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 무렵 트리샤는 한없는 구덩이 같은 우물에 허리를 숙인 채 매달려 물을 긷고 있었다. 그나마 달빛이 있어서 완전한 암흑이 아니었지만, 키가 작은 트리샤가 우물에 허리를 숙일 때면 그 심연이 다가와 자신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갈 것처럼 느껴졌다.
“하루라도 쉬어 봤으면…….”
열여덟인 트리샤에겐 집안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이 너무 무거웠다. 차라리 사내아이였다면 몸을 쓰는 일이라도 했을 텐데, 아버지는 늘 그 소리를 하며 트리샤를 경멸의 눈초리로 봤다. 쓸모도 없는 계집아이. 제 어미를 닮아서 천박한 붉은 머리카락이라고.
“하긴, 내 주제에.”
실소가 나왔다. 물을 다 길었으니 이제 집 안으로 옮겨야 했다. 그리고 제 몸보다 거대한 솥에 물을 끓여 약초를 데쳐야 한다.
종일을 일해도 트리샤에겐 쉴 시간이 없었다. 낮엔 남의 집 일을 도우며 품삯을 받아 왔고, 밤엔 어머니의 지시대로 약재상에 공급할 약재를 손질해야 했다.
“공부라도 하루 쉬면…… 좋을 텐데.”
제 나이다운 소망이었다. 어머니는 당장 생계엔 도움도 되지 않는 약초학을 외우라고 강요했고 가끔 검사해서 신통치 않은 결과가 나오면 자신의 병을 내세워서 죄책감을 주며 책망해 댔다. 어떨 때는 차라리 아버지에게 맞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누나, 누나!”
트리샤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한창 말썽 피우기 좋은 여덟 살의 남동생이 정신없이 그녀를 찾아 댔다. 남동생의 육아도 물론 트리샤의 몫이었다.
“니콜라, 잘 시간이라니까.”
“아직 잠 안 온단 말이야!”
고작 여덟 살 된 니콜라가 트리샤의 마음을 알아줄 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오늘도 트리샤는 니콜라를 데리고 나머지 일을 시작했다.
니콜라가 자신만큼 자라면 그나마 가세도 나아질 것이다. 어찌 보면, 어린 트리샤의 희망은 더 어린 니콜라였다. 바로 그게 절망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놓을 수가 없었다.
“니콜라, 옛날에 옛날에 해님과 달님이 있었어…….”
트리샤는 어린 동생을 재우기 위해 자신도 잘 모르는 동화 속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어차피 니콜라는 관심도 없었지만.
“달님은 너무 아름다워서 모든 신과 요정의 사랑을 받았고.”
무거운 나무 주걱을 저으면서도 트리샤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해님은 늘 불에 타고 있어서 무척 흉측하고 초라해서 모두가 외면했대.”
그것은 트리샤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달님은 고요하고 어두운 밤에 살며시 나와서 부드러운 빛으로 아름답게 반짝였어. 달님은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났어. 까만 밤에 은은하게 비추는 달님의 빛을 모두가 사랑했어. 그래서 달님의 빛엔 아무도 그림자를 만들지 않기로 약속했대. 신과 요정들 전부가 말이야…….”
어둠 속에선 한 줄기 빛만 비쳐도 선명하다. 은은한 달빛이 그랬다. 그 고아한 빛에는 그림자조차 드리우지 않았다.
“하지만 해님이 오면 신도 요정도 일해야 했어. 그러기로 오래전에 약속이 됐거든. 신과 요정들은 점점 해님이 싫어졌어. 해님은 보기 흉한 붉은색으로 너무 뜨거운 빛을 냈거든.”
실은 트리샤도 해가 뜨는 것이 싫었다. 또다시 사람들에 치이고 일에 치이고 초라해진 모습이 너무 분명히 보이게 되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그래도 해님은 열심히 일했어. 그런데 신과 요정들은 그림자를 만들어서 몰래 숨어 버렸어. 해님은 그때 알았어. 모두 자신을 싫어하는구나,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이미 트리샤를 보던 니콜라는 졸고 있었다. 그래도 트리샤는 계속해서 나무 주걱을 저으며 읊조렸다. 자신조차 결말을 알지 못하는 이상한 이야기를.
“해님은 너무너무 궁금했어. 도대체 달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빛이 얼마나 은은한지.”
이제 약초가 거의 다 익었다.
“그리고 어느 날, 달님을 만났어.”
문득 트리샤의 손길이 멈췄다.
“달님은 정말로…… 아름다웠어.”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디아나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과 경이로움, 잠시 디아나의 곁에서 엿볼 수 있었던 상류층의 동화 같은 세상과 아름다운 것들, 트리샤가 꿈꿀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욱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그래, 너무나도…… 너무나도 아름다웠어.”
신분의 격차 때문인지 초라한 트리샤의 모습 때문인지 디아나는 자신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꿈같은 시간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트리샤는 이제 디아나의 세상을 엿볼 수조차 없었다.
현실은 그런 것이었다. 한때 맞잡았던 디아나의 손은 여전히 뽀얗고 부드러울 거다. 지금 트리샤의 거친 손으로는 감히 잡지도 못할 만큼.
“그냥…… 꿈을 꾼 것 같았지.”
이제 약초를 건질 시간이 됐다. 니콜라를 잠자리에 누이고 이 약초를 걷어서 정돈하면 긴 하루가 끝날 것이다.
“꿈이었어.”
그러나 이제 트리샤가 꿈을 꾸는 일은 없다. 지친 몸을 자리에 누이면 바로 꿈을 꿀 여유도 없이 잠에 빠질 것이고, 눈을 뜨면 새로운 날이 밝아온다. 그렇게 트리샤는 현실에 지쳐 점점 꿈을 잊어 가고 있었다.
***
대공저의 서류를 살피던 에드윈은 한참 같은 줄을 응시하다가 이내 일어서 정원으로 나갔다.
선대공비인 그레이스는 이제 장성한 에드윈에게 대공저 업무 대부분을 위임했다. 선대공의 이른 죽음으로 기울었던 대공저의 미래를 걸고 키워 낸 에드윈은 금세 제 역할에 적응해서 그레이스를 기쁘게 했다.
“후…….”
그런 에드윈도 집중력이 떨어지는 때가 있었다. 매사에 무던한 그로선 드문 일이었다. 사실 원인은 루카스가 아닌 디아나였다. 다만 에드윈은 그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전하.”
하릴없이 정원을 맴도는 에드윈에게 시종장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자가 왔습니다.”
아까부터 서류에 집중할 수 없던 이유였다. 에드윈은 고개를 끄덕이곤 응접실을 향했다. 에드윈이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던 제롬이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에드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롬의 황금빛 눈을 주시했다. 그에게는 여러 별명이 있었으나 확실한 것은 신용이 있고 유능하단 것이다. 선대공비 그레이스도 그의 고객 중 하나였으니 그의 능력엔 의심이 없었다.
“이것을.”
제롬이 봉투를 건넸다. 에드윈이 알고 싶어 했던 정보에 대한 자료였다. 에드윈은 평소와 달리 다소 급한 손길로 그 봉투를 낚아챘다.
“보수는…….”
“이건, 그냥 서비스로 생각해 주십시오.”
싱긋, 제롬이 웃었다. 그간 선대공비에게 받은 보수는 꽤 후했다. 게다가 이번 일은 제롬도 흥미가 있었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대공이 갑자기 자신의 다른 고객인 디아나 카를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 그 정보 자체가 곧 보수였다.
“아니, 빚을 지고 싶진 않다.”
에드윈이 눈짓하자 시종이 제롬에게 돈이 든 주머니를 건넸다.
“그럼, 사양치 않겠습니다.”
제롬이 씩,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먹음직스러운 수수께끼가 생겼다.
“아, 그리고.”
에드윈이 입을 열었다. 제롬은 이미 그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
“제 모든 고객은 각각의 개인으로서 제겐 늘 비밀보장의 의무가 있지요.”
선대공비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아니 누구도 알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에드윈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제롬은 대공저에 들어왔을 때처럼 재빠르게 남의 눈을 피해 떠났다. 곧 에드윈과 봉투가 남겨졌다.
“디아나 카를.”
이름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첫 만남의 석양이 떠올랐다. 에드윈은 자신이 누군가의 신상을 조사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정도로 타인에게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에드윈이 스스로 제롬을 불러들여 비밀로 디아나 카를에 대한 조사서를 받았다. 자신으로서도 혼란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봉투를 여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사촌인 루카스의 반려가 될지도 모르는 영애였다. 루카스를 위해서 미리 알아보려고 했다는 변명은 무색할 것이다. 에드윈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변명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래, 에드윈은 그저 알고 싶었다. 디아나 카를을.
그날, 저물어 가는 석양을 받으며 반짝이던 아름다운 영애를.
***
디아나가 집무실에 앉은 모습이 퍽 익숙해졌다. 빛나는 백금발을 반 정도 땋아서 뒤로 넘기고 드레스 자락의 소매를 걷은 채 문서를 살피는 모습에서 소녀의 티는 전혀 없었다. 푸른 눈동자는 한 글자 한 글자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가씨, 오늘도 공작부인께서 찾아오셨어요.”
샬롯이 차를 내려놓으며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디아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리 걱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숙부님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모양이네.”
아론은 강경한 태도로 형님의 유지를 잇겠다고 나섰다. 그러니 실비아가 매일 디아나를 찾는 것이리라.
“내가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하시는 걸까?”
“그럴 리가요.”
디아나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는 실비아를 적이라고 여긴 적이 없었다. 실비아에겐 그런 힘이 없었다. 그저 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서 현실에 눈을 뜨지 못한 어리석은 여인일 뿐이다.
“하지만, 정리해 둘 필요는 있겠어.”
마침, 오늘 오전에 도착한 초청장이 책상 위에 있었다. 황실 무도회였다. 디아나의 신분을 가늠할 때 불참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자신의 위치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실비아도 그중의 하나였다.
“네, 아무래도…… 보기에 좋진 않은 데다 고용인들이 곤란해하니까요.”
“아, 모두 고생했겠네.”
디아나는 이미 정리가 끝난 문서가 쌓인 곳을 봤다. 저 높이만큼, 실비아의 손에 있던 재산이 디아나에게 넘어왔다. 아론은 자청해서 공작으로서의 재산을 정리했고, 제롬은 유능함을 발휘해서 법적인 절차를 밟아 나갔다.
아직 남은 것이 더 많았지만, 실비아로선 속이 타들어 가는 성과일 것이다. 이대로면 모든 것이 디아나의 손에 떨어질 것이 자명하니 말이다.
“오랜만에 숙모님께 차라도 한 잔 대접할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한 번은 해야 할 일이었다.
“샬롯, 잠시 후에 응접실에서 티타임을 갖겠어. 그렇게 전해.”
“네, 아가씨.”
혼자 남은 디아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실비아가 문제 되는 것은 유산 때문이 아니었다. 실비아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디아나의 정당성과 아론의 협조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실비아가 디아나의 운명에 크게 관여하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황태자비 후보로 디아나를 강력하게 추천한 것이다. 디아나는 그것을 막아야 했다.
***
잠시 후, 디아나는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대외적으로는 병에 걸려 요양을 한다고 해 뒀지만, 굳이 병색을 가장하지도 않았다. 실비아에게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한 탓이다.
“디아나! 세상에…… 이게 얼마 만이니!”
디아나가 응접실로 들어서자마자 높은 실비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디아나는 눈살을 찌푸리는 대신에 덤덤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내가 얼마나…… 아니, 됐다. 너도 사정이 있었겠지.”
실비아는 늘 성미가 급했다. 디아나는 그런 실비아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상황이 난리도 아니구나. 어떻게든 널 직접 만나서 바로잡으려고 내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래, 이제라도 만나서 다행이다.”
디아나가 인사 한마디 건네기도 전에 실비아는 도대체 몇 마디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간 무슨 사정이 있던 건지, 이 숙모에게 털어놓으렴.”
“몸이 안 좋았어요.”
겨우 디아나가 답을 하자 실비아의 표정이 답답함에 흐려졌다.
“그거 말고, 숙모에겐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
실비아가 간곡한 투로 말했다. 디아나는 그 말에 조금 의아한 눈빛을 할 뿐이다.
“나도, 네 숙부도 선대의 유지를 이어서 널 지켜 왔어. 앞으로도 물론 그럴 거란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니까 말이야.”
이제야 대충 감이 잡혔다. 실비아는 역시 현실을 파악하는 감각이 둔한가 보다. 디아나의 아름다운 입꼬리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