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여전히 어리석은 실비아는 잠시라도 참을 수 없는 듯 급하게 입을 열었다.
“도대체 누가 이간질을 한 거니? 숙모에겐 말해도 돼.”
그런 사람은 없었다. 실비아는 아직도 디아나를 어리게만 보는 모양이다. 왜 디아나 스스로 권리를 주장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걸까.
“디아나, 넌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재산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란다. 분명, 누군가의 말에 속은 거겠지? 하지만 디아나, 가족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자가 누구건, 네 유산을 탐내는 거란다.”
그러는 실비아의 눈빛에 오히려 욕망이 가득했다. 디아나는 웃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자리를 생각해 참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가족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뇨. 누군가 저를 부추겼다고, 그래서 제가 유산을 원하게 됐다고 생각하시냐고요.”
실비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어린 디아나가 아니었다. 언제 이렇게 자란 건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그야, 당연히…….”
실비아의 목소리엔 당혹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디아나는 잠자코 그런 실비아를 응시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런 디아나의 모습에 선대공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조금도 닮지 않은 둘이지만 실비아를 짓누르는 느낌이 비슷했다.
“디아나, 잘 들으렴. 네가 무슨 말을 누구에게 들었건 그건 잘못된 거야. 가족인 우리만큼 널 위하는 사람은 없어. 특히, 난 너를 딸처럼 여겨 왔다는 거 알잖니.”
정말 그랬다면 디아나는 텅 빈 공작저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지 않을 거다. 그 어린아이를 고용인들이 키우도록 내버려 둔 실비아가 아닌가.
“난 너의 미래를 위해서 많은 준비를 했어.”
“어떤 미래요?”
“그거야 당연히 너의 행복이지. 제국에 너처럼 고귀한 영애는 또 없어. 게다가 마침 황태자 전하도 너와 동갑으로 반려를 찾고 계시지.”
실비아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그녀가 짜 둔 미래의 계획이었다.
“물론, 경쟁자가 몇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내가 다 손을 써 뒀단다. 그리고 황태자 전하도 널 직접 보시면 경쟁자 따윈 잊으실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넌 아름답잖니.”
“어떻게 손을 쓰셨는데요?”
디아나는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알고 싶었다. 내용은 알고 있지만, 실비아가 정확히 어떻게 비열한 짓거리로 조카를 팔아넘겼는지 궁금했다.
“정말이지 정성을 다했단다. 선대공비 전하와 친분을 만들고, 네 이야기를 많이 들려 드렸지. 전하께서는 사적으로 황후 폐하의 언니 되시는 분이니 그 말이 전해지지 않았겠니?”
짐작대로였다. 실비아는 공작부인의 직함으로 사교계를 누비고 다녔고, 최종적인 목적은 개인의 영달과 자식의 출세였다. 디아나를 황태자비로 만들고 차기 황후의 외척이 될 목적이었을 거다. 물론, 그것이 이루어져도 외척으로서 세도를 부릴 수는 없다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여자다.
“그래서요?”
“그래서는 무슨, 너는 차기 황후가 되는 거야. 그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니?”
누구도 디아나의 행복을 바라지 않았다.
“곧 황태자비를 간택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당연히 그건 네가 될 거야.”
그것이 디아나가 불행한 황후가 된 과정이었다.
“그러니 이제 쓸데없는 문제는 놔두고, 신부 수업에 열중하렴. 어차피 입궁할 몸인데 유산이니 영지 관리니 그런 것은 영애가 할 일이 아니야. 나는 나쁜 소문이 돌아서 해가 될까 봐 걱정이란다, 늘. 시기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는 법이잖아.”
“그렇군요.”
디아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제야 실비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래가지 못할 미소였다.
“이제 숙모 말을 알겠지? 그래, 누가 너를 부추겼는지 알려 주겠니? 내가 해결해 주마.”
“음…….”
일부러 말끝을 늘이자 실비아는 속이 타는지 차를 마셨다.
“그런 사람은 없는데요.”
“……뭐?”
“처음부터 끝까지 저와 선친의 의지였어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숙모님.”
한 번 입을 연 디아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숙모님의 계획은 전부 실패했어요. 이제 포기하세요.”
“뭐? 너 지금…… 아니, 왜 갑자기 이렇게, 계획이라니? 난 너의 장래를 위해서.”
“숙모님의 미래를 위해서겠죠.”
디아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실비아를 내려다봤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저도 숙모님의 미래를 위해서 조언할 것이 있어요.”
“디아나, 너 지금 이게 무슨 태도니?”
“무슨 태도면 어때요. 숙모님께 아주 중요한 내용인걸요.”
실비아는 당혹스러운 나머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이대로 선대공비 전하께 가셔도 소용없어요. 물론, 그다음엔 황후 폐하께 가서 매달리실 생각이겠지만…… 그건 별로 좋지 못한 선택이 될 거예요.”
그로 인한 결론은 한 번 겪었다. 하지만 이제 디아나는 그때처럼 무력하지 않았다.
“네가 어른이라도 된 것 같니? 착각하지 마라. 넌 아직 보호가 필요한 영애고, 네 혼담을 주선할 권리는 내게 있어. 이미 모두가 널 황태자비 후보로 생각하고 있다고.”
“뭐, 그건 상관없어요. 정 원하시면 대공저든 황실이든 가서 애원하세요.”
무심한 말투였다.
“단, 그랬다간 숙모님도 죄인이 될 거예요.”
“뭐?”
이번에는 디아나가 한발 빨랐다. 실비아는 그것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실비아의 눈빛이 순간 흐려졌다. 그 멍청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디아나는 이 상황 자체가 우습게 여겨졌다. 디아나의 인생이 불행해진 원인은 많았지만, 결정적인 건 황실과의 혼인이었다. 그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 저리도 어리석은 여인이라는 것이 씁쓸할 지경이다.
“얼마 전에 선대공비 전하를 알현했어요.”
“그런…… 왜 내겐 말도 없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디아나가 선을 그었다.
“여러 의원에게 보인 결과, 저는 후계를 생산하기 어려운 몸이라는 것을 삼가 아뢰었거든요.”
“뭐? 그런 일을 어떻게 나와 상의도 없이. 아니, 확실치도 않고 그런…… 사실이니?”
“그게 중요한가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실비아는 디아나가 정말 불임이라고 해도 숨기고 황태자비로 만들 위인이었다. 그 후에 디아나가 받을 냉대와 위태로운 위치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중요한 사실은 선대공비 전하께 그 사실을 고했다는 거예요. 그건 돌이킬 수 없죠.”
“당장 가서 사실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마음대로 하시라고 했잖아요. 대공저에 가시든, 황궁에 가시든.”
디아나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래서 실비아는 이 현실이 더욱 믿기지 않았다.
“어쩌면, 숙모님 뜻대로 제가 황태자비가 될 수도 있겠죠.”
선대공비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아니, 디아나는 이제 누구도 섣불리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숨길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누군가 묻거든, 숙모님도 제가 후계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고 말할 거예요.”
“난, 나는 몰랐어! 그리고 확실치도 않은 얘기…… 누가 믿겠니?”
“이제 아시잖아요. 그 사실을 선대공비 전하도 아시고요.”
실비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모른다고 잡아뗄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선대공비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훗날 디아나의 증언에 힘이 실릴 것이다. 황실을 기만하는 행위는 중죄였다. 아무리 실비아라도 그 강을 건널 자신은 없었다.
“그만 돌아가세요. 그리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세요.”
디아나가 매듭을 지었다.
“죄인이 될 각오가 있으시다면요.”
실비아에게 그런 것은 없다. 그저 사리사욕에 눈이 멀고 권력을 탐하는 어리석은 여인일 뿐이다.
“그리고 제 유산 문제에 참여하고 싶으시다면, 법정으로 찾아오세요. 앞으로 한 번이라도 그 문제로 저택에 찾아오신다면, 제가 법정으로 초대해 드리겠어요. 죄인이 될 것인지, 주어진 것을 지킬 것인지는 숙모님의 선택이에요.”
이제 실비아에게 할 말은 없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숙모님.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랄게요.”
디아나는 넋이 나간 실비아를 보며 등을 돌렸다. 적어도 실비아와의 승부에선 디아나의 압승이었다.
***
실비아를 돌려보내고 잠시 휴식을 하던 디아나에게 뜻밖의 소식이 도착했다.
“……대공 전하가?”
“네, 다른 기별은 없었는데 왜 갑자기 오신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샬롯의 말에 디아나는 잠시 에드윈을 떠올렸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둘은 이 응접실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디아나의 생에서 유일하게 다른 색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것을 지금의 에드윈이 모른다는 것이 조금 씁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응접실로 모셔.”
“네.”
잠시 후, 응접실 문에 노크가 울렸다. 디아나는 일어선 채로 에드윈을 맞이했다. 하필 지금도 태양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석양의 빛이 디아나의 백금발을 비췄다.
에드윈은 선 채로 잠자코 그런 디아나를 보기만 했다. 커다란 에드윈의 체구가 우뚝 멈춰 섰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등 뒤로 아름다운 석양을 둔 채, 디아나가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에드윈에게 예를 갖췄다. 그제야 에드윈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기별도 없이, 무례를 저질렀군.”
사실 에드윈은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루카스에게 핀잔을 들을 만큼 평소 예의범절에 엄격한 그가 아무런 기별도 없이 영애를 방문한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놀랄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마침 티타임을 가지려고 했거든요.”
디아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이 차를 권하는 디아나의 태도는 에드윈이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정확히는 에드윈의 희망사항이 듬뿍 들어간 상상이었다. 그게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난, 그러니까…….”
에드윈은 여기까지 오면서 무슨 핑계를 댈지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중에선 썩 괜찮은 것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막상 입을 떼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디아나는 그런 에드윈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투명하고 푸른 눈동자에 에드윈은 더욱 생각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대공 전하를 따로 뵙고 싶었습니다.”
디아나의 맑은 목소리가 에드윈의 상념을 날렸다. 그는 검은 눈을 들어 디아나를 바라봤다.
“내 생각과 같군.”
“그래요? 우연이네요.”
잠시, 디아나가 소리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에드윈은 이 신비로운 영애에게 이미 마음을 빼앗겼다. 에드윈은 여태 연애라고 할 만한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내의 본능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에드윈은 처음 느끼는 감정이 낯설었지만, 세상에서 이 감정을 뭐라고 부르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정식으로 소개한 적은 없군. 나는 에드윈 체스터, 제국의 대공이다.”
“알고 있어요.”
디아나의 목소리가 맑아서 그 내용이 무엇이든 순수하게만 들렸다.
“그날 마주쳤던 인상이 꽤 깊어서.”
에드윈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서툴게 꾸미느니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은 정확했다.
“우연이군요, 저도 그런데.”
디아나가 싱긋 웃으며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그 미소가 에드윈의 입가를 풀어지게 만들었다.
“아…… 세간에서 카를가의 이야기가 많더군.”
이제야 에드윈은 오는 길에 생각했던 핑계 중 그나마 괜찮은 것을 떠올렸다. 조금 늦은 감이 있었지만, 다행히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주인공이 내가 만난 영애였다니, 조금 이야기를 듣고 싶어져서.”
“그랬군요.”
완전한 사실은 아니었다. 에드윈이 디아나를 본 첫 순간, 그녀의 가문은 중요치 않았다. 만일 디아나가 한미한 집안의 여식이었어도 에드윈은 오늘 그녀를 찾았을 거다. 운명은 그렇게 찾아오는 거였다.
“아름다운 숙녀라고 들었지만, 실물은 또 다르군.”
“제가 정말 숙녀라면, 전하와 이렇게 단둘이 티타임을 갖진 못했을 거예요.”
디아나의 말에 에드윈의 입가가 살짝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눈을 들어 대담한 말을 한 디아나를 봤다. 호기심과 흥미가 적당히 섞인 시선이었다.
그건 디아나가 아는 눈빛이었다. 지금의 생에서 다시 만난 에드윈도 여전히 연심을 담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사실에 얼마나 안도감이 드는지, 아마 그는 모르겠지만.
“허를 찔렸군.”
“네, 이게 놀이였다면 제게 한 점을 내어 주신 겁니다.”
싱긋, 디아나가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첫인상으로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면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마치 인형 같은 영애였기에 막연히 말수가 무척 적거나 온실 속의 꽃처럼 가꿔진 느낌이 들 것이라고 상상했다. 물론 디아나의 태도는 차분했고 품격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디아나가 짓는 미소엔 확실히 생기가 있었다.
“인정하지.”
에드윈은 그대로였다. 디아나의 눈동자에 누구도 모를 애수가 찰나 스쳤다. 에드윈은 이번 생에도 같은 감정에 빠진다. 디아나는 그런 에드윈의 모습을 잠시 제 눈에 담았다. 에드윈은 그대로였다. 디아나가 한 번 죽음을 맞이하고 열여덟이 되어 깨어난 후였음에도 그랬다.
아니, 오히려 좋은 방향의 변화는 조금 있었다. 가뜩이나 건장했던 체격이 더 탄탄해졌고, 깊은 눈매에 남자다운 온기가 배었다.
그 죽음 이후로 달라지지 않은 것은 에드윈 한 명이었다. 그때와 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같은 요청을 하는 그를 보자 문득 그리운 기분마저 들었다. 은은하게 에드윈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 이런 즐거운 게임을 계속할 수 있다면.”
그의 말에 디아나가 미소를 유지했다. 지금의 에드윈은 그때 만났던 에드윈이 아니었다. 기억은 디아나에게만 존재한다. 그래도 디아나의 마음은 같았다.
“이렇게 시작되는 우리의 관계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슬쩍, 에드윈이 부드러운 수작을 걸었다. 그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이번엔 디아나도 조금 짓궂어지기로 했다.
“지인이 어떨까요?”
“지인?”
“네. 서로를 알아 가는 사이죠.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요.”
“또 한 방 먹은 건가.”
“아뇨.”
그 말에 에드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인이라.”
그러고는 디아나를 응시했다. 검은 눈동자엔 여러 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도 좋겠군.”
정말이지, 에드윈은 변하지 않았다.
“……당분간은.”
첫 만남은 달라도, 인연의 흐름은 같았다. 몇 번이고 반복되며 온통 무채색이었던 디아나의 삶에서 에드윈의 존재는 유일하게 강렬한 색채를 갖고 있었다.
“좋아요.”
에드윈은 유일하게 디아나가 결론짓지 못한 남자였다. 누구보다 디아나가 마음을 준 상대였지만, 그의 곁에 머무를 시간은 짧았다. 이번 생에서 바꾸고 싶은 것 중 가장 큰 미래였다.
“영애가 좋다면, 나도 좋은 일이지.”
문득 에드윈이 몸을 일으켜 천천히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맑은 바람과 함께 에드윈 특유의 짙은 체취가 풍겼다. 디아나는 그 순간을 고스란히 느꼈다. 회색의 세계에서 에드윈만이 디아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우선, 나란히 걸어 보는 건 어떨까. 지인이 된 기념으로 말이야.”
에드윈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마치 무도회에서 왈츠를 청하는 것처럼 기품 있는 동작이었다. 디아나는 그 손을 보다가 살짝 손끝만 댄 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기꺼이.”
디아나의 답에 에드윈은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왠지 그의 목소리가 기억보다 더 낮게 느껴졌다. 이제부터 알아 가야 할 것은 사건만이 아닌 사람도 있었다. 디아나는 문득, 그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대공저에서 처음 봤을 때도 일몰 무렵이었지.”
디아나는 굳이 기억하고 있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랬나요?”
에드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선명히 그의 가슴에 박혔는지는 아무리 말로 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에드윈은 그런 것을 말로 할 만큼 뻔뻔한 남자가 못 됐다.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그 말에 에드윈은 모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건 기억이 아니라 각인에 가까웠다.
“잊기 어려운 모습이지.”
“어떤…… 면에서요?”
디아나가 의아한 눈으로 에드윈을 봤다.
“그날, 대공저를 나서는 영애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곧다는 생각을 했어.”
그런 것까지 지켜봤던 건가. 에드윈의 시선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그의 마음은 얼마나 깊은지, 아직은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지, 그 모습이 좋았다. 나와 비슷하다고 여겨서일 수도 있고.”
에드윈은 속 깊은 눈동자로 묵묵히 앞을 응시했다.
“혼자서, 너무도 영광스러웠던 선친의 이름을 이어야 한다는 무게감.”
어렸던 에드윈은 대공저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에드윈의 부친인 선대공은 위대한 인물이었다. 수많은 가신과 대공가에 얽힌 관계, 그리고 어머니까지 모든 기대를 에드윈에게 돌렸다.
“카를가의 사정은 이미 들었다. 영애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더군.”
“과찬이십니다.”
디아나는 혼자라고 했다. 저 여린 체구에 그런 강인함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제롬의 보고서엔 디아나가 해낸 일들과 앞으로 해낼 것들이 적혀 있었다. 에드윈은 그 보고에서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서도 디아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겸손은 필요 없어. 이미 영애가 해낸 일들을 들었다.”
“일부러 제 이야기를 알아보셨나요?”
“그래. 호기심이 들었거든.”
솔직한 대답에 디아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전하는 정직하시군요.”
“단지, 핑계를 대는 것이 서투른 것이다.”
그때와 똑같았다. 디아나는 그런 에드윈의 모습에 마음 어딘가가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에드윈은 그 말을 하곤 걸음을 떼었다. 디아나도 몇 걸음 그를 따라 걸었다. 석양이 아름답게 정원을 물들이고 있었다.
“어때, 이 정도면 제대로 알아 가고 있는 것이 맞나.”
서툴고 투박한 질문이었다. 디아나는 그런 에드윈을 보다가 한 걸음을 더 뗐다.
“글쎄요.”
저물어 가는 해에 디아나의 옆얼굴이 도드라졌다.
“저도 지인은 처음이라서요.”
그러고는 돌아선 디아나가 멋대로 몇 걸음을 앞서 걸었다. 처음 에드윈이 봤던 그 작은 등은 여전히 곧았다.
어떤 예감이 드는 순간이 있다. 지금처럼. 막연하지만, 분명하게 가슴을 두드리는 어떤 예감. 에드윈은 그런 예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