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디아나는 황실 무도회 초청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채로 며칠을 보냈다. 이것만큼은 뾰족한 수가 없었다. 대외적으로 요양 중이라는 핑계도 황실을 상대로는 무리다. 이전의 삶에서 황후인 스텔라에게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대공저에서 소식은?”
“아직 없습니다.”
선대공비는 그 후 디아나를 찾지 않았다. 안전하게 중립을 지키려는 것인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지 디아나로선 속이 타는 노릇이었다.
“피할 수 없다는 건가.”
샬롯이 물러간 후, 디아나가 조용히 혼잣말했다. 루카스를 꼭 만나야 하는 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부딪혀야 한다면 지금이 나았다. 적어도 트리샤의 주술에 지배되지 않은 루카스 본인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루카스…….”
한때는 남편이었던 사람의 이름을 읊조리는데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디아나가 가장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은 선대공비도 황후도 아니었다. 그 트리샤조차 아니다. 어쩌면 디아나는 한 번도 루카스라는 사람 자체를 알 기회가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긴, 결혼생활의 시작부터 셋이었으니까.”
황태자비가 된 디아나는 엄격한 법도를 지켜야만 했다. 부부는 아직 어렸고, 서툴렀다. 서로 얼굴 정도만 알고 있을 뿐, 나머지는 살면서 알아 가야 할 것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트리샤의 존재가 그 기회를 빼앗았다. 어찌 생각하면, 루카스야말로 디아나에게서 가장 먼 타인이었던 거다. 어느 생, 어느 기억에도 마찬가지였다.
“……불쾌한 기억이야, 정말.”
디아나가 제 이마를 짚었다. 다시 회귀한 후로 디아나는 원작의 그녀와 기억을 공유했다.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신비로운 하얀 공간에서 둘의 영혼이 섞인 것 같았다. 물에 물감 한 방울이 톡 떨어지듯이, 온 마음에 그녀의 영혼이 번졌다.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
디아나의 눈빛이 달라졌다. 트리샤의 주술이 루카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미 루카스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설령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 번도 디아나의 편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방관자의 잔인한 위치를 지켰다.
“마지막까지 그랬지.”
그것이 루카스의 가장 큰 죄였다. 디아나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도, 극독에 고통받으며 죽어 갔을 때도, 그는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방관자의 위치에 서 있었다.
“타인이라니, 바보 같은 생각을.”
그래선 안 됐다. 그는 디아나의 남편이었기 때문에. 영원히 잃은 아이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러나 루카스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보이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디아나의 고통을 내버려 뒀다.
“그는 타인보다 못한 인간이었어.”
디아나의 기억 속에 있는 전 남편에 대한 정의는 뚜렷했다.
***
황실 무도회를 막고 싶은 사람은 또 있었다. 바로 에드윈이다. 디아나는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였다. 게다가 루카스의 말에 따르자면 경쟁자들의 외모가 형편없는 모양이니 그 사이에서 더 돋보일 것이다. 에드윈이 생각해도 먼지 한 점 묻을 곳이 없는 완벽한 신붓감이었다. 자신이 루카스라면, 아니 그 누구라도 디아나를 택할 것은 분명했다.
“에드윈, 이런 시각까지…… 내가 늘 건강이 우선이라고 했거늘.”
늦은 밤에도 불이 켜진 집무실을 본 그레이스가 몸소 차를 가지고 왔다. 대외적으로는 무척 엄격한 인상의 선대공비였지만, 하나뿐인 아들에게는 그 정성이 지극했다.
“이것만 하고 덮으려 했습니다.”
선대공비의 눈엔 장성한 아들만큼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것이 없었다. 에드윈은 자랄수록 작고한 제 아버지를 닮았다. 특히 제국에서 드문 검은색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가 그대로였다.
“요즘, 무척 분주한 모양이구나.”
최근엔 거의 선대공비에게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그 점을 돌려서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바깥 일이 많아져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 사내들에겐 바깥일도 중요하지. 루카스 전하는 어찌 지내시더냐.”
“늘 그렇듯이 활기차십니다.”
에드윈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달리 칭찬을 할 만한 변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보통 황태자라면 공부에 진척이 있다든가, 최근 무언가를 해냈다는 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루카스는 늘 뚜렷한 목적이 없었다.
“……그래, 뭐 건강하시다면 좋은 것이지.”
그레이스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친동생인 스텔라는 어릴 때부터 그레이스와 비교의 대상이었다. 물론 한 번도 스텔라가 그레이스를 이긴 적은 없었다. 스텔라는 성미가 난폭했고, 조급한 면이 있었다.
그것은 가문에 내려오는 기질이었다. 그레이스는 그 기질을 영민함으로 잘 다스리고 포장할 줄 알았지만, 스텔라는 아니었다.
“루카스 전하는 어릴 때부터 황후 폐하를 많이 닮으셨지.”
에드윈은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제 어머니의 묘한 승리감을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단 한 번도, 그 어떤 면에서도 자신을 이긴 적 없던 동생이 황후가 되고 정작 제 남편인 대공은 일찍 유명을 달리했을 때 그레이스가 느낀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 비교해서…… 너는 작고하신 네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물론, 나를 닮기도 했지.”
그러나 언제까지나 패배하라는 법은 없었다. 스텔라가 낳은 아이는 에드윈보다 세 살이 어리다고는 해도 모든 면에서 눈에 뜨이게 처졌다.
우선 루카스는 어릴 때부터 병약해 큰 병치레를 했고 한 번은 열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탓에 과보호를 받으며 연약하게 자랐다. 그때, 에드윈은 제 아버지를 닮아 우월한 신체 능력을 뽐내며 기사도를 익히고 무예를 연마했다.
“사내란, 신분을 막론하고 강인해야지. 네 아버지나 너처럼 말이다.”
그 말엔 묘한 가시가 있었다. 현재의 황제도 병상에 누운 채였다. 루카스의 나약함엔 선천적인 요인이 컸다. 아이들이 장성하면서 차이는 더욱 벌어졌다. 루카스는 스텔라의 급하고 난폭한 성미를 닮았고, 에드윈은 착실하게 제 아버지의 전철을 밟고 있었다.
“곧 황실 무도회에서 장성한 네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어미는 정말로 기쁘구나.”
선대공비는 이런 날을 기다려왔다. 고위 귀족들이 모이는 사교계에선 비밀도 아닌 이야기였다. 정작 황태자는 나약하고 한심한데, 대공은 선친을 닮아 멋지게 장성해서 이제는 어엿한 지도자의 티가 난다는 것이다.
“제가 주인공은 아니잖습니까.”
에드윈이 멋쩍게 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레이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든 무도회는 막상 시작되어야 주인공을 아는 법이지.”
“……저보단 황태자비가 될 영애에게 주목이 쏠릴 것 같은데요.”
“아, 그 일이 있었지.”
그레이스는 에드윈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말끝을 흐렸다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사이에도 에드윈은 입술이 바싹 말랐다.
“어차피 결정된 일이라, 그리 화제가 될까 싶은데.”
“결정……됐습니까?”
“궁금한 것이냐? 그런 일에 관심을 보이다니 너답지 않구나.”
“그야, 루카스 전하의 반려가 될 영애니까…….”
그레이스가 잠시 제 아들의 눈을 바라봤다. 에드윈은 제 표정에 동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평정을 가장했다.
“알았다. 루카스 전하가 널 채근하셨지? 어떤 영애인지 알아오라고.”
“……예, 맞습니다.”
“흥, 그럴 줄 알았다. 루카스 전하는 호기심이 아주 왕성하시니까.”
냉소적인 어투였다. 에드윈은 묵묵히 그런 어머니를 바라봤다.
“사실, 바보가 아니라면 다 알 만한 결과이거늘.”
“저도…… 바보인 겁니까.”
에드윈이 장난스레 묻자 그레이스가 다정하게 손을 뻗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넌 후보인 영애들을 몰라서 그런다. 사교계의 부인들이나 아는 것이지.”
지금 에드윈이 내심 바라는 것은 한 가지였다. 사내들은 모르는, 사교계의 부인들이나 아는, 디아나보다 나은 후보가 있기를.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기대하는 마음까지 떨치긴 어려웠다.
“아주…… 완벽한 황태자비 후보란다.”
“그런 영애가 있습니까?”
“그래, 완벽해.”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책상 아래의 손을 꾹 쥐었다. 그 속도 모르는 그레이스는 훗, 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무척이나 아름답게 자랐더구나. 내 기억보다 훨씬 더 말이야.”
“직접…… 보셨습니까?”
“그래, 얼마 전에 내게 알현을 청했어. 예법도 손색이 없고, 누가 보아도 기품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안 좋은 예감이 스쳤다. 에드윈이 최근에 본 대공저의 손님 중에서 영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디아나뿐이었다. 아름답고 예법에 손색이 없으며 누가 보아도 기품이 넘친다는 묘사는 디아나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내가 황후 폐하께 적극적으로 추천했단다. 기대도 하지 않은 선물이…… 아니, 경사가 될 것 같아.”
그레이스가 제게 알현을 청했던 디아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병약하다던 소문과는 달리 푸른 눈동자는 영민하게 빛났고, 두 뺨엔 장밋빛 혈색이 돌았다. 게다가 신이 보낸 선물과 같은 사실을 제 입으로 고했다.
후계를 생산하기 어려운 몸이라니, 그레이스의 처지에서 그보다 더 좋은 황태자비 후보는 없다. 디아나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실은, 샤리즈 후작가의 영애였으면 했다만 큰 실수를 할 뻔했다.”
샤리즈 후작가는 체스터 대공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가문이었다. 과거 대공가의 가신이었던 역사까지 있었다. 황후는 그 점을 무척 꺼렸다. 하지만 그레이스와 스텔라의 아버지인 드노아 경이 중재를 하던 터였다.
“아버님을 뵙기 전에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어.”
드노아 반 테스, 고령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재야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실력자가 자매의 아버지였다. 실제로 그 자매들의 혼처를 보면 영향력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러면…….”
에드윈이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에 운을 뗐다. 지금은 제 조부도 황후도 궁금하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의 혼사인데, 내가 주제넘게 나설 일이 아니었다.”
“예?”
그레이스답지 않은 태도였다. 그야말로, 무언가 저의가 있다는 것을 에드윈은 직감했다.
“황후 폐하의 뜻이 가장 중요하지.”
사사건건 황후의 뜻에 반대하고 가르치려고 들었던 그레이스다. 아무리 아들이라도 수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 영애는 그럼…….”
“그래, 황후 폐하의 뜻대로 카를가의 영애가 황태자비가 될 거다.”
마음 한구석으로 예상했던 답변인데도 쿵,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황태자비가 된다는 것은 에드윈에게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의미였다.
에드윈은 제 감정을 모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디아나에게서 느낀 설렘과 이끌림, 그 특별했던 순간들은 다른 이에게서는 영영 찾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확정……된 겁니까.”
“황실에서 때가 되면 공표할 것이다.”
에드윈의 얼굴에 그늘이 졌지만, 그레이스는 제 생각에 심취해서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되겠어.”
루카스가 정비에게서 대를 잇지 못한다면, 그만큼 황실의 정당성이 약해진다. 물론 다른 여인에게서 아이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모친의 신분이 낮으면 쉬이 얕잡아 보이고 평생 약점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제 아들인 에드윈은 어떤가. 이 대공가는 대대로 정비에게서 자손을 얻었다. 어쩌면 황실을 능가하는 정통성을 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하께서 좋아하실지는 모르잖습니까.”
“루카스 전하 말이냐?”
“예, 제겐 활발하고 친구 같은 영애가 좋다고 하셨는데. 말씀하신 영애와는 다를 것 같아서.”
제 아들을 보던 그레이스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정말로 네 아버님을 닮았다.”
“……예?”
애초에 루카스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더라도 마찬가지다. 이 당연한 사실을 어째서 사내들은 모르는 것일까. 그레이스는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