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레이스는 그 발칙한 답에 내심 동요했지만, 적어도 표정에 드러내진 않았다. 꽤 오랜 세월 권력의 중추에서 살았던 그레이스다. 더 놀랄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눈앞의 어린 영애가 그 편견을 깨트렸다.
“저를 발칙하다고 여기시겠지요.”
“우선은…… 비현실적이라고 해 두지.”
디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레이스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푸른 눈동자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나이보다 성숙한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보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확신에 찬 시선이었다.
“그래. 실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레이스가 단호하게 잘랐다. 디아나는 순간, 그 모습에서 에드윈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철렁했다.
“선친의 유지란…… 바꿔서 말하면 그것을 지지해 줄 선친이 작고했단 뜻이다. 영애에겐 유감스러운 일이다만.”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 선친께서는 확실한 뜻을 서면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또한 저의 후견인이 되어 주셨던 숙부께서도…… 그에 동의해 주셨지요.”
현재의 카를 공작이 다시 조카에게 모든 것을 돌려주려고 한다니, 쉬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특히 실비아의 성정을 잘 아는 그레이스로선 더욱 그랬다.
하지만 아론에 대한 평판도 모르진 않았다. 그의 특별한 기질이라면 주어진 것 이상의 탐욕을 내려놓는 것도 아예 무리는 아니다.
“흐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왜 그 이야기를 내게 하느냐다.”
그레이스가 차분하게 디아나를 관찰했다. 타당한 의문이었다.
“황태자비 후보에서 물러나고 싶다면, 아까의 고백으로 충분했다.”
“선대공비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허면?”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그레이스와 눈을 맞췄다. 현명하고 원숙한 여인의 여유가 느껴졌다. 하지만, 디아나는 이제 그런 것에 위축되지 않는다.
“저는 계속해서 전하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난 그대에게 가르친 것이 없다.”
“그럼, 앞으로 가르쳐 주십시오.”
공손한 건지, 발칙한 건지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물론, 특이하고 흥미를 끄는 것은 분명했다. 눈앞의 영애는 어렸지만, 욕심에 가득 찬 제 숙모보다 훨씬 영명했다.
“왜 나지? 난 그대의 혈연도, 무엇도 아니다.”
“전하께서는 여인의 몸으로 이 대공저를 지키셨으며, 멀리 있는 대공령에도 그 자비를 펼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대공 전하께서 작고하셨기 때문이다. 내 아들이 선친의 뜻을 이을 만큼 성숙하기 전까지 맡은 의무다.”
“저의 선친도 그렇습니다. 훌륭하게 의무를 수행하셨으나, 절 두고 작고하셨습니다.”
조금씩 디아나의 의도에 가닥이 잡히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대담한 영애를 봤다. 문득 어린 시절의 자신이 떠오르기도, 전혀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제게 가르침을 주신다면, 반드시 실망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디아나가 원하는 것은 황태자비 후보에서 제외되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 제국에서 디아나의 목적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바로 그레이스였다. 무엇보다, 그레이스에겐 이 거래에 응할 이유가 충분했다.
“부끄럽지만, 제겐 선친께서 남겨 주신 유산이 있습니다.”
보통이 귀족은 섣불리 돈에 대한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물론, 디아나는 보통의 귀족이 아니다.
“저는 그것을 기반으로 공작령을 다스리고 싶습니다.”
“말은 쉽다. 내 눈에 영애는 세상을 다 알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데.”
“그러니 전하의 가르침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건 그레이스도 마찬가지다. 그레이스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감히 아뢰옵건대, 제게는 선친의 유산과 공작령이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긴 시간이 있지요. 전하께는 현명함과 자비가 있으십니다.”
선대공비 그레이스는 지금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았다. 제 아버지를 빼닮은 에드윈이 장성했으니, 앞으로 대공가의 위세가 더 높아질 것이다. 즉,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다. 디아나는 그것을 상기시키면서도 결코 선대공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다. 참으로 영특한 영애였다.
“전하께서 제게 가르침을 베풀어 주신다면.”
디아나의 눈이 반짝였다. 맑고 곧은 눈빛이었다.
“저는 결코 그 은혜를 잊지 않는…… 카를가의 주인이 되겠습니다.”
주사위는 던졌다. 이것은 요청이자 거래였다. 디아나가 카를의 주인이 되어 적절한 보답을 한다면 선대공비에게는 큰 힘이 된다. 무엇보다 에드윈과 대공가의 위세를 세우고자 하는 그녀에겐 오롯이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세력가가 필요했다.
“영애는 이미 가르침이 필요 없어 보이는군.”
그레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소녀는 이미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그레이스에게 부족한 것과 자신이 부족한 것을 서로가 채워 주자는 제안을 이토록 정중하고 곱게 전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미력한 나라도 좋다면…… 옛날이야기를 종종 들려줄 수는 있겠구나.”
부드러운 말투는 그레이스 특유의 화법이었다. 우회적이면서 꼬투리를 잡힐 만한 여지를 남기지 않은 채로 제 뜻을 넌지시 건네는 것이다. 일단, 디아나는 이 정도에 만족했다.
“전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어느 오후, 훗날 제국의 판도를 크게 뒤엎을 인연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시작됐다.
***
첫 대담은 성공적이었다. 디아나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예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공손히 무릎을 굽히고는 알현실을 나섰다. 아직 가을이라 복도의 창문이 모두 열려 있어서 상쾌한 바람의 기척이 시원했다. 황실의 자로 잰 것 같은 정원도 좋았지만, 이곳 대공저의 자연에 맞춘 느긋한 정원이 더 마음에 들었다.
“정원은 주인을 닮는다더니.”
디아나가 속삭이듯 혼잣말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에드윈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대공저에서 에드윈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직, 이번의 삶에서 에드윈을 만나진 못했다. 하지만 곧 만나게 될 것이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앗…….”
그러나 디아나의 예상보다 재회는 빨랐다. 상념을 안은 채로 모서리를 돌았을 때 예기치 못했던, 그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인물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런.”
가까스로 부딪힐 뻔한 것을 피한 에드윈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울림이 풍부했다. 지금의 에드윈은 스물하나일 것이다. 고작 한 살 차이였지만, 디아나는 그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뻤다.
“내가 그만 실례를.”
디아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발에서부터 얼굴까지 시선이 올라갔다.
스물에서 스물하나가 된 것뿐인데, 디아나가 기억하는 것보다 한층 체격이 건장해졌다. 무엇보다 에드윈의 강인한 턱선에서 날카로운 콧날, 깊고 가로로 긴 눈매까지 훨씬 성숙한 남자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괜찮습니다.”
디아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에드윈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순간 그의 흑안이 그대로 멈췄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그의 새카만 흑발이 바람에 살짝 날렸지만, 시선은 여전히 한곳에 고정됐다.
“아니. 난…….”
에드윈의 입술 사이로 분명치 못한 말이 새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에드윈은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깜박, 디아나가 눈을 깜박이는 순간에도 그랬다.
반짝이는 백금발과 같은 빛의 속눈썹이 보석 같은 눈동자를 살짝 감췄다가 보여 줬다. 그저 눈을 깜박이는 단순한 동작에도 무척 신비로운 느낌이 풍겼다.
“제가 상념에 잠겨 걷느라, 앞을 충분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디아나의 분홍빛 입술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드윈은 책에서나 읽던 청아함이라는 단어가 실존하는 줄 처음 알았다.
디아나는 그런 에드윈을 보며 잠시 이전의 인연을 회상했다. 공작저의 응접실을 가득 채우던 그의 존재감과 자신을 보던 새카만 눈동자에 스민 체온을.
“나야말로.”
에드윈의 답이 낮게 울렸다. 익숙한 자신의 대공저에서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아름다운 여인이 튀어나왔다. 햇빛에 찬란하게 빛나는 백금발과 눈처럼 새하얀 피부, 장밋빛의 뺨과 입술을 가진…… 평생 에드윈이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동시에 디아나의 박동하는 생기가 에드윈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소녀와 숙녀의 경계에서 싱그러운 빛을 풍기는 디아나는 살아서 숨을 쉬며 에드윈을 보고 있었다.
“오늘 따로 손님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흑안에 디아나의 모습이 가득했다. 지금 에드윈은 디아나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다. 스쳐 가는 우연이 아닌, 자신의 인연으로 만들겠다는 본능이었다.
마침 저물어 가는 석양이 디아나의 백금발에 눈부시게 반사되고 있었다. 투명한 푸른 눈동자는 보석 같기도 했고, 고요한 수면 같기도 했다. 에드윈은 막연하지만 분명한 확신을 느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카를 공작가의 디아나입니다.”
디아나가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서 예를 올렸다.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동작이었다. 에드윈은 잠시 이곳이 자신의 대공저라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그런 디아나를 봤다.
“대공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나.”
에드윈의 물음에 디아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에드윈을 응시하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두 사람이 만났던 기억은 디아나에게만 있었다. 밀회의 달콤함도 그리움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체스터 대공저, 그리고 그 풍모를 보아 당연히 대공 전하라 추측했을 뿐입니다.”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군.”
에드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입꼬리가 살짝 풀어지며 나른한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흑안은 여전히 디아나를 꿰뚫듯이 보고 있었다.
“그럼, 나도 맞춰 볼까. 영애는 나의 어머님을 만나러 온 거군?”
“그렇습니다. 선대공비께서는 자애롭고 현명하기로 유명하시니 가르침을 청하러 왔지요.”
에드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우아한 영애의 태도는 빈틈이 전혀 없었다. 문득, 그것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영애는 원하던 가르침을 찾았는지 궁금한데.”
“아직, 모르겠습니다.”
디아나가 솔직하게 말하고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에드윈은 어째서인지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살다 보면 문득 만나게 되는 어떤 순간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지나가지만, 그사이에서 우연히 만날 수 있는 잊지 못할 아름다운 광경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장면. 바로 그런 순간이 지금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에 담겼다.
“그렇다면, 또 찾아오겠군.”
에드윈의 바람이기도 했다. 이미 에드윈의 마음엔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직 사랑을 모르는 그에겐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디아나를 본 순간 이것이 시작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대공 전하와 선대공비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예…… 기꺼이.”
“영애라면, 어머님께도 반가운 말 상대가 될 것 같군.”
몇 마디를 나눈 것만으로도 디아나에게서 풍기는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다. 당장 황실에 데려다 놓아도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예법까지 완벽했다.
“어쩌면, 내게도.”
에드윈의 목소리가 한층 낮게 울렸다. 대담한 말이었으나 디아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채로 살며시 시선을 들어 에드윈의 흑안을 바라봤다.
에드윈의 근사한 미소는 디아나의 기억 속 모습과 똑같았다. 어째서인지, 디아나는 그 사실이 기뻤다. 디아나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피었다.
“영광입니다.”
아주 짧은 한 마디였다. 그리고 디아나는 무릎을 굽혀 예를 차리고는 에드윈에게서 멀어졌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세 번째의 삶이었다. 인연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무런 이유 없이도 서로를 끌어들이는 인력이 있었다. 아마 곧 에드윈을 다시 만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디아나 카를…….”
에드윈은 조금씩 멀어지는 디아나의 작은 등을 눈에 담았다. 여린 체격과는 달리 당당하고 곧은 등은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깃든 차분함을 연상시켰다.
대공저에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예고도 없이 다가와 젊은 대공의 가슴을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