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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42화 (42/184)

42화

지친 하루를 마친 디아나는 촛불을 켠 탁자 앞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이미 처음 이 책으로 들어왔을 때 황후로 2년, 열일곱으로 회귀해서 아주 잠시, 그리고 또 열여덟의 디아나가 됐다. 게다가 회귀에 걸린 제약도 깨달았다. 그렇기에 모든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자신의 선택에 따라 미래가 급변할 수도 있었다. 지난번의 삶과 고작 한 살 차이였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피안이 세계에서 원작의 디아나를 만났고, 둘의 영혼은 하나로 묶였다. 그녀가 살아야 했던 무수한 생과 고통, 상실감은 지금의 디아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트리샤 블랑.”

그 이름을 발음하자 증오가 같이 따라왔다. 디아나는 열일곱의 나이에 무방비로 트리샤의 독에 당해서 죽어 가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것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디아나는 극약에 의해 신체의 자유를 빼앗겨 표현조차 못 하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로 독이 온몸에 퍼져 죽어 갔다.

“……강해져야 해.”

그때의 고통을 몸이 기억하고 있는지, 손이 덜덜 떨렸다. 대개 죽음은 끝을 의미했다. 하지만 디아나에겐 아니었다. 다시 살아서 제 죽음을 떠올려야 하는 것은 무척이나 피폐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떠올려야…… 해.”

디아나가 떨리는 손을 꾹 눌렀다. 그 고통스럽고 증오스러웠던 기억의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떠올려야 한다. 트리샤가 무심결에 남긴 단서를 찾아야 한다.

“이번엔, 지지 않아.”

디아나는 이 고통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했다. 이제 망설임은 없었다.

***

디아나의 숨결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자 촛불이 일렁였다. 지금 디아나는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제 죽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운명은 디아나와 트리샤를 단둘이 남겼다. 그때야 트리샤는 디아나를 내려 보며 제 순수한 욕망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것은 디아나를 증오에 사무치게 했지만, 지금에 와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붉은 마녀의 피…….”

트리샤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디아나의 죽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승리를 성급하게 판단하고 내뱉은 자만심에 가득한 한마디였다. 그것은 지금 디아나에게 엄청나게 큰 의미가 된다.

‘난 미천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덕분에 뭐가 중요한지 잘 알았거든. 게다가 내게도 붉은 마녀의 피가 흐르고 있었어. 그나마 너랑 비슷하게 게임을 할 정도의 능력이었지.’

순간 트리샤의 목소리가 똑똑히 떠올랐다.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트리샤가 붉은 눈동자로 자신을 기만할 때, 온몸으로 퍼지던 독의 느낌이 생생했다.

“그래, 이유가 있었던 거야.”

아무리 트리샤가 영악하다 한들 열일곱이었다. 게다가 이 세계에서 신분의 격차는 절대적인 것이라서 트리샤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극복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지난 생의 디아나는 방심하고 말았다. 자신은 원작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며 내면은 성인이었기 때문에 영악한 소녀 하나쯤은 이길 수 있다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나 역시도 자만했어.”

그래서 패배했다. 애초에 디아나는 편협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은 책 속의 이야기에 끌려 들어왔고, 그 책에선 회귀가 일어난다. 이미 책으로 끌려 들어온 데다 회귀까지 일어났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도 상식이라는 것을 버리지 못했다. 적당히 트리샤와 루카스를 떼어 내고 에드윈의 연인으로 평안한 여생을 살려고 생각했다는 것부터 이미 패배였다.

“붉은 마녀의 피가 있었기에…… 그나마 나와 대등할 수 있었다.”

디아나는 트리샤가 오만하게 남긴 단서를 곱씹었다. 어느새, 손의 떨림이 잦아들고 있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 게다가 회귀를 하는 과정에서 원작 디아나와 영혼이 섞여 버렸다. 그 아픔, 그 서러움, 그 상실감…… 그건 자신이 겪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트리샤는 어떤 상식을 벗어난 힘을 가졌던 거야. 미약…… 그래, 분명히 미약이라고 했어.”

뒤늦게 루카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리샤라는 애칭을 부르며 환하게 웃던, 주위는 돌아볼 줄도 몰랐던 어리석은 황제의 모습도.

그 일부는 분명 루카스 자신이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트리샤가 제 입으로 루카스에게 미약을 사용했다고 고백했으니.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미천한 트리샤가 루카스를 차지했던 것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디아나가 눈썹을 찡그렸다. 트리샤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반드시 해야만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머릿속에서 트리샤의 가증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었어. 왜, 그때도 지금도 너에게만 미약이 듣지 않는 걸까?’

그때도 지금도. 그것은 원작의 디아나와 자신 모두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트리샤의 미약에 디아나만은 면역이 있다. 그것은 앞으로 중요한 사실이 될 터였다.

디아나를 제외한 모두가 트리샤에게 놀아나고 있었다. 루카스는 미약과 주술로 트리샤가 자신의 아이를 뱄다는 말을 믿었고, 그것을 해치려 했다는 모함을 받은 디아나를 경멸했다.

물론 그 나머지의 끔찍하고 역겨운 짓거리를 한 것은 루카스 본인이었으니 동정의 가치는 없었다.

“붉은 마녀에 대해서 알아내야 해.”

디아나는 바로 해야 할 일을 정했다. 트리샤는 그것을 제 미천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즉, 단서는 트리샤의 모친에게 있었다.

“아니.”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트리샤는 처음부터 마녀의 힘이 있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만일 처음부터 힘이 있었다면 루카스를 만난 이후로 바로 그를 홀렸어야 했다. 하지만 아니었기에 트리샤는 그렇게 힘겹게 고군분투하면서 제 자리를 만들었다.

“뭔가…… 아직 내가 모르는 것이 있어.”

어떤 의문은 풀렸지만, 다시 새로운 의문이 찾아왔다. 그 모든 것이 곧 다가올 위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끔찍한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널…… 증오해.’

독으로 죽어 가던 디아나는 간신히 그 말을 뱉었다.

‘알아. 하지만 난 널 사랑했었어.’

트리샤의 말은 기만이 아니었다. 그 순간, 붉은 눈동자에 고였던 것은 분명 진심이었다.

‘이젠 내가 네 역할을 대신할 거야. 이번에야말로.’

그 말을 떠올린 순간, 디아나는 헉하고 숨을 내뱉었다. 긴 악몽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떠올라 디아나의 기억이 됐다.

“그래, 그랬어…….”

디아나는 처음부터 착각하고 있었다. 트리샤의 욕망은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붉은 눈동자는 애초에 황후의 관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모두의 착각이었다.

“트리샤가 원했던 건.”

황태자비도 황후도 아니었다. 트리샤가 되고 싶었던 것은 처음부터 디아나였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디아나는 황태자비 후보에서 벗어나면 트리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그래서 디아나는 트리샤의 손에 살해당한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가진 모든 것이었어.”

디아나 카를.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신분을 갖고 모두의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공작가의 영애. 일렁이는 백금발과 푸른 호수처럼 고요한 눈동자, 한 번 보면 누구도 쉬이 눈을 떼지 못하는 요정의 축복을 받은 것 같은 미모와 천사 같은 성정.

모두가 보살펴 주고 싶어 하는 존재, 동시에 모두가 동경해 마지않는 존재.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받았고, 그것이 당연한 것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트리샤가 되고 싶었던 것은…….”

디아나는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그건 트리샤의 이야기였다. 또래의 영애들에게 업신여김당하며 제 신분과 환경을 자책할 때 트리샤에게 내밀어 준 디아나의 손엔 따스한 체온이 있었다.

트리샤가 그 손을 잡자 디아나의 뒤로 비치는 햇살이 너무나도 눈이 부셔 정말 천사의 날개라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트리샤는 평생, 죽어서도 그 광경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고.

“디아나였어.”

트리샤 블랑은 디아나를 동경했다. 동경한 나머지 애증과 같은 감정을 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트리샤의 현실과 환경은 음습하고 더러운 곰팡이처럼 그녀를 좀먹었다. 동경은 곧 욕망이 되었다. 영민함은 사악함으로 변했다.

‘너는 결코 내가 될 수 없어.’

트리샤가 가장 분노했던 디아나의 한마디였다. 그것을 뒤바꿔 생각하면 트리샤의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차가운 세상은 트리샤를 뿌리치고 디아나만을 바라봤다. 갖고 싶었던 것은 모두 디아나의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디아나의 것이 아니라면 관심이 없었다. 반대로 무척 하찮은 것이라도 디아나가 눈길 한 번 주면 의미가 생겼다.

“트리샤, 너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걸 원했구나.”

고요히, 디아나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과연…… 너는 깨달았을까.”

잘못된 운명은 이미 얽혔다. 돌이킬 방법도 없다. 아니, 이젠 디아나가 트리샤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너는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디아나가 가만히 일렁이는 촛불을 응시했다. 서늘한 한마디였다. 트리샤는 디아나의 유일한 행복을 빼앗았다. 디아나는 영원히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는 트리샤가 그 대가를 치를 차례다.

“이젠 너도 가장 원했던 것을 빼앗길 시간이야.”

운명이 제멋대로 꼬인 나선의 무한한 연장이라면, 디아나는 그 교차점에 다시 섰다. 잃어버린 것은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 그러나 바로잡을 수는 있었다. 그것을 위해 디아나는 죽음의 고통을 헤치고 굳이 한 번 더 이 고된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

제롬 하이든은 거의 매일 오전 디아나의 공작저를 찾았다. 그만큼 처리할 일이 많기도 했고, 디아나의 확인을 직접 받아야 뒤탈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사악한 수임료로 유명했지만, 맡은 일만큼은 완벽하게 해내는 나름의 상도덕이 있는 자였다.

“아가씨, 제롬 경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디아나는 가장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있는 방을 치우고 자신의 집무실로 만들었다. 아버지가 쓰던 집무실을 이용할까 잠시 망설이기도 했지만, 역시 시작은 스스로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 방엔 이미 너무 많은 유품과 귀중품이 있어서 그대로 놔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간밤엔 평안하셨는지요.”

제롬은 언제나 그렇듯이 능글맞게 웃는 얼굴로 등장했다. 친화력이 좋은 것인지, 유연한 것인지, 하위 귀족이라고 해도 특이한 태도긴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제롬을 음흉하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유능하고 사리에 밝은 자라고 평했다.

“동부에 있는 토지 이전 건은 잘 처리됐습니다. 단지 소유권만을 이전하는 것은 앞으로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 처음엔 좀 마찰이 있었지만, 카를 공작님께서 나서 주셔서 선례를 만들었으니까요.”

디아나는 좋은 소식에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머금었다.

“다행이군요.”

제롬은 꼭 필요한 말만을 했고, 불필요한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일을 논할 상대로는 꽤 적합한 인물이었다.

갈색 머리카락의 금빛 눈동자를 한 어딘지 수상한 인상의 청년이었지만, 디아나가 묻기 전에 빠르게 움직이는 자였다. 게다가 그는 필요한 것 외에는 묻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를 움직이는 건 약속과 보수다. 디아나는 바로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한 가지, 경과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새로운 의뢰인가요?”

“그건 경의 생각에 달렸죠.”

디아나는 밤새 고민했다. 붉은 마녀라는 것은 이 세계에서도 흔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제국은 교황청의 교리를 따랐고, 이단은 엄격히 처리했다. 당연히 마녀라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경멸당하는 존재였다. 때에 따라선 화형에 처해질 만큼 말이다.

“앉으세요.”

제롬에게 자리를 권하는 것은 이야기가 길어진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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