고귀하게 들렸다. 트리샤는 용기를 내어 곁눈질로 그 남자를 살폈다. 눈에 띌 만큼 큰 키와 선명한 흑발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흘깃 훔쳐본 것뿐인데도 무척 수려한 옆얼굴이 시선에 콱 박혔다.
“어디, 다친 데라도?”
저벅저벅, 남자가 다가와서 트리샤 앞에 섰다.
“괘, 괜찮습니다…….”
“마부의 무례는 내가 대신 사과하겠다.”
그제야 트리샤는 고개를 들었다. 똑바로 본 남자의 모습은 한층 더 강렬한 인상을 줬다. 새카만 눈동자와 곧은 콧날, 굳게 다문 입은 미형이기도 했지만, 무척 남자다운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트리샤가 여태 봤던 어떤 남자보다 귀족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는 손짓 하나, 말 한마디에조차 우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다친 데가 없는 것이 확실한가?”
“……네,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처음으로 남자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에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트리샤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대는 것을 느꼈다.
“공작저에 볼일이 있어서 왔나?”
하염없이 대문 근처를 서성이던 트리샤였다. 심부름을 왔다가 문지기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엔 충분했다.
“그건 아니지만…… 지나던 길에……. 이 저택 주인이 제…… 친구거든요.”
트리샤의 남루한 차림새를 보면 누구라도 비웃고 욕설을 퍼부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이 남자에게는 그렇게 말해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번 트리샤는 큰 용기를 내기로 한 것이다.
“디아나 영애의 친구라고?”
친근한 이름에 트리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실례를 했군. 나는 에드윈, 에드윈 체스터다.”
“트리샤…… 블랑입니다.”
에드윈은 작고 허름한 소녀를 내려다봤다. 솔직히 저 행색으로 디아나의 친구라고 하는 것이 놀랍긴 했지만, 그 상대가 디아나라면 오히려 행색으로 사람을 판가름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잘됐군.”
“……예?”
선대공비에게서 황태자비 후보 낙점 소식을 들은 후로 에드윈은 좀처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결국, 어떤 구실도 없이 공작저에 오고 말았다.
“실은, 내가 기별도 없이 지나던 길에 들른 참이라.”
하지만 본래 공작저의 영애에게 아무런 용건이나 초대장 없이 방문하는 것은 큰 실례였다. 내내 그 점이 마음에 걸렸던 에드윈인데, 하필 대문에서 디아나의 친구를 만나다니 이건 좋은 구실이 될 수도 있었다.
“함께 영애를 만나지 않겠나?”
어쩌다 마주친 우연이 트리샤에게 엄청난 선물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