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곧 카를가의 이변에 대한 소문이 제국에 파다하게 퍼졌다. 무엇보다 이 유산 상속의 주인공이 조용히 지내던 영애라는 것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태풍의 눈이라고 했던가. 지금 가장 고요한 곳은 오히려 디아나의 공작저였다. 디아나는 차분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번에 먼저 출발한 것은 자신이다. 그 이점을 잃지 않으려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디아나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처음으로 뒤집힌 곳은 아론의 공작저였다.
“디아나에게 공작령이라니, 아니…… 그럴 수는 없어요!”
당장 실비아가 눈을 뒤집고 달려들었다. 아론은 제 부인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무심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 덤덤하게 그 신경질을 듣고만 있었다.
“당신은 카를가의 공작이에요! 그게 당신이라고요!”
실비아의 눈에 핏줄이 벌겋게 섰다.
“하, 공작령을 넘길 거면, 아예 공작위도 넘기지 그래요?”
“……그럴 거야.”
“뭐라고요?”
숨이 거의 넘어가기 직전인 제 부인을 보며 아론은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산처럼 큰 덩치가 창의 햇빛을 가렸다.
“당신, 제정신이에요? 디아나는 그런 걸 감당할 수 없어요! 우리가 지켜 줘야 한다고요!”
“형님의 유지야. 카를가의 일이지. 게다가 디아나도 이제 성인이야.”
“그럼, 나는요?”
“이 문제에 있어선 나도 당신도 마찬가지야. 본래 형님의 것이었고, 이젠 디아나의 것이어야 해.”
아론은 이미 자신의 몫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제게 주어진 것은 명확했다. 형님의 후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유지까지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디아나의 것이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디아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 지금 당신의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조카를 챙기겠다는 거 알아요?”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지?”
“항상 연구에만 매달리는 당신은 이 공작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없겠죠. 당신이 좋은 숙부 행세를 할 때, 당신 자식들은 당장 엘리트 교육을 포기해야 해요. 원래 당신이 가진 몫으로는 지금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고요!”
실비아로선 당연한 항변일지도 몰랐다. 그녀에겐 그녀 자신과 제 자식이 가장 중요했다. 지금의 생활수준이 가능했던 것은 디아나 몫의 유산을 실비아가 운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빠져나가면, 지금의 생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당신 말을 들으니, 왜 더 일찍 돌려주지 못했는지 후회가 되는군.”
“……뭐라고요? 뭘 들은 거예요, 지금?”
“방금 당신 입으로 말했잖나. 디아나의 몫으로 원래 우리 것이 아닌 생활을 누렸다고.”
“그건…… 당신은 자기 자식이 중요해요, 조카가 중요해요?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아론은 씁쓸한 한숨을 뱉었다. 자신이 무심했던 것이 이런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난 내 자식들이 도둑질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아.”
“이건 도둑질이 아니라 디아나를 위해서 대신…….”
“당신도 솔직해지도록 해. 당신이 결혼한 남자는 애초에 공작이 아니었어.”
카를가의 차남이자 연구에 미쳐 개인의 영달에는 관심도 없는 남자. 그것이 실비아가 결혼한 남자였다. 그 후에 생각지도 못하게 카를 공작 내외가 사망하고 어린 영애만이 남자, 실비아는 욕망을 배웠다.
“디아나에게 빼앗기는 게 아니라, 그동안 디아나에게 빚을 지며 산 거야.”
아론은 무심한 남자였지만, 한번 정한 일을 번복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가 옳다고 믿는 일엔 더욱 그랬다. 그리고 그에게 지금 이 유산 문제는 옳은 일이며, 충분히 늦은 것이었다.
“혼자서 성인군자인 척하겠다는 건가요? 당장 우리 아이들은…….”
“누가 들으면 우리가 파산이라도 하는 줄 알겠군. 본래 내 몫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나.”
“그건 옛날 일이죠!”
“……그런 마음을 버리라는 거야.”
아론은 한껏 흥분한 실비아를 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만일, 허튼수작이라도 부릴 생각이라면 당신이 그동안 디아나의 유산을 관리한 게 아니라 착복했다는 사실이 수면 위에 드러날 거야. 난 그걸 말리지 않을 거고.”
“당신!”
“이제 도둑질은 멈춰. 우리 아이들은 떳떳하게 자랄 수 있도록.”
실비아가 파르르 주먹을 쥐고 떨었다. 아론은 그 모습을 착잡하게 보다가 먼저 방을 나섰다.
실비아는 자신이 부린 꾀에 발목을 잡힌 셈이다. 아론의 말처럼 후견인으로서 권리를 주장하다 그동안 부정하게 착복한 것이 들통날 수 있다.
그것만은 실비아도 피하고 싶었다. 결국, 실비아의 패인은 자신의 과오였다.
***
디아나는 여태까지 중에서 가장 분주한 며칠을 보냈다. 모든 것을 아는 것은 확실히 유리한 부분이었지만, 그래서 미리 대비해야 할 것도 많았다.
“카를 공작님의 협력 덕분에 일이 빨리 끝났습니다.”
응접실에 앉은 변호사 제롬이 서류를 넘겼다.
“하얀 봉투에 든 것은 완전히 디아나 영애님의 소유가 된 재산입니다. 파란 봉투에 든 것은 권리를 양도받았고, 곧 소유권이 변경될 것들이고요.”
디아나는 먼저 하얀 봉투를 꺼냈다. 공작령에 있는 공작저가 포함됐음을 확인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작위를 승계하는 것은 더욱 복잡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계속 제게 일을 맡기시겠습니까?”
제롬의 수고비는 무척 비쌌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의 빠른 일 처리가 마음에 들었다. 최근 제국에서 일어났던 대부분 큰 송사는 제롬이 관련됐다. 물론 그가 승리를 주도하는 쪽이었다.
과연, 에드윈이 디아나에게 손수 보내 줬던 사람이다. 지금은 그들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디아나 혼자만의 소중한 추억이었다.
“그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제롬은 갈색 머리카락을 넘기며,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하위 귀족 태생이지만, 천부적인 재능으로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 청년답게 금빛 눈동자에 총기가 빛났다.
“집사장에게 보수 일부를 받아 가도록 해. 나머지는…….”
“물론 모든 일을 성공한 후로 미루겠습니다.”
대화가 제법 잘 통했다. 싱긋, 미소를 지은 제롬은 제 할 일을 빠르게 수행한 후에 자리를 떴다.
“자, 이제 대공저로 가 볼까.”
디아나가 몸을 일으켰다. 차 한 잔을 음미하며 느긋하게 쉴 틈도 없었다. 이제 긴장을 늦추지 않을 것이다. 실수는 과거에 저지른 것들로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대공저에 가면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체스터 대공저엔 고풍스럽고 우아한 분위기가 깃들어 있었다. 저택은 대부분 그 주인을 닮는다. 대공은 작고했지만, 선대공비가 남아 이 대공저를 지켰다. 디아나는 저택의 사소한 부분에서도 에드윈과의 짧은 추억을 떠올렸다. 그래서 이 대공저에 다시 한 번 희망을 걸기로 했다.
“카를가의 디아나 영애께서 들어가십니다.”
나이 지긋한 집사장은 이 대공저의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디아나는 응접실의 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렸다가 우아한 걸음으로 들어가 상석의 선대공비에게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다.
“저, 디아나 카를이 선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딱딱한 예는 됐고, 앉아서 차나 한잔 하도록 하지.”
“영광입니다.”
디아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선대공비를 봤다. 그레이스라는 이름처럼 우아한 장년의 여인은 에드윈의 차분한 태도를 닮았다. 그레이스도 반짝이는 영애를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다.
두 여인의 첫 만남이었다. 문득 그녀의 모습에서 에드윈의 얼굴이 떠올랐다. 잠시였지만, 그리움을 남기기엔 충분한 인연이었기에.
“내 듣던 대로 총명하고 아름다운 영애구나.”
“과찬이십니다.”
기품이 어린 디아나의 대답은 무척 성숙했다. 이제 열여덟이라곤 들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이런 자리에 혼자 나오면 긴장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도, 디아나는 맑은 눈으로 그레이스를 응시했다. 그 눈빛엔 두려움도 떨림도 없었다.
“영애가 보낸 서신에서도 느꼈듯이, 침착하군. 그것은 큰 장점이다. 매사에 침착할 수 있다면, 더욱 쉽게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디아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영명한 영애는 어찌 내게 독대를 청했는가.”
선대공비 그레이스는 황후인 스텔라의 친언니였다. 그 또렷한 눈매가 확실히 황후를 닮았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겠지. 부담 없이 말해 보라. 영애를 초대한 것은 그 이야기를 듣고자 한 것이니까.”
하지만 친자매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그레이스의 눈빛엔 황후의 성마르고 신경질적인 기운이 전혀 없었다. 에드윈을 떠올리고 선대공비를 만나길 잘했다. 과연, 에드윈의 어머니였다.
“감히, 전하께 고백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고백이라? 우리는 초면이 아닌가.”
디아나는 그 말엔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를 공작부인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것은 부정할 생각 없다.”
“그 점이 염려되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염려……?”
그레이스의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디아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의 숙모님, 그러니까 카를 공작부인께서는 일찍 부모를 잃은 저를 가엾이 여기십니다. 그래서…… 선대공비 전하께 여러 말씀을 전하신 줄로 압니다.”
“……그래, 그렇다. 영애를 황태자비 후보로 추천한 것도 나였으니까. 물론 결정은 황후 폐하가 하셨다.”
디아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말이 후보로 추천한 것이지 이것은 내정이었다.
이미 모든 실마리는 알고 있었다. 실비아와 황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 그리고 누구를 통해서 황후와 실비아의 연이 닿을 수 있었는지. 그 가운데에 바로 이 선대공비가 있었다.
“저를 어여삐 여겨 주신 줄 압니다만, 이대로 침묵할 수는 없습니다.”
“침묵?”
“예. 이대로면 저는 선대공비 전하께도 큰 폐를 끼치게 됩니다. 그런 죄인이 되기 전에 제 입으로 고백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레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고해라.”
저 기묘하게 침착한 태도와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 푸른 눈동자, 모든 것이 시선을 이끈다.
“저는 태생부터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았습니다. ……그 점이 걱정스러워 최근 여러 의원에게 보였는데 아무래도 전 후계자를 생산하기 어려운 몸이라고 합니다.”
딸깍, 선대공비가 찻잔을 내려놨다. 그레이스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 의아함이 함께 담겼다. 자신이 추천한 황태자비 후보가 후계를 생산할 수 없다면 큰 곤란이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고백하러 오는 영애가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검증을 더 해 봐야 할 일. 그러나…… 지금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영애의 저의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어찌 그것을 자신의 입으로 고하는 것인지?”
황태자비가 되는 것은 차기 황후가 되는 것이다. 한번 관을 쓰고 나면 죽을 때까지 그 고귀한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만일 디아나의 말처럼 후계를 생산할 수 없다고 해도 황제는 다른 여인에게서 아이를 얻으면 그만이다. 그런다고 황후가 바뀌는 일도 없었다. 황후란 상징적이면서 당연한 존재, 그저 그곳에 있는 것으로 충분했으니까.
“그대는 영명하니 알 것이다. 굳이 내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될 텐데, 어찌 그것을 지금 깨트리려고 하는가?”
물론 디아나가 그 고귀한 여인이 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나 대상을 선대공비로 정한 것은 다른 이유였다.
디아나는 이미 과거에 황후 앞에서 같은 화제를 꺼내려고 했다가 화를 입었다. 하지만 선대공비와 황후는 확실한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저는 죄인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고?”
“예. 알면서도 침묵하는 것은 거짓을 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선대공비 전하께서 호의로 저를 추천하셨는데 제가 진실을 숨기는 자라면 그것이 죄인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디아나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또렷했다. 태도도 태도였지만, 그 말의 내용이 그레이스의 나머지 마음을 빼앗듯이 이끌었다.
“부디 제가 죄인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뜻을 거두어 주시길 청합니다.”
그레이스의 눈동자에 의연한 디아나가 오래도록 담겼다. 과연, 유구한 명문가의 영애였다. 하지만 단순히 명문가의 혈통을 초월한 무언가가 있었다.
오히려 디아나의 이런 모습이 더욱 차기 황후에 어울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 뜻을 꺾을 수는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내가 뜻을 거둔다면, 그대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디아나의 의중을 완전히 꿰뚫는 질문이었다. 기다렸던 순간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디아나는 푸른 눈동자를 들어서 그레이스를 응시했다.
“저는 선친의 유지를 이어, 카를 공작이 되고자 합니다.”
이미 디아나는 답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대담하고 발칙한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