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36화 (36/184)

36화

“디아나!”

재차 이름을 부르자 흐리멍덩한 디아나의 눈동자에 조금씩 의식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정신 차려, 루카스다. 아…… 그렇지.”

루카스는 뒤늦게 제가 두른 로브를 벗어 디아나에게 덮었다. 스치는 체온이 너무 낮았다. 안 그래도 허약하다던 디아나가 견디기엔 가혹한 체벌이었으리라.

“이제 괜찮아. 디아나, 정신 차려. 곧 따뜻해질 거다.”

그러나 루카스의 노력이 안타깝게도 디아나의 고개가 다시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루카스가 한 번 더 디아나의 어깨를 흔들려고 할 때, 아까 봤던 하녀 두 명이 가득 찬 물동이를 들고 왔다. 루카스는 그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봤다.

“가라.”

서늘한 루카스의 눈동자엔 적의가 담겨 있었다. 하녀들은 잠시 머뭇거리며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루카스는 디아나의 어깨를 안아 들었다. 뒤늦게 황태자궁에서 쫓아온 시녀들이 도착해 디아나의 부축을 맡았다. 그들은 미리 데워 둔 황태자궁의 처소에 디아나를 모실 명을 받은 상태였다. 루카스는 제 시녀들이 디아나를 온전히 데려가는 뒷모습을 보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전하, 황후 폐하께오서 분부하신 일이온데…….”

“안다.”

루카스가 툭 던지듯 말했다.

“고하려거든 해라. 아, 내가 더는 열 살이 아니라는 것도 꼭 같이 전하도록.”

황후는 열 살 이후론 루카스를 체벌하지 않았다. 이미 루카스가 선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황실에서 열 살이 넘은 자제를 체벌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 탓도 있었다.

어쨌든 신랄한 경고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가엾은 하녀들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들의 곤란한 처지를 속으로만 한탄했다.

“오늘 밤, 내 궁에 찾아오는 자가 있다면 죽이겠다.”

루카스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자신의 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루카스가 초조한 걸음으로 황태자궁을 떠날 때, 곧 시녀들에게 카를 영애를 부축하기 위해 출발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시녀장은 듬직하고 힘이 좋은 시녀들 셋을 보냈고, 눈치껏 전의를 불렀다. 목욕물을 데우고 침소를 따스하게 데우는 것도 하녀들에게 지시했다.

“걱정이네, 공작 영애는 본래 몸이 허약하시다던데.”

시녀장이 초조하게 읊조렸다. 그때 트리샤가 나타났다. 이미 황태자궁이 발칵 뒤집혔으니 내막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제가 시중을 들게 해 주세요.”

“네가?”

“저, 공작 영애의 친구거든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래서 영애가 아플 때마다 곁에서 간호하곤 했어요.”

그 말에 시녀장이 얼굴에 화색이 피었다.

“그래, 그렇다면 도움이 되겠어. 우선 침대 정리를 맡아 줘. 그리고…… 아, 주방에 수프를 끓이라고 해야겠어.”

“네, 디아나 영애는 우유가 들어간 수프를 좋아해요.”

상세한 트리샤의 지시에 시녀장은 다소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트리샤는 재빠르게 준비된 처소를 단장했고, 베개 높이까지 세심하게 조정하며 곧 도착할 디아나를 기다렸다.

“영애가 오셨다! 어서…… 우선, 따뜻한 물로 씻겨 드려야 해.”

“전의는 아직인가?”

“전하께서 곧 오신다고 해요!”

황태자궁이 소란스러웠다. 트리샤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제 본분을 다했다. 디아나를 닦아 줄 따뜻한 물과 마실 물을 구분해서 두고 물수건도 넉넉히 준비했다.

그리고 확인했다.

“그래,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해.”

소매 안쪽을 꿰매어 만든 아주 작은, 손톱만 한 비밀 공간 안에 자신의 마법이 잘 있는지를.

“이것도 기회야, 트리샤.”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과거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지금의 트리샤에겐 디아나에게 대적할 무기가 있다. 그러니, 미래도 달라질 것이다.

“……반드시.”

***

곧 디아나가 실신한 채로 황태자궁에 도착했다. 시녀들이 데워 둔 물로 디아나를 씻기고 실내복을 입혀서 트리샤가 기다리는 침대에 누였다. 입술까지 파래진 디아나는 무의식 속에서도 오한에 떨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몸을 따뜻하게 해 주셔야 합니다.”

전의가 할 수 있는 말은 한정되어 있었다. 황후의 지시니 원인에 대해서 논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비켜라.”

루카스가 뒤늦게 인파를 헤치고 디아나 곁에 섰다.

“입술이 이렇게 파랗게 질렸는데, 괜찮단 거냐?”

“열을 내리는 약을 처방하겠습니다.”

“그게 다냐니까?”

아직 어떤 병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황후의 처벌을 감당하기에 디아나의 몸은 너무 허약했다.

전의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자신의 조수에게 시럽을 넘겨받아 루카스가 보는 앞에서 디아나의 입술에 흘려 넣었다. 트리샤는 그 모습을 무척 안쓰러운 듯이 보다가 입술 옆으로 흐르는 시럽을 물수건으로 닦아 냈다.

“이곳은 무척 따뜻하니, 이대로 해열제를 드시고 요양하시면 나을 겁니다.”

“……그래.”

그제야 초조한 루카스가 못내 마뜩잖은 답을 뱉었다.

“자, 이제 쓸모없는 것들은 물러가라.”

그 말에 서로 눈치를 보던 이들이 물러가고 시녀장과 하녀 둘, 트리샤만이 남았다.

“전하, 제가 디아나 영애의 곁을 지킬게요.”

“트리샤, 네가?”

“저희는…… 친구잖아요. 전에도 디아나가 몸이 약해서 이렇게 간호해 주곤 했어요.”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를 잘 아는 사람이 곁에 있다니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카를 공작저에서 사람을 데려오려고 해도 이미 황궁의 문이 닫혀 이 시각에 입궁을 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 다행이다. 영애를 잘 간호하면 상을 내리겠다.”

“아니에요, 친구로서 당연히 도와야지요.”

그렇게 말한 트리샤는 다시 물수건을 짜서 디아나의 이마에 얹었다. 조금씩 안정되는 디아나의 숨결이 느껴졌다.

갑자기 왜 황후가 이렇게 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어머니의 성질다웠다. 황태자인 자신도 어릴 땐 곧잘 체벌하던 황후다.

“도대체, 어마마마는…….”

아마 이 일로 공작가에서 정식 항의가 들어와도 그 이유를 내세울 것이다. 어차피 가족이 될 사이에 어른이 꾸짖을 수도 있는 법이라고 하면 친부모도 없는 디아나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은 없었다.

“전하.”

트리샤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뭐냐.”

“송구하오나…… 디아나 영애는 소리와 사람의 기척에 민감해서 회복에 방해가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아, 그렇지. 트리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루카스가 눈짓으로 시녀장과 하녀를 내보냈다. 그런데도 트리샤는 루카스를 계속 올려 보고 있었다. 그제야 루카스는 물러갈 사람 중에 자신도 포함됐음을 깨달았다.

하긴, 황태자인 자신이 지켜보는데 누가 편히 요양하고 누가 편히 간호하겠나. 루카스도 그 정도의 기본적인 상식은 있었다.

“어차피 잠을 자긴 글렀다. 잠시 후에 다시 오마.”

“네, 조금이라도 쉬세요. 전하, 디아나 영애는 괜찮을 거예요.”

“……그래.”

루카스는 한참 디아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행히 입술에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제야 조금 안심된 루카스가 방을 나섰다. 이 세상에서 디아나에게 가장 위험한 인물과 단둘이 놔뒀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였다.

“디아나, 오랜만이야.”

트리샤는 부지런히 더운물을 담은 양동이에 수건을 적셔서 짜내고 디아나의 몸을 닦아 냈다. 이마도, 고운 목덜미도, 팔도. 그것을 반복할수록 디아나의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나니까…… 더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져. 그래, 마치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

속삭이는 트리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트리샤는 이제 열일곱의 욕심 많고 순수한 소녀가 아니었다. 그러니 디아나를 보는 시선은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우린 언제나 이 지점에서 둘이 되는구나.”

디아나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트리샤는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꾹꾹 눌러 그 땀을 닦아 냈다. 누가 보면 정말로 사랑을 담은 애틋한 간호였다.

“그리고 이 순간이 지나면 곧 나는 혼자가 되겠지.”

붉은 눈동자가 서늘해졌다. 트리샤는 이미 온전한 과거를 깨달았다. 그것은 이번 생의 디아나가 멋대로 앞당긴 죽음이 아닌, 원작에서의 죽음이었다. 루카스의 아이를 가진 트리샤를 시기해서 음모를 꾸미다가 유폐된 디아나와 그녀가 자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때, 넌 날 저주했지.”

가증스럽게 죽어 가는 자신을 끌어안는 트리샤를 보고 디아나는 저주의 말을 남겼다. 다행히 목숨이 다해 가는 터라 그 말은 트리샤밖에 듣지 못했다.

‘트리샤…… 지금 흘리는 내 피로 널 저주하겠어.’

평생 그런 말은 입에 담아 본 적도 없는 디아나였지만, 죽음의 순간엔 달랐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쿨럭, 피를 토해 내면서도 디아나의 서슬 퍼런 눈동자가 트리샤를 주시했다.

‘너는 결코…… 내가 될 수 없어.’

그게 디아나의 마지막 말이었다. 트리샤는 그때를 떠올리곤 후, 짧은 실소를 뱉었다.

디아나는 순수한 소녀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트리샤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손에 넣고 싶은 게 뭐였는지.

그건 루카스가 아니었다.

빛나는 황후의 관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트리샤는 디아나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가증스러운 디아나는 그것을 다 알면서도 평생 트리샤를 농락하듯 태연하게 숨을 쉬며 살아왔다.

“디아나, 넌 현명했어.”

실제로 트리샤는 디아나가 될 수 없었다. 디아나의 죽음을 목격한 루카스는 반쯤 정신이 나갔고 희대의 폭군이 되었다. 트리샤는 루카스의 웃음을 찾기 위해 더 많은 미약을 사용해야 했다.

“트리……샤.”

디아나의 입술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이제 정신이 들 때가 됐지. 나도 참, 옛날 생각을 하다 보니 그만 푹 빠졌네.”

느릿하게 디아나가 눈을 떴다. 그 시리도록 투명한 눈동자조차 트리샤가 선망했던 그대로다.

“으…….”

“애쓸 필요 없어. 넌 지금 움직일 수 없는 상태거든.”

깜박, 디아나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실제로 몸에 감각이 없었다. 움직이는 것은 눈과 간신히 힘을 모아서 입을 움직여 말하는 것뿐이다. 그것도 큰 목소리를 낼 힘은 없는 것 같다. 왜 트리샤와 단둘이 낯선 침실에 놓여 있는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넌 황후 폐하께 대들었다가 벌을 받고 쓰러져서 황태자궁에 왔어.”

트리샤가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자, 루카스의 등장이 떠올랐다. 루카스는 몇 번이고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다음에 잠이 깜박 든 것 같았다. 실제로는 기절한 것이리라.

“황태자 전하는 정말…… 자비심이 깊으셔. 그렇지 않니?”

디아나의 차가운 시선이 트리샤를 향했다.

“물론, 나에게 말이야. 내가 널 또다시 죽음으로 몰아넣을 기회를 주셨잖아.”

또다시. 그 말을 들은 디아나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놓칠 리가 없는 트리샤다.

“반응을 보니 너도 알고 있었구나. 맞아, 우리 인생은 이게 첫 번째가 아니야.”

“왜, 그걸 네가…….”

힘겨운 디아나의 목소리에 트리샤가 상큼하게 웃었다.

“모르지. 원래 너와 나 둘 다 과거로 돌아온 것 같아. 덕분에 난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게 됐어.”

회귀는 디아나가 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디아나가 회귀했다면 트리샤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던 건데 미처 거기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다행히, 루카스 전하는 모르셔. 내가 확인해 봤거든.”

디아나는 원작을 읽다가 덮었다. 공허함을 견딜 수 없어 이른 죽음을 택했다. 지금은 두 가지 모두를 후회했다.

자신이 안일했다. 트리샤는 열일곱이라 해서 얕잡아 볼 상대가 아니었다. 평온한 삶을 바라다니…… 트리샤가 존재하는 하늘 아래 그런 것이 있을 수는 없다. 그걸 이제 깨달았다. 자신은 어리석었고, 트리샤는 영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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