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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38화 (38/184)

38화

지금, 자신은 디아나였고 디아나는 자신이었다. 이제는 그 인생의 무게를 안다. 그리고 자신 또한 영원히 잃어버린 존재에 대해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슴이 너무 아파.”

이토록 심장이 미어지는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토록 무언가를 애틋하게 사랑했던 기억이 생기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프고, 아파서…… 미칠 것만 같아.”

그런데 영원히 잃어버렸다.

……그것은 자신을 살해한 것보다 용서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이었다.

“난…… 바보야. 무엇을 위해 회귀했는지, 너무 늦게 알았어.”

- 지금 느끼는 감정을 깨닫기 위해서야.

그랬다. 머리로 알아서는 안 되는 거였다. 트리샤의 소름 끼치는 붉은 눈동자와 아무것도 하지 않던 무능한 루카스의 존재를 피부로 깨달아야 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트리샤의 흉계에 의해서 고통스러운 죽음을 겪어야 했다.

“그래, 이제는 알아.”

원한과 절망을 향해 눈을 떠야 했다. 그래야만 보다 깊은 절망을 볼 수 있었다.

“멀리서 빛이 보이는 것 같아.”

- 시간이 됐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다시 눈을 뜨면, 또 디아나가 된다.

- 하지만 꼭 가지 않아도 돼. 그리고 돌아간대도, 넌 열일곱보다 더 적은 시간을 갖게 될 거야.

“가겠어.”

망설임은 없었다. 이미 이 공간에서 원작의 디아나가 품었던 절망을 살갗에 새기고 심장에 박아 넣었다. 그런데 잊으라고? 이대로 사라지라고?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영원히 잃어버린 아이는 이제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그토록 사랑하는 존재를 이제는 두 영혼 모두 되찾을 수 없었다.

“이제 나는 너야.”

- 그리고 너는 나지.

이것은 이미 선택이 아닌 운명이다.

- 내가 트리샤에게 걸었던 저주를 이뤄 줘.

“응, 내 몫의 저주도.”

- 기다리고 있을게. ……줄곧.

이제 빛이 더 가까이서 느껴졌다. 대답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 공간에서 둘의 영혼은 공명한다. 그것은 생각을 뛰어넘어 감정이 되고 기억이 되고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다.

디아나 카를은 그렇게 마지막이 되길 바라며, 이 세계에 회귀했다.

***

눈을 뜨자 아침, 익숙한 침대였다.

디아나는 자신의 손을 내려 봤다. 작고 하얀 손을. 그러나 조금 달랐다. 디아나는 원작의 그녀가 했던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 두 번 다시 열일곱이 될 수는 없다.

“아가씨, 깨셨어요?”

샬롯의 다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모든 게 똑같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질 테다.

“어머…… 아가씨 왜 눈물을…….”

채 느끼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두 뺨에 투둑, 투둑 눈물이 떨어졌다.

다시 살아 움직이는 세상에 돌아왔는데도 상실감이 메워지질 않았다. 마음엔 아예 쇠로 된 말뚝이 박히고 심장엔 쇠사슬이 칭칭 감긴 것 같았다. ……이것이 디아나의 절망이었나.

“무슨 꿈이라도 꾸셨어요? 그만 우세요. 아이, 참. 열여덟 살이나 되셔서는 왜 이리 우신담.”

“아…… 열여덟 살……이지, 나.”

“아가씨, 아직 잠이 덜 깨셨어요?”

“그냥, 꿈을 꿨어.”

투명한 눈물은 투둑, 투둑 계속해서 이불을 적셨다. 샬롯이 손수건을 가져왔지만, 디아나는 고개를 젓고 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아주 슬프고 아픈 꿈이었어.”

“아가씨, 꿈은 꿈이랍니다. 그만 우세요. 네?”

디아나가 한 번 더 뺨을 닦아 냈다. 짧은 시간 어찌나 눈물을 쏟아 냈던지 이미 눈가가 발갰다. 그러나 그뿐, 디아나는 이내 숨을 내쉬며 차분함을 되찾았다.

“응, 그런데 샬롯.”

“네, 아가씨?”

“꿈은 그냥 꿈만이 아니야.”

“……네?”

디아나의 입가에 아주 흐리고 쓸쓸한 미소가 배어 나왔다가 이내 사라졌다. 디아나는 바로 침대에서 일어서 테이블을 향했다. 이젠 자신이 할 일을 분명히 안다.

“샬롯.”

“네, 아가씨. 아침은 뭐로 하시겠어요?”

“필요 없어.”

이제 디아나는 태평한 인생을 보낼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우유 수프니 티타임이니 그런 것을 즐길 때가 아니란 말이다.

시간은 금이다. 자신이 회귀했으니, 트리샤도 기억을 되찾을 때가 온다. 평온한 삶? 그것은 트리샤가 같은 하늘 아래 없을 때 가능한 것이다. 디아나의 옆얼굴이 결연함으로 가득 찼다.

***

디아나는 가장 먼저 지금 현실의 자신을 파악했다. 나이는 18세, 곧 성인식을 치를 때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트리샤와의 관계와 루카스였다.

그들은 디아나를 매개로 이어지는 인연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트리샤는 디아나의 친구였으며 디아나는 아직도 황태자비 후보에 불과했다.

샬롯의 설명에 따르자면 혼담이 오간 지는 오래였지만, 열여섯의 끝 무렵 디아나가 열병을 앓았다고 했다. 자연히 입궁해서 예절을 배우는 시기가 미뤄졌고 오랜 요양 끝에 다시 건강을 찾았다고 했다.

내심 짐작하자면, 그것도 성유물의 영향일 것이다.

회귀하면 전보다 주어진 시간이 짧아지는 제약이 있지만, 동시에 디아나의 존재 없이는 어떤 이야기도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디아나는 회귀했고, 이 세계의 시간도 다시 흘러가고 있었다.

“샬롯.”

“네, 아가씨. 식사하시겠어요?”

디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제국 최고의 변호사를 불러와. 제롬 하이든이라고 했던가?”

“최고라면 물론 제롬 경이겠지만. ……제롬 경은 단순히 만나는 것만으로도 비용이…….”

“상관없어. 얼마를 줘도 좋으니 당장 불러와. 그리고 아론 숙부님께 사람을 보내 내가 당장 죽을지도 모르니 공작저로 와 달라고 해.”

“아가씨,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셔도…….”

쿵, 디아나의 작고 하얀 손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자신의 변화는 측근들이 가장 먼저 받아들여야 했다. 그들조차 설득하지 못한다면 디아나는 성공할 리가 없었다.

“샬롯은 우리 어머니의 가문인 티어스가를 평생 모셨지?”

“예, 그렇습니다. 특히 마님의 평생을…… 모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어머님은 현명하고 결단력이 강한 분이셨지? 게다가 어릴 적부터 성인과 대등할 정도로 영명하셨어. 내 말이 틀린가?”

“아…… 아닙니다.”

디아나는 이제 과거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배웠다. 소극적으로 피해선 안 된다. 먼저 나서서 적극적으로 수를 써야 했다.

“그리고 난 머리카락 색부터 눈동자까지 어머님을 빼닮았지. 하지만 과연 내가 닮은 게 어머니의 외모뿐일까?”

“아닙니다, 아가씨도 똑같이 영명하세요.”

샬롯은 자신이 대답하고서도 그 말에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선대 공작부인은 어렸을 때부터 사리 분별이 정확했고, 학문도 깊었다. 게다가 그 추진력을 생각하면 디아나의 모습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으니 더 빨리 철이 들었으리라.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것은…….”

“샬롯.”

단호한 디아나의 말에 샬롯이 고개를 돌렸다. 푸른 눈동자는 확실히 선대 공작부인과 똑같았다.

“나, 어머니가 나오는 꿈을 꿨어. 어머니는 꿈속에서…… 이제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어.”

“그야, 아가씨도 이제 곧 성인식을 치르실 나이니까요.”

샬롯이 인자하게 답했다.

“꿈이 아니라 정말 돌아가신 어머니가 와 주신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눈물이 났던 거야.”

다시 한 번, 디아나는 과거의 이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혹시…… 아버지가 쓰시던 집무실에 어머니의 소중한 물건이 있지 않아?”

“네, 그곳에 유품을 많이 보관했는데…….”

“그중 두 번째 줄 장식장 세 번째 칸…… 거기에 아무런 장식도 없는 은으로 된 것이 있어. 단……검? 같은 건데, 어머니가 항상 지니셨다고.”

순간 샬롯이 생각에 잠기더니 소리 없이 경악의 눈길로 디아나를 봤다. 정확히 그곳에 있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선대 공작부인은 은으로 된 장식 없는 단검을 지니고 다녔다. 티어스 가문의 유산이었다. 그것을 어렸던 디아나가 알 방법은 없었다.

“아가씨가 그걸…… 어떻게.”

“티어스 가문에서 대대로 물려받는 거지? 어머니가 그걸 꺼내서 내게 지니라고 하셨어.”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샬롯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주시했다. 샬롯은 반신반의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가서 찾아봐. 그게 정말 내가 말한 곳에 있다면, 어머니는 나를 돕기 위해 꿈에 찾아와 주신 거야.”

선대를 닮은 품위와 카리스마였다. 샬롯은 예를 차리는 것을 잠시 잊고 빠른 걸음으로 선대 공작의 집무실에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숨을 헐떡이며 돌아온 샬롯의 손에는 그 단검이 들려 있었다.

“정말로…… 정확하게 아가씨가 말씀하신 곳에 있었어요.”

그럴 수밖에. 디아나는 차분한 눈길로 샬롯을 봤다. 디아나에겐 오히려 조금도 놀라거나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걸 보여 주면 샬롯이 내 말을 믿어 줄 거라고 하셨어. 카를가에 큰 위기가 오고 있으니 그걸 내가 막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네? 세상에 그런…….”

디아나가 자리에서 일어서 샬롯이 가져온 단검의 칼집에서 실을 꺼내 제 목에 걸었다.

“맞아요, 마님도 항상 그렇게…… 아니, 아가씨가 아실 리가.”

“어머니는 이렇게 하면 샬롯이 날 믿고 지지해 줄 거라고 하셨어. 어머니를 대신해서 날 지켜 줄 거라고.”

샬롯의 눈동자에 경이와 뭉클한 감정이 글썽이고 있었다. 선대 공작부인이 남긴 유산이었다. 그리고 그 과거를 지금의 디아나가 이용하고 있었다.

“샬롯, 그게 정말이야?”

“물론이죠, 아가씨…… 물론이죠. 세상에…… 어떻게, 세상에…… 마님께서 얼마나 아가씨를 위하셨으면 이렇게까지……. 암요, 이 샬롯이 평생 지켜 드릴 겁니다. 아가씨의 말을 평생 믿고 따를 거예요.”

샬롯이 감격에 겨워 디아나를 끌어안았다.

“어머니는 이제 내가 어른이 되어서 가문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어.”

“네, 네…… 암요.”

사람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아간다. 디아나는 이미 그것을 아주 잘 깨달았다. 게다가 적절한 증거를 들이대면 꿈도 사실이 되고 예언이 될 수 있었다.

“내 말을 믿는다면, 당장 내 지시를 따라 줘.”

“……네, 아가씨.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바로 곁에 있는 측근을 움직이는 것, 그것이 디아나의 한계를 벗어나는 첫 번째 방법이었다. ……그래, 밀크티 따위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결정을 내리는 일이다.

“트리샤, 내가 저주를 돌려주러 왔어.”

혼자 남은 디아나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

샬롯이 사람을 보내러 나간 사이 디아나는 스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은 팔자 좋게 공녀 놀이를 할 때가 아니었다.

아직 회귀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다. 물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땐 디아나에게 원작 디아나의 회한과 절망이 스미기 전이었으니까.

“……용서 못 해.”

디아나가 거울을 주시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반드시 그보다 더한 절망을 돌려주겠어. 죽어서도, 몇 번을 돌아와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또 눈시울이 발갛게 달아오르려고 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감정과 과거를 받아들이고 나니 계속 가슴이 뻐근하고 머리가 아팠다.

그럴수록 디아나는 주먹을 꾹 쥐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지금도 트리샤는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한다. 하루도 헛되이 보낼 수가 없었다.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노크 후에 그레이 집사장이 들어왔다. 디아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대대로 카를가의 명령에 따르는 집사로 그 주인이 아무리 어릴지라도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있는 자였다.

샬롯의 귀띔으로 이야기를 대강 전해 들었지만, 어쨌든 그가 가문에 충성하는 것은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카를가에 곧 위험이 닥칠지도 몰라.”

“……그래서는 안 되죠.”

“내가 막겠어.”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에서 결연함이 읽혔다.

“물론, 그러셔야 합니다.”

그레이는 이미 당당하고 고귀한 디아나의 태도에서 선대 공작 내외를 떠올렸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디아나가 확실한 카를가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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