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루비처럼 빛났다.
“놀랍네. 과거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순진할 줄은. 그래서 넌 안 된다니까. 의지가 없어. 생존을 위한 의지가.”
트리샤의 입장에선 그리 보였다. 모든 걸 갖고 태어난 디아나에겐 절박함이 없다. 그게 디아나와 자신을 가르는 한 수였다.
“난 미천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덕분에 뭐가 중요한지 잘 알았거든. 게다가 내게도 붉은 마녀의 피가 흐르고 있었어. 그나마 너랑 비슷하게 게임을 할 정도의 능력이었지.”
그건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아마 디아나가 채 읽지 않은 원작의 나머지 부분에서 트리샤가 마녀의 혈통을 깨닫는 것 같다. 그리고 트리샤는 그것을 지금의 디아나도 안다고 치부하고 있었다.
즉, 디아나와 트리샤가 회귀한 과거는 시점이 달랐다. 그 이유는 아마 디아나의 빙의 때문이었을 거다. 그렇게 멋대로 앞당긴 죽음은 원작에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었어. 왜, 그때도 지금도 너에게만 미약이 듣지 않는 걸까?”
트리샤는 당연히 디아나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디아나만은 미약에 홀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안타까웠지만, 디아나를 고립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 걱정할 필요는 없어. 이번엔 극약도 같이 준비했거든.”
싱긋, 트리샤가 미소를 지었다. 극약은 마법과 상관없이 모든 생물체에게 적용된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허술한 건 궁인들이야. 독이라는 건 굳이 입으로 먹어야만 하는 게 아니거든.”
트리샤가 다시 수건을 물에 담갔다가 짜서 디아나의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아무도 양동이의 물은 의심하지 않더라. 아까부터 네 피부로 스며들고 있었는데. 물론, 난 이미 해독제를 먹었어.”
디아나의 이마에 땀이 맺히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심장에 쇠사슬이 죄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점점 숨을 쉬는 것이 버거웠다.
“이제 곧 작별이야.”
시야가 흐려졌다. 이 순간 원망스러운 것은 트리샤가 아닌 안일했던 자신이다. 늘 소외당하였고, 인형처럼 차갑게 굳어서 초목처럼 살아가는 것이 가장 괴로운 줄 알았다. 고난은 충분히 겪었으니 평온한 삶을 찾으면 된다고도.
“마지막 선물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줄게. 네게 그 사실을 알려 주지 못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
그건 고난도 아니었다. 디아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때 네가 하혈했던 거…… 그거 유산이었잖아. 응, 내 약 때문이었지. 그리고 넌 영원히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됐던 거야.”
진짜 고통을 몰랐다.
“그래야만 했어…… 루카스 전하의 관심은 무엇에든 오래 머물지 않으니까. 처음은 어려웠지. 하지만 한번 몸을 섞고 나니 전하도 그걸 즐기셨어. 목석같은 너보다 훨씬 좋다고 하셨는걸. ……뭐, 나도 임신은 어려웠지만. 적어도 그걸 가장할 수는 있었어.”
진짜 원한이 어떤 건지 몰랐다.
“세상은 참 우스워. 있지도 않은 내 아이 때문에 진짜로 자신의 아이를 품었던 널 죄인으로 몰다니. 이번에도 넌 지병이 황후 폐하 때문에 악화돼서 각혈하고 죽은 게 되겠지. 이목을 돌릴 사람은 늘 널려 있다니까.”
디아나가 간신히 입술을 벌렸다.
“널…… 증오해.”
“알아. 하지만 난 널 사랑했었어.”
“저주……할 거야.”
“그때랑 같은 말을 하는구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트리샤의 말은 거짓이 아닐 거다. 곧 끝이 다가온다. 그 끝에서야 디아나는 깨달았다. 자신이 원작 디아나의 원한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저 소외나 당하고 초목 취급을 받은 것으로는 그녀의 원한을 반의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자신이 나빴다. 고작 그 정도 괴로움에 지쳐 섣불리 목숨을 끊어 버렸던 자신이 이기적이고 나빴다.
나약한 자신은 원작 디아나의 삶을 대신 살아갈 자격조차 없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 디아나가 반드시 회귀해야 하는 이유를, 그 사명을.
“트리샤. 나는 널…… 저주한다.”
“아니, 넌 아무것도 못 해. 이젠 내가 네 역할을 대신할 거야. 이번에야말로.”
쿨럭, 입에서 검은 피가 솟구쳤다. 그때마다 누워 있는 디아나의 가슴이 꿀렁였다. 트리샤는 아무 감정 없는 붉은 눈동자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곧 영애가 피를 토하셨다고 소리 지를 준비를 하면서.
“이번엔…… 나의 영혼까지 더해서…… 널 저주하겠어.”
트리샤는 그 말의 의미를 모른다. 쿨럭, 디아나의 입에서 다시 피가 쏟아졌다. 그 피는 디아나의 앞섶을 적시고 또 흘렀다. 피로 물든 옷섶의 안쪽에 디아나가 항상 소지하고 있었던 은빛의 단검 역시도 피로 물들었다.
“다시는…… 네게 지지 않아.”
검을 찬 부위에 뜨겁고도 알 수 없는 박동이 느껴졌다. 그제야 디아나는 깨달았다.
회귀의 조건은 바로 이 검이었다. 어머니의 가문에서 대대로 물려 왔던 아무런 장식이 없는 신비로운 단검, 그리고 자신의 피.
“미안한데, 이제 네 시간은 끝났어.”
디아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 트리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바라고 또 바랐다. 마법이 깃든 단검에 자신의 피를 더해서, 이번에는 원작의 디아나와 자신의 영혼을 합쳐서 다시 한 번, 정말이지 단 한 번만 이 원한을 되돌려 줄 기회가 돌아오기를.
디아나 카를이 사망했다.
향년 17세의 어린 나이였다.
***
고통은 점차 희미하게 사라졌다. 온통 하얗기만 한 세계에 혼자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은 빛과 어둠을 가르는 것조차 무의미한 허무의 세계였다. 본능적으로 여기가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여기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디아나, 듣고 있어?”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듣고 있잖아, 디아나. 진짜 디아나였던 너 말이야!”
하지만 원작의 디아나가 듣고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강하게 느껴졌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난 아무것도 몰랐어…… 아무것도……. 네 생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난 이해하지 못했어.”
가장 비참하고 슬픈 것은 자신이 아니다. 원작의 디아나였다. 그걸 이젠 안다.
- ……맞아, 넌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어.
분명 디아나의 목소리였다. 같은 목소리지만, 완전히 달랐다. 절망의 깊이가 다른 것이다.
“그래, 내가 어리석었어. 그냥, 낯선 세계에 온 게 겁이 났어. 혼자인 것도 싫었어.”
-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회귀를 반복했어.
“그게…… 무슨 뜻이야?”
- 사람들은 지루한 비극을 싫어하지. 그렇게 잊힌 뒤 페이지의 이야기야.
순간 소름이 돋았다. 한 번으로도 자신의 정신이 이렇게 피폐해졌는데 이 짓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고? 그건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제발, 그래야 하는데.
- 그러나 매번 결과를 바꿀 수가 없었어. 내가 회귀했다는 것을 깨달으면 곧 트리샤도 그것을 깨달았거든. 매번…… 그래, 매번 말이야.
“……설마.”
- 내겐 단검이 있었지. 그건 티어스 가문의 시조가 발견했던 성유물이야. 티어스 가문의 후예가 죽음에 이를 때 그 칼에 피가 닿으면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지. 기억을 전부 가진 채로.
그것은 꽤 유리한 고지였다. 기억을 전부 가진 채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원작의 디아나도 어렵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자신은 고난을 겪고 난 디아나였고, 트리샤는 그저 평범한 열일곱이었다.
“그럼, 바꿀 수 있잖아.”
- 이 회귀엔 제약이 있어. 점차 주어진 시간이 짧아지거든.
“그게 무슨 뜻이야?”
- 넌 두 번 다시 열일곱으로 돌아갈 수 없어. 아마 눈을 뜨면 그보다 더 나이가 많아져 있을 거야. 그런 규칙인 거지.
원작의 디아나는 이미 회귀를 몇 번이고 경험했다. 그것은 성유물의 힘이 가진 제약이었다. 어떻게 해도 모든 것이 일어나기 전의 시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기억이 있으니 뭔가 바꿀 수는…….”
- 무엇을 어떻게 바꿔도 소용이 없었어. 그걸 깨달았을 때, 나는 절망했어. 그러다 내 본래의 수명이 끝나 버렸어. 회귀해도, 더 돌아갈 시간이 없어진 거야.
“그래서…… 널 대신할 사람을 불러들인 거야?”
그게 자신이었던 건가.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의 증오는 한 줌도 되지 않았다. 원작 디아나의 원한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운명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그저 걸을 수 있는 다리가 생긴 것과 재산이 있다는 것으로 평온한 삶을 보낼 생각만 했다. 정작 그것을 대신 내어 준 원래의 디아나는 잊었다.
- 아니.
디아나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그러나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깃들어 있었다.
-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어. 내 사랑하는 아이를…….
“트리샤가 유산시킨 아이 말이야?”
- 그건 나의 다른 인생에서 있었던 일이야. 처음이자 마지막 아이였지.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원작의 디아나는 어떤 절망까지 본 걸까.
- 그 생에서 난 유일하게 아이를 낳아서 길렀어. 사랑하는 내 딸. 그 아이만 있다면 아무런 힘 없이 산다고 해도 행복했어. 그래…… 수많은 생 중에서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기야.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에 온기가 배어 나왔다.
- 그러나 그 아이도 트리샤에게 살해당했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러나 그 후로도 몇 번의 회귀를 반복해도,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아봐도, 나는 그 아이를 낳았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 목소리는 다시 처연해졌다.
- 그래…… 나는 그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아무리 회귀를 반복해도, 이전의 회귀 시점보다 빠른 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을 바꾸려 노력해도, 다른 방법을 찾아봐도 늘 결론은 같았다. 잃은 것은 두 번 다시 되찾을 수 없다.
- 그건, 절망 그 자체였어.
원작 디아나의 목소리와 함께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 공간은 원작의 디아나가 만들어 낸 곳이었다. 방금 피를 토하고 죽었던 자신은 이곳에 와서야 그 고통을 온 영혼으로 느꼈다.
하나의 주파수로 공명하는 지독한 슬픔과 바닥이 없는 절망, 영원히…… 영원히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마침표가 없는 사랑과 죄책감까지 전부. 모든 감정이 그렇게 쏟아져서 격류로 새겨지고 있었다.
“영원히…….”
- 그래, 영원히…… 그 아이를 잃은 거야. 영원히.
영원이란 말이 그렇게 슬픈 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원작 디아나가 품었던 바다와 같은 양의 감정이 밀려왔다.
자신은 그것도 모른 채 순진하게 열일곱의 트리샤를 상대했고, 그저 적당히 자유롭게 살아갈 꿈을 꿨다.
-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난 다시는 회귀할 수 없음을 깨달았어. 이미 절망해 버렸기 때문이지. ……그때, 어떤 영혼이 이곳으로 왔어. 나와 무척이나 닮은 빛을 한 영혼이었어.
“그게…… 나였구나.”
- 아마, 나와 가장 비슷한 영혼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고요한 절망에서 소리 없이 가라앉고 있는 영혼이.
그것은 사실이다. 이 책에 들어오기 전, 자신의 삶엔 공허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해, 난 그 고통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았어. 몰랐어, 정말이야. 나는 그저 예전의 삶이 너무 불행해서, 타인을 잘 몰라서…… 이해할 수가 없었어.”
- 어쩔 수 없지, 넌 내가 아니었으니까.
그저 낯선 세계로 온 것이 두려웠다. 원작의 디아나가 답답하다고만 여겼다. 바보 같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절망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 자신과는 상관없는 여자였으니까.
- 넌 기억 못 하겠지만, 이 피안의 공간에 오는 건 두 번째야.
처음은 나머지 내용을 대강 알고 있던 디아나가 참지 못하고 자결을 했을 때다.
그때도 다행히 성유물을 사용해서 자결한 덕분에 디아나는 소멸하지 않고 여기로 왔다. 항상 지닌 물건이라는 설정은 바로 이 회귀를 위한 것이었다.
- 곧, 너는 눈을 뜰 거야.
“설마 또 회귀하는 거야?”
- 그래.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어. 너는 나이고, 난 너야.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같은 감정의 파도에서 과거의 절망과 아픔을 끌어안은 것은 둘의 영혼 모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