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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39화 (39/184)

39화

디아나는 차분하게 지시를 내렸다.

“오늘부로 내가 허락하지 않은 사람은 공작저에 들이지 마. 그게 공작부인이든, 황태자 전하든, 트리샤 블랑이든. 예외는 없어.”

“예? ……하지만, 그 전하께서 오실 일은 없고, 트리샤 영애는 아가씨께서…….”

“모든 건 내가 결정해. 지금 카를 공작저의 주인은 나니까.”

“실언했습니다. 아가씨 말씀이 옳으십니다.”

그레이의 카를가를 향한 충성심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것은 선대 공작 내외가 그만큼 인덕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서 또렷하게, 또한 결연하게 말하고 있는 소녀에게선 선대 공작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그레이는 그것만으로도 디아나의 말을 따를 수 있었다.

“공작저의 경비를 강화해. 물 샐 틈도 없도록.”

“예.”

“그리고 긴밀히 사람을 붙여 줘.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감시만 하도록 하고 뭔가 이변이 생기면 바로 내게 보고하도록.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확실한 인력을 붙여.”

저게 정말 온화했던 디아나 아가씨가 하고 있는 말인가. 그레이는 놀라웠지만, 동시에 자신이 모시던 선대 공작의 생각이 떠올라 오히려 디아나의 이런 변화가 반갑고 감격스러웠다.

“예. 상대는 누구입니까.”

“트리샤 블랑.”

얼마 전까지 아가씨의 친구라는 이유로 뻔질나게 공작저를 드나들던 오만한 소녀의 이름이었다. 하잘것없고 신분도 한미한 영애 하나에게 그런 사람을 붙일 필요가 있을지 의문스러웠지만, 본래 충직한 집사란 이유를 묻지 않는 법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밀봉해서 선대공비 전하께 전하도록.”

편지였다. 짧은 시간에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것이다. 그레이는 공손히 그 편지를 받아 들었다. 그 아래에는 아직 개봉하지 않은 낡은 봉투가 있었다. 그 봉투엔 인장이 찍혀 있었다.

“외람되지만, 설마 저건…….”

“그래, 어머니가 꿈에서 말씀해 주신 또 하나의 선물이었어. 이따 숙부님이 오시면 같이 개봉해 보려고 해.”

한 번 썼던 걸 다시 쓰기는 더 쉬웠다. 게다가 이미 아론의 성격은 파악했다. 조금 더 그에 맞춰 새로 작성했으니 효과도 더 좋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이번에 디아나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상속분만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더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 선대 공작의 필체로 봉투 위에 변호사와 함께 공개하라는 말도 넣어 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대외적으로 난 지병 때문에 요양 중이라고 해 둬.”

“알겠습니다.”

***

응접실에 낯선 조합이 모였다. 우선 더벅머리를 하고 책에 빠져 있다가 조카가 위중하다는 소식에 달려온 아론 카를, 현재의 카를 공작. 제국에서 돈만 주면 악마도 소송에서 이기게 해 준다는 소문의 변호사 제롬 경. 그리고 18세의 디아나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디아나. 난 네가 아프다고 해서…….”

아론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제롬은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쨌든 제롬은 손해가 없다. 이대로 차만 마시고 돌아간다 해도 어마어마한 상담료를 뜯을 테니까. 하지만 디아나가 아는 제롬이라면 틀림없이 역할이 있을 것이다.

제롬을 보자 자연스럽게 한 남자가 떠올랐다. 당장 현실과 복수를 위해 잠시 잊기로 했지만, 끝내 잊지 못한 남자였다. 이 세계에도 에드윈이 살아 있을 것이다. 디아나로선 언젠가 다시 그를 만날 수 있기를, 또 인연이 이어지기를 기도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디아나만이 간직한 그리움이었다.

“이걸 발견했어요.”

상념을 끊은 디아나가 문제의 낡은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게…… 아니, 이건 형님의…….”

“네. 그리고 비밀리에 변호사와 함께 개봉하라는 말이 봉투에 적혀 있어서요.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아니, 아니다…… 이건 중대사야. 물론, 내가 와야지, 암. 잘했다.”

그제야 제롬이 변호사로서의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변호사인 제가…….”

“아니, 형님의 유지다.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내가 읽겠다.”

곧 아론이 떨리는 손길로 편지의 봉인을 떼고,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내용 대부분은 저번과 비슷했지만, 이번엔 디아나도 원하는 것을 정확히 써 넣었다.

“흐음, 과연…… 이런 유지가 있다면 선대 공작님의 유산은 전부 디아나 영애에게 권리가 있습니다.”

제롬의 말에 아론도 고개를 끄덕이곤, 전에 그랬듯이 고인 눈물을 소매로 훔쳐 냈다.

“과연, 형님이시다. 이렇게 부족했던 아우를 저세상에서 꾸짖으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구나. 나는 유지를 따르는 데 전혀 이의가 없다. 그러면 되는가?”

“우선은 그렇습니다만, 몇 가지 사항이 더 있습니다.”

“무엇이지?”

디아나가 변호사를 부른 이유였다. 저번만큼만 받고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이곳에 분명, 모든 토지와 부동산을 포함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변호사는 디아나의 기대대로 행간을 잘 읽어 냈다.

“그렇다면…… 공작령의 토지는 어떨지요?”

“공작령? 공작령이라면 물론 공작의 것이다.”

제국의 수도엔 많은 귀족이 살았다. 자연히 모든 영지가 수도에 있을 수는 없었다. 수도는 제국 황실의 것이었다.

영지는 수도를 벗어난 곳에 존재했고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를 떠나 정치적으로나 사치를 누리기 위해서 수도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

영지의 영민들은 알아서 노동을 통해 세금을 냈고, 그것은 고스란히 취하면서 지루한 영지에 머물 필요가 없다니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선대 공작님의 유산 전부라는 것은…… 법적으로 해석하면 공작령과 그에 따른, 실례하겠습니다, 작위까지 포함됩니다.”

카를 공작가의 적통 후계자는 디아나였다. 다만, 선대 공작 내외가 디아나의 나이 다섯 살에 사망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여성이 가계를 잇는 일은 아주 드물었지만,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어린아이였던 적은 없다. 그럴 경우, 대부분 방계에서 영지와 함께 작위를 계승하곤 했다.

“그렇지, 본래는…… 전부 형님의 것이었다.”

아론이 눈을 들어 허공을 봤다. 무언의 갈등이었다.

“난 못난 아우였다. 늘 책에만 파묻혀서 부모님의 걱정을 샀지. 공작저에 보탬이 된 적이라고는 한 번도 없는 날…… 형님만이 인정해 주셨다.”

이 시대에 있어서 귀족가에 태어나는 것은 축복이었다. 그러나 훌륭한 학자나 의사, 변호사는 그와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고귀한 것은 오로지 통치권이지, 사사로운 가설이나 학문이나 과학 같은 것이 아니었다.

“공작저에서 내 존재는 골칫거리였지. 무능하고 의욕이 없다고 꾸지람을 듣기 일쑤였어. 그때마다 형님은 말씀하셨다. 내 연구엔 분명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학문도 충분히 훌륭한 것이라고 말이다. ……무엇보다 후계자는 형님이셨으니, 내가 질 짐은 없었다.”

아론은 타고난 연구자였다. 디아나는 그 사실도 이미 간파했다. 지난번의 성공을 경험으로 한 것이다. 그때는 어디까지 받아들여 줄지 몰랐기 때문에 재산만을 요구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실비아의 행실을 보면, 공작으로서 그의 무능함은 뻔했다. 게다가 본인도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며, 그에 대한 욕망도 없는 자였다.

“전부 형님 덕분이었다. 나는 걱정 없이 연구에 매몰할 수 있었고, 자연물의 힘을 이용해서 도시의 설비를 이뤄 냈어. 그제야 세상 사람들은 내 연구가 가치 있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보다 큰 기쁨은 없었지. 난, 형님이 짐을 대신 져 주신 덕분에 행복했던 거다.”

디아나는 아론의 부채감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 부채감을 홀로 남은 조카를 위해서 털어 버릴 수 있는, 그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임무를 말이다.

“변호사로서 끼어들자면, 현재 카를 공작님의 공작저와 공작님 개인이 카를가에서 상속받으신 토지 등의 유산은 그대로 보전됩니다. 다만, 선대 공작님의 몫을 여기에 있는 디아나 영애에게 전달해 달라는 유지가 있으신 거죠.”

아론도 카를가의 일원이었다. 공작 작위를 계승하진 못했지만, 디아나의 아버지는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욱 아론에게 가문의 상속분을 후하게 넘겨주었다. 그건 아론이 평화롭게 연구를 하며 부족함 없이 풍요롭게 살며 자손을 키우기에도 충분한 액수였다.

“우선, 공작님께서 생각을 정리하실 시간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아니.”

그때와 똑같다. 지난번 회귀에서도 아론은 길게 생각지 않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어리석어서 몰랐던 것을 이리 편지로나마 전해 들을 수 있어서 신께 기도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아론은 디아나의 아버지를 배신할 수 없었다. 그는 제 식솔들에게도 무심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한 사람, 자신의 형만은 제 목숨처럼 따랐다.

“형님의 것은 당연히 디아나의 것이다. 나는 잠시 그것을 맡아 두는 자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어.”

카를가의 남자들은 정직하고 탐욕이 없었다. 디아나는 희미하게 선대 공작을 짐작했다. 이토록 모두가 입을 모아서 훌륭한 인물이라고 증언하다니 괜히 자신이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이것을 찾아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만 봐도 디아나가 충분히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떤가, 제롬 경.”

“그렇습니다. 디아나 영애의 판단능력에 대해선 법적으로 제가 보증하지요.”

제롬은 속으로 이 영애의 대담한 행보를 주목하고 있었다. 편지의 진위는 아론이 인정했지만, 보통 그런 편지를 보더라도 직접 변호사를 부르고 이런 분위기까지 몰아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선, 카를 공작님께서는 가족분들과 상의를 하실 시간이…….”

이 노련한 변호사는 자신의 의뢰인에게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이득을 가져다줄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이건 카를가의 일이다. 형님이 못난 아우에게 맡기신 유지란 말이다.”

과연, 아론의 단호한 성정은 오래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러면, 선대 공작님의 모든 유산을 디아나 영애에게 주시겠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내 형님이 주신 것을 이제야 어리석은 아우가 전하는 것뿐.”

덩치가 산만 한 아론이 바보처럼 우뚝 서서 몇 번이고 형님을 되풀이하는 모습은 꽤 장관이었다.

“그러니까, 공작님. 법적으로는 공작님께서 대신 상속받으셨던 선대 공작님의 재산을 다시 디아나 영애께 양도하셔야 합니다.”

“뭐가 됐든, 하겠다. 형님이 얼마나 기다리셨을지……. 당장이라도 늦어.”

저 극단적인 성격만 아니었으면 더 많은 연구 성과를 이뤘을 것이다. 디아나로선 달가웠지만 말이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서류를 만들도록 하지요. 집사장? 내 조수를 들어오라고 하게.”

“예.”

제롬이 분주해진 사이 아론은 디아나 곁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땀이 찬 뜨거운 손으로 디아나의 작은 손을 잡았다.

“잘했다, 디아나. 넌 정말로 형님을 닮았구나. 형님은 불과 열여섯에도 성인식을 치르셨지. 열여덟이면 충분하다.”

“저어, 숙부님…….”

“그래.”

“제가 공작이 될 수…… 있는 건가요?”

“그렇게 할 거다. 내가 반드시 인가를 받아 내겠다.”

역시 모든 일이 간단하지는 않았다. 특히나 영애에게 공작위를 넘긴다는 것은 제국을 들썩이게 할 문제였다.

“그러나 모든 권한은 당장 내어 줄 수 있다.”

그것 또한 공작의 권한이었다. 디아나는 그것을 노렸다.

“공작령 영지 전부에 대한 모든 권리를 네게 주마. 그리고 내 얼마를 어떻게 싸우더라도…… 카를가의 진정한 후계자는 너라는 것을 분명히 하겠다.”

꾹, 디아나의 손을 잡은 아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디아나는 푸른 눈동자로 아론을 올려 봤다. 지난번엔 낯설기만 했던 얼굴이 꽤 친숙하게 느껴졌다.

디아나의 부친도 이 사람을 조금은 닮았을까. 그는 이런 세상에서 드물게 순수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것이 부친의 덕분이라고 생각하면, 뭔가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졌다.

“공작님, 서류는 준비됐습니다. 지금 진행하시겠습니까?”

제롬의 목소리가 주의를 돌렸다.

“아, 아니. 내가 잊은 게 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의 의견을 묻지 않았어.”

설마 실비아인가. 그러면 이 일은 무척이나 복잡해질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 저 변호사에게 유산의 반을 털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디아나 카를.”

그러나 다정한 눈빛과 체온은 디아나를 향했다. 그제야 디아나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까지 해 주는 아론을 두고 차가운 의심을 하다니.

“자랑스러운 네 부모님의 뜻을 따라서, 카를가의 정당한 후계자가 되고 싶으냐.”

“……네.”

디아나가 차분하게 답했다.

“저는 이미 사라져 버린 소중한 사람들의 뜻을 지키고 싶어요.”

그 말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위로할 수 있는 것도 바로잡을 수 있는 것도 이제는 디아나 자신뿐이었다.

소중한 것들을 지켜 낼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잃어버린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늦가을의 어느 날, 디아나 카를은 열여덟의 나이로 카를 공작령을 포함한 모든 부모의 재산을 작은 손에 넣었다.

……그러나 되찾는 것은 겨우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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