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제롬이 멋들어진 콧수염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대화도 수임료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알고 있어요.”
싱긋, 그제야 웃음을 지은 제롬이 자리에 앉았다.
디아나는 제롬에게도 퍽 신기한 존재였다. 처음엔 공작가의 영애가 누군가의 부추김으로 재산을 찾으려 한다는 생각을 떠올렸던 그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디아나는 누군가의 조종을 받지 않고 제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제롬이 평가할 때 꽤 고단수였다. 보수를 받으면서 이 신비로운 영애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제롬 경은 이미 나의 의뢰를 많이 맡아 줬죠.”
“제게도 좋은 거래였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하고 있고요.”
“난 제롬 경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어요.”
“그런가요? 보통은 원망도 자주 듣는 편인데요.”
사람의 마음이란 요사스러운 것이다. 일을 이루기 전엔 보수를 주겠다고 호언장담해도 막상 일이 처리되고 나서 보수를 제하고 제 몫이 얼마 되지 않는단 사실을 깨달으면 제롬을 사기꾼 내지는 폭리를 취하는 수치도 모르는 자라고 비난했다.
“나는 아니에요. 경은 약속된 보수를 받고 날 대신해서 확실하게 일을 처리해 주죠. 그보다 좋은 거래 상대는 없어요.”
“영애께서는 가끔 제 상식을 초월하시는군요.”
사실, 타인에게 대가로 치를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쉽고 간단한 것이 돈이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른 채로 죽었다. 이제 열여덟이고 공작저에서만 살았던 영애가 알기엔 어려운 개념이었다.
“앞으로 하는 이야기는 더 그럴 거예요.”
“흥미가 동하는데요?”
“다시 한 번 확인하죠. 제롬 경과 나의 독대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비밀입니다. 이미 영애와 저 사이엔 비밀유지 조항이 체결됐으니까요.”
그것은 변호인으로서 제롬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기도 했다. 또한, 제롬 개인의 원칙이었다. 이런 일을 하면서 오래 살기 위해선 입이 무겁지 않고는 곤란했다.
“그럼, 이야기를 해 보죠.”
디아나가 천천히 입을 뗐다. 제롬은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방에서 막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아름다운 영애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기대와 흥미가 반씩 섞인 눈빛이었다.
***
디아나는 자신이 아는 것을 타인도 전부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교만은 버렸다. 사람에겐 각기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의 틀이 있었다. 그리고 대화나 거래를 위해서 반드시 모두가 진실을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즉, 요령을 깨우친 것이다.
“우선 이것을.”
책상 위로 디아나가 봉투를 내밀었다. 제롬은 일어서서 그것을 가져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지금 확인해 봐요.”
그 말대로 제롬이 내용을 살폈다. 집사장 그레이의 보고서였다. 트리샤를 감시하라는 지령에 충실하게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적혀 있었다. 불행한 가정환경과 애매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꿈을 잃지 않은 소녀에 대한 기록이었다.
“제롬 경의 생각을 듣고 싶군요.”
“흐음…… 묘한데요.”
제롬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미 그의 금빛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빛났다.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소녀군요. 다소 불행하긴 하지만, 세상엔 불행이 더 흔한 법이니까요.”
마지막 말은 어느 정도 디아나를 겨냥한 것 같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디아나 혼자의 생각이었지만 제롬은 불필요한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자다.
“그 점은 나도 이해해요.”
“아…… 뭐, 영애는 영명하시니.”
제롬의 저의가 확실해졌다. 하긴, 세상에서 보는 디아나는 불행과 거리가 멀었다. 비록 부모님을 어린 나이에 잃기는 했지만, 진짜 비참함을 알지는 못할 환경이었다. 작은 손은 펜보다 무거운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수도의 뒷골목조차 본 적이 없으니 그것도 사실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음…… 이 보고서가 참 묘하다는 데까지 말씀드렸나요?”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샤 블랑이라는 소녀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적어도 지금 이 보고서에 적힌 부분까지는요. 하지만 영애께서 이 소녀에 대한 보고서를 받아 보신다는 점, 그리고 굳이 제게 보수를 내 가며 의견을 묻는다는 점이 특이하군요.”
과연 제롬은 이야기가 빨랐다.
“즉, 흔한 불행을 지고 있는 이 소녀에게 영애가 주목할 만한 점이 숨겨져 있다는 뜻인데.”
그리고 영민하다.
“그것을 제가 알아 오면 되는 걸까요?”
디아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긍정의 의미였다.
“힌트는 없습니까?”
잠시 닫혀 있던 디아나의 입이 열렸다.
“이 건에 대해선 경의 상식을 내려놓아 줘요.”
제롬의 얼굴에 드물게 놀란 기색이 어렸다. 약간의 당혹감 혹은 그냥 놀라움 자체였다. 볼수록 신기한 영애였다. 저 신분이면 매우 오만하고 고압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디아나는 늘 적당한 선을 지키며 예의를 갖췄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말이다.
“경은 영민하니, 실마리를 찾다 보면 내 말을 이해해 줄 거라고 믿어요.”
씨익, 제롬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디아나는 신분을 내세우지 않고도, 저리 부드러운 화법을 구사하면서도, 제롬이 상대했던 어떤 귀족보다 위압감이 있었다. 동시에 제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마치 계산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오랜만에 설레는 의뢰군요.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마워요.”
제롬은 지체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건 그냥 서비스로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만.”
디아나가 의아한 눈빛으로 제롬을 봤다.
“제가 대문을 지나쳐 올 때, 카를 공작부인께서 신랄한 욕설과 함께 난동을 부리고 계셨습니다.”
“역시, 서비스군요.”
아직 모든 것이 디아나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디아나의 선친에 대한 각별한 정을 가진 아론은 몰라도, 그의 부인인 실비아는 지금 디아나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굳이 돈을 지불하고 싶을 만한 정보는 아니네요.”
싱긋, 디아나가 미소를 지었다. 제롬은 재빠르게 제 생각을 고쳤다. 디아나는 실비아를 적으로 인식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그 교양 없고 성마른 부인은 눈앞의 영애에게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네, 제가 생각해도 영양가가 없었네요.”
제롬은 인정이 빨랐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목적지를 알리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 혼자 남은 디아나는 그제야 식은 차를 음미했다.
“조금, 서둘러야겠어.”
마음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이전의 생에선 고작 밀크티 하나를 음미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시간을 보냈다. 그것이 하찮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또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
“이젠, 선두를 내어 주지 않아.”
지금의 디아나에게 필요한 것은 감성이 아닌 현실감각이었다. 운명은 시작됐다. 악연은 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디아나는 앞을 봐야 했다.
***
저녁, 디아나는 저택의 중요한 사람들을 모았다. 그레이 집사장과 샬롯이었다. 장소는 일부러 아버지의 집무실이었던 방으로 정했다. 그들에겐 각별한 곳이다.
“그레이 집사장, 그리고 샬롯.”
디아나는 자신의 편을 한 명씩 차분히 들여다봤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측근이다. 단 한 명이라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차이다.
“모두 알다시피 최근 공작저에 변화가 많았어. 하지만 앞으로는 더 많은 게 변할 거야. 어쩌면 모두 이곳을 떠나게 될지도 모르지. 내가 선친의 유지를 잇게 될지,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몰라.”
“아가씨, 그런……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레이 집사장이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거야.”
디아나는 수많은 일을 했지만, 아직 무엇도 확실한 결론을 얻지는 못했다. 즉,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뜻이었다. 그전에 누가 자신의 편인지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디아나를 평생 섬겨 온 측근이라고 해도 말이다.
“두 사람을 부른 것은……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야.”
“마침표……라니요?”
이번엔 샬롯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둘은 나의 선친을 섬기던 사람들이지.”
“예. 저희는 카를가에 충성을 맹세한 자들입니다.”
“그래요, 아가씨.”
그들의 충성심은 진짜였다. 하지만 디아나에겐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카를가의 후예로서, 이 자리에서 두 사람과 카를가의 모든 약속과 계약을 해지하겠어.”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두 사람은 디아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게 무슨…….”
“그대들이 충성을 맹세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선친이다.”
그러나 보통 한 번 충성을 맹세한 가문을 계속 섬기는 것이 상식이었다. 디아나가 지금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그 관계를 이 자리에서 끝내겠어.”
가문의 주인과 가신의 관계는 흥망성쇠를 같이했다. 그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어느 한쪽의 죽음이나 배반뿐이었다.
“지금, 저희더러 떠나라는…… 그런 말씀은 아니시겠죠?”
“아가씨, 저희의 잘못이 있으면 꾸짖어 주십시오.”
디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대들이 충성을 맹세한 선친은 이제 없다.”
카를가에는 남겨진 유산이 상당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존재였다. 디아나는 그들을 유산의 일부로 여겼다.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사람은 유산이 될 수 없다.
“그런다고 아가씨를 향한 충성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레이의 말에 디아나는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불안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아가씨를 떠나서 살 수는 없어요. 아가씨를 지키는 게 제게 주어진 소명인걸요.”
그러나 그것을 명한 자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선친이었다. 디아나는 내내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디아나는 어렸고, 가신들은 선친의 그림자를 대신하듯 디아나를 보호하는 데 주력했다.
여태까지는 그것이 디아나의 행운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디아나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더욱…… 두 사람 모두 선친과의 약속과 계약을 끊어 줘.”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는 고요했다.
“그리고 나의 가신이 되어 주길 바란다.”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두 사람은 디아나의 뜻을 깨달았다.
샬롯은 가만히 울음기를 삼켜야 했다. 더는 자신들이 키워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둘은 카를 공작 내외와의 약속을 지켜 냈다. 디아나를 어엿하게 키워 낸 것이다.
그레이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샬롯과 비슷한 것을 느꼈다. 공작 내외의 하나 남은 여식은 이리도 훌륭하게 자랐다. 그들은 사명을 다한 것이다.
“나의 선친이나, 지나간 카를가의 영광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 디아나 카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가신이 되어 준다면 나는 평생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잠투정하던 어린 소녀는 없었다. 가끔 엉뚱한 질문을 하던 아이도 없다. 디아나는 이미 가주의 위엄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기른 아이가 아니라, 카를가의 정당한 후예였다.
“저 역시 자랑스럽게 여기겠습니다. 제 충성은 카를가의 새로운 주인이신 아가씨의 것입니다.”
그레이가 충성의 징표로 무릎을 꿇었다. 그는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한때는 카를가의 아래에서 목숨을 바치던 기사단 출신이었다. 선친이 그를 굳게 믿었던 이유다.
“이 영광은 잊지 않겠습니다. 평생, 아가씨를 따를 겁니다.”
샬롯도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다.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었다. 선친에 대한 의리나 가문에 대한 충성을 떠나 디아나 본인을 주인으로 여기고 따르라는 뜻이었다.
“고맙다.”
디아나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그레이, 그리고 샬롯.”
이제 디아나는 그들의 직책을 부르지 않았다. 그저 이름을 부르면 된다. 자신의 가신이기 때문이었다.
“난 그대들을 믿는다.”
아무도 모르는 고요 속에서, 카를가의 진정한 주인이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