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며칠을 홀연히 사라졌던 제롬이 공작저에 나타났다. 늘 그렇듯이 바람 같은 행보였다. 디아나는 그런 제롬을 향해 기대 반, 걱정 반의 시선을 보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렇죠.”
디아나는 우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롬이 의자에 앉는 것으로 봐선 한두 마디로 끝나지 않을 이야기가 있을 거다.
“트리샤 블랑이란 영애…… 자체는 별로 특이한 점이 없었습니다. 제가 직접 조사했으니 누가 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제롬 경의 능력을 의심하진 않아요.”
“조사서대로, 어려운 형편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여덟 살 된 남동생을 돌보는 것까지… 꽤 힘든 노동일 겁니다.”
이미 그레이의 조사서에서 그 동생의 사실을 알고 있는 디아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또 모르는 일이다.
“그 아이, 이름이…….”
“니콜라입니다. 그쪽도 뭐, 또래보다 조금 모자란 것 외에는 평범한 소년입니다. 사실 여덟 살을 상대로는 그렇게 조사할 게 없어서요.”
“그렇겠죠.”
“굳이 찾자면, 아…… 다행히도 그 아이는 붉은 머리카락을 물려받지 않았더군요.”
또 붉은 머리카락 이야기다. 디아나는 자꾸만 머리를 맴도는 이미지를 잡으려 애썼다. 뭔가,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트리샤가 남긴 강렬한 인상만이 아니었다.
“왜…… 그게 다행이죠?”
디아나가 느꼈던 이질감은 바로 이거였다. 트리샤의 붉은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선명하고 햇살에 비치면 굉장히 눈에 띄었다. 트리샤 본인에게도 썩 잘 어울렸다.
“예? 그야 붉은 머리카락은 당연히.”
“당연히?”
“아, 모르셨습니까?”
디아나의 반문에 제롬은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해진 법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하긴, 어릴 때부터 공작저에서만 살아온 영애니까 세간의 일은 잘 모를 수도 있었다. 공작저의 사람들이 굳이 나쁜 이야기를 전할 필요까진 없었을 테다.
“보통 세간에선 붉은 머리카락을 좀…… 터부시합니다. 때에 따라선 강한 경멸을 받을 수도 있죠. 뭐, 워낙 드문 색이기도 하고. 예전부터 내려오는 일종의 편견이랄까요?”
“어떤 편견이죠?”
“음…… 영애께 말씀드리긴 좀 외람되지만, 성적으로 문란하다든가, 악마를 숭배한다든가, 마녀라든가 뭐, 그런 편견이 있습니다. 딱히 근거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한 가지 그중에서 편견이 아닌 것이 있었다. 트리샤는 마녀였다. 그제야 디아나는 붉은 마녀의 피라고 했던 트리샤의 말을 완전히 깨달았다. 디아나는 그것이 피를 뜻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제롬 경은 그 편견을 믿나요?”
“전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그게 대답은 아닐 텐데요.”
제롬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음…… 저는 편견이라는 현상 그 자체를 믿습니다. 뭔가 발생한 이유가 있지만, 잊혔을 수도 있죠. 물론 저는 현상과 원인이라는 것에 흥미를 느꼈을 뿐이지 근거 없는 차별엔 반대합니다만.”
“붉은 머리카락이라는 것은,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있을 정도인가요?”
“그건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트리샤 양의 어머니도 붉은 머리카락이고 평민인데도 남작과 결혼했지요. 그 남작이 정상은 아니지만요.”
아른아른 트리샤의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떠올랐다. 이젠 처음에 떠올렸을 때처럼 직접적인 고통을 느끼거나 괴롭진 않았지만, 썩 유쾌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저런, 제가 불쾌한 이야기를. 실례했습니다.”
디아나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지는 것을 본 제롬이 멋대로 해석하곤 사과했다.
“그 어머니는 병석에 있다죠?”
“맞습니다만, 그래도 가계에 보탬이 되는 모양입니다.”
“어떻게 병석에서?”
타당한 의문이었다.
“귀족으로선 보통 안 할 행동이지만, 그 어머니는 평민 출신이라 그런지 약재상에 약초를 손질해서 공급한다고 들었습니다. 트리샤 양도 그 일에 시간을 많이 쓰고요.”
“약초……?”
“아마 그 어머니가 결혼 전에 조금 소양이 있던 모양이죠.”
어머니, 붉은 머리카락, 약초…… 조금씩 연관성 있는 퍼즐 조각이 보였다.
“제롬 경.”
“예.”
잠깐 생각에 잠겼던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트리샤 블랑의 조사 범위를 넓혀 줘요.”
“가족까지…… 말입니까?”
“아뇨.”
디아나는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했다. 트리샤의 어머니도 붉은 머리카락이라는 것은 넘기기 힘든 우연이자 뭔가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었다.
“조사가 가능한 범위, 전부요.”
제롬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금 이 영애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는 몰라도, 무척 흥미가 있는 결과가 나올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보수가 꽤 나올 텐데요. 제 능력을 얕잡아 보시면 곤란합니다.”
“그러니 맡기는 거예요. 가능한 모든 범위까지, 사소한 것이라도 전부 알아내 줘요.”
순간 제롬은 의뢰인에게 이유를 묻지 않는다는 제 철칙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저 아름다운 영애의 푸른 눈동자에 저런 빛이 서릴 정도의 인연이라는 것은 뭘까. 그저 하찮은 소녀의 조사에 이토록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본능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알겠습니다.”
제롬은 간신히 호기심을 억눌렀다. 어차피 조사를 끝내면 알게 될 것이다. 고작 호기심으로 자신의 원칙을 어길 수는 없었다.
“참,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뭐죠?”
보통은 디아나가 요청하고 제롬이 받아들였다. 그가 먼저 나서는 일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영애께 팔고 싶은 정보가 있습니다.”
디아나의 시선이 제롬을 향했다. 푸른 눈동자가 제롬의 속내를 읽어 낼 것처럼 잠시 그 자리에 머물렀다. 산전수전에 온갖 사람은 다 겪어 봤다고 자부하는 제롬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잠시 긴장이 팽팽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디아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언젠가는 직접 조사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게 내게 도움이 될까요?”
“판단은 제 몫이 아닙니다. 그저 정보가 들어왔기에 구매하실 의향이 있는지 여쭌 거죠.”
참으로 프로다운 말이었다. 디아나는 잠시 짧은 생각에 잠겼다. 제롬은 이미 디아나에게서 거액의 보수를 받고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터, 굳이 제롬이 쓸모없는 정보를 디아나에게 팔 필요는 없었다. 굳이 신용도를 낮추기엔 지금의 이득이 더 컸다.
“구매하죠.”
“좋은 결정입니다.”
디아나는 제롬을 봤다. 언제나처럼 봉투를 꺼낼 줄 알았기 때문이다.
“샤리즈 후작가의 둘째 영애가 혼처를 알아보는 중이라고 합니다.”
이번 정보는 제롬의 입에서 직접 나왔다.
“그게 무슨…….”
샤리즈 후작가의 존재도 영애의 존재도 알고 있었지만, 딱히 디아나와는 접점이 없었다.
“밀레타 공국에서도 막내 사윗감을 찾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여전히 디아나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정보는 여기까지였습니다.”
“하?”
“그럼, 전 이만.”
디아나가 실소로 반문했지만, 제롬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고 늘 그랬듯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니, 이 무슨 황당한…….”
제롬 하이든에겐 수많은 별명이 있었다. 절반이 넘는 평은 그가 사기꾼이라고 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다는 건가.”
하필 디아나에게 이 정보를 팔아야 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들과 디아나의 접점, 혹은 그들이 디아나에게 미치는 영향.
잠시 머리가 복잡했다. 밀레타 공국은 있는 줄만 알았지, 아예 디아나의 상황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샤리즈 후작가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샤리즈 후작가는 카를가가 아닌 체스터 대공가와 인연이 깊었다.
“……잠깐.”
무언가 섬광처럼 디아나를 스쳤다. 쿵쿵,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집무실 책상을 박차고 일어선 디아나가 급하게 샬롯을 찾았다.
“샬롯, 샬롯!”
“……네, 아가씨. 저 여기 있어요.”
평소와는 달리 조급해 보이는 디아나의 모습에 샬롯이 달려와 안색을 살폈다.
“무슨 일인가요?”
디아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샤리즈 후작가.”
“네, 알고 있죠.”
“샤리즈 후작가는…… 체스터 대공가와 관련이 있었지?”
“아, 예전에 가신이었던 역사가 있죠. 지금도 인연이 깊을 거예요. 갑자기 그건 왜 물으세요?”
언뜻 연관이 없는 정보에도 연결고리가 있었다. 마치 트리샤의 것과 같았다. 붉은 머리카락과 그녀의 어머니, 약초는 각각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어 같았지만, 디아나의 의심대로라면 모두 하나의 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 제롬이 아무런 이유 없는 정보를 디아나에게 팔았을 리가 없다. 즉, 그 영애들은 모두 디아나와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럼, 밀레타 공국은?”
“꽤 부유한 공국이죠. 그 막내 영애와 예전에 아가씨가 어리실 때 사교 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 안 나세요?”
“내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지금의 디아나가 그렇게 오래전 일을 기억할 리가 없었다. 디아나는 일부러 샬롯을 빤히 봤다. 샬롯의 존재는 언제나 디아나의 곁에 있었기 때문에, 이럴 때의 사전이 되어 주곤 했다. 그녀는 디아나에게 없는 디아나의 기억을 모두 가진 존재였다.
“그야 당연하죠.”
샬롯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린 영애들의 모임이었으니까요. 같이 왈츠를 배우셨는데, 기억 못 하실 수도 있어요. 사교계의 부인들께서 주선하신 모임이었답니다. 높은 신분의 영애만 모였죠.”
“샤리즈 후작의 둘째 영애가…….”
“어머, 기억하세요? 맞아요. 둘째 영애가 아가씨와 동갑이셔요.”
어째서일까. 불길한 우연은 자꾸 맞아 떨어진다.
“그럼, 밀레타 공국의 막내 영애도…….”
“아…… 아, 그래요. 그러네요. 어머, 저보다 기억력이 좋으셔요!”
“그 영애도 나와 동갑이란 말이야?”
“아뇨, 아가씨보다 두 살 어리신데 그날은 첫째 영애를 따라서 오셨답니다.”
고귀한 가문의 어린 영애들은 한날 한자리에 있었다. 제롬이 언급했던 두 영애와 디아나 자신, 그렇게 셋은 이미 그때 만났다. 왈츠 교습? 그런 것은 사교계의 흔한 핑계였다. 무언가, 목적이 있었을 텐데.
“그 모임, 누가 주최한 거지?”
“음, 글쎄요…… 어디 기록이 있을 텐데.”
“당장 찾아봐.”
샬롯에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는 그런 샬롯을 따라 서재로 향했다. 우연이 아니었다. 셋은 한자리에 있었고, 제롬은 하필 이 시점에 두 영애의 혼담을 정보로 팔았다.
“……아, 저택 일지에 있네요.”
“이리 줘.”
디아나가 다급하게 샬롯이 들고 있는 낡은 책자를 뺏어 들었다. 샬롯이 펼쳐 둔 페이지엔 그날의 날짜와 간략한 기록들이 나열돼 있었다. 디아나는 자신이 찾던 날짜를 보고, 소리 내어 그 부분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5월 3일, 오전엔 흐리고 그 후엔 맑음.”
공작저의 운영에 대한 몇 가지 사항은 건너뛰었다. 원하는 부분을 찾는 건 아주 간단했다. 디아나,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디아나 영애께서 체스터 대공저의 초청으로 사교 모임에 참석하셨다. 드물게 또래 영애를 만날 귀중한 기회로, 영광스럽게도 황후 폐하와 선대공비께서 참관하셨다.”
툭, 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제롬이 말했던 두 영애를 처음 만난 곳이 체스터 대공가였다니. 게다가 모두 또래의 영애이며 선대공비와 황후가 직접 참관했다. 굳이 어린 영애들의 왈츠 교습을 참관할 이유라면…… 단 하나뿐이었다.
“황태자비 간택은 그때부터 시작된 거야.”
디아나가 두려운 사실을 읊조렸다. 제롬의 정보는 가치가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영애 중 가장 신분이 귀한 둘을 언급한 것은 바로 저 자리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아주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간택이 끝났다…….”
천천히 디아나가 숨을 뱉었다. 애초에 선대공비는 디아나의 조력자가 아니었다. 간택은 하루 이틀 사이에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제롬이 언급한 두 영애는 아마 디아나와 함께 마지막 후보였을 것이다. 그들이 혼처를 비밀리에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의미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황태자비는 결정됐어.”
디아나의 푸른 눈이 다시 한 번 가혹한 운명을 직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