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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35화 (35/184)

35화

황후가 실소를 머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제가 황태자비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하오나, 그 전에 황후 폐하께서 결정을 거둬 주신다면…….”

찰싹, 뺨을 올려붙이는 황후의 손길에 나머지 말은 이을 수 없었다. 기다란 황후의 손톱은 디아나의 하얀 뺨에 가느다란 흉터를 남겼다.

뺨을 맞았다는 통증보단, 당혹과 놀라움이 더 강했다.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며 황후를 봤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생각보다 가르칠 게 많겠군.”

정작 황후는 태연히 말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평온한 투였다.

“모니카!”

황후가 부르자마자 어디선가 시녀장이 와서 무릎을 살짝 굽혔다.

“공작 영애의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겠구나.”

그 말에 시녀장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밖에 날씨가 어떠냐.”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 외엔 여느 가을날과 같았다.

“이제 밤이라 쌀쌀합니다, 폐하.”

“그리고?”

시녀장은 잠시 망설였다.

“비가 오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아, 비가 오는 것 같습니다, 폐하.”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곧 다가올 겨울을 알리듯 쌀쌀한 바람만이 불었다. 그러나 황후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시녀장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 비가 참 세차게도 오는구나.”

황후가 창밖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디아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곱씹었다.

“머리를 식히기엔 딱 좋겠어. 그렇지?”

“……그러합니다, 폐하.”

휙, 황후가 등을 돌렸다.

“그럼, 공작 영애가 머리를 식힐 수 있게 도와주거라.”

“……예, 폐하.”

“아무래도 밤새 비가 올 것 같구나.”

“그렇습니다, 폐하.”

그 말을 끝으로 황후가 가 버렸다. 시녀장은 남은 디아나를 보며 짧은 한숨과 난감한 표정을 함께 지었다.

“공작 영애님. 지금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난 그냥 오늘 밤에 출궁하는 게 낫겠어. 마차를 준비시켜 줘.”

아직도 황후에게 맞은 뺨이 화끈거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지친 몸을 누이고 싶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디아나의 눈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곧 그 의아함은 풀리게 된다.

***

시녀장 모니카가 디아나를 데려간 곳은 창가에서 바로 보이는 정원이었다. 시녀장 뒤로 하녀 둘이 따라붙어서 하나같이 곤란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영애님, 용서하십시오.”

모니카가 고개를 잠시 숙였다.

“지금부터는 황후 폐하의 분부를 대신하시는 것이니,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분부라니?”

그런 것이 있었던가. 디아나가 의아한 눈으로 보자 모니카가 어렵게 입을 뗐다.

“여기 꿇어앉으십시오.”

“……뭐?”

황당한 반문에도 시녀장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역시.”

“그러니까 뭘?”

“조금 전, 황후 폐하께서는 영애를 체벌하실 것을 분부하신 겁니다.”

그 알쏭달쏭한 날씨 이야기인가.

“황실의 분들은 모두 존귀한 바, 직접적인 체벌은 할 수 없으나 가르침을 주실 수는 있습니다. 영애는 오늘 밤 내내 이곳에 꿇어앉으셔야 하고, 송구하지만 저희가 1시간에 세 번씩 물을 끼얹으러 오게 될 것입니다.”

“나를…… 체벌한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다. 디아나는 자신의 신분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부분을 어느 정도 믿는 구석으로 삼고 있었다. 게다가 곧 성인이 되는 나이였다. 그런데 체벌이라니.

하지만 황실에선 아니었다. 황후는 제 아들인 황태자에게도 이런 식의 간접적인 체벌을 한 적이 있었다. 디아나에게 못 할 리는 없다.

“체벌이 아니라 황후 폐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니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가 뜨고 황후 폐하의 지시가 있으면 그때 일어서실 수 있습니다.”

시녀장이 설명을 마치고 정원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꿇어앉아 주십시오.”

여기서 거부해도 소용이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황실의 자제들도 이런 식으로 체벌을 받는다는데 공작 영애가 뭘 하겠는가. 디아나는 천천히, 굴욕을 견디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벌써 돌바닥이 차게 느껴졌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시녀장이 말하고 얼마 후, 하녀들이 물동이 두 개를 가져와 양쪽에서 끼얹었다. 덕분에 아까 맞은 뺨이 더는 화끈거리지 않았다.

마치 물에 한 번 빠졌다 나온 것처럼 디아나의 온몸이 젖고 머리카락이 얼굴에 들러붙었다. 디아나는 동상처럼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녀장과 하녀들은 물을 뿌리자마자 돌아섰다. 이제, 혼자 남은 것이다.

그러나 체벌은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물을 맞은 것은 일시적인 충격이었지만, 그 사이로 쌀쌀한 저녁 바람이 불자 살이 에이듯이 추웠다.

야속한 바람은 멈추지도 않고 그렇게 불어 댔다. 그럴 때마다 젖은 옷이 살갗을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돌바닥은 너무 딱딱했고, 바로 앞에 황후궁의 불빛이 너무도 따스하게 보였다. 확실히 자존심을 꺾기엔 효과적인 체벌이다.

“……그래도 지진 않아.”

디아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그리고 지금 이 추위와 굴욕이 그 대가였다.

“괜……찮아.”

쉽지 않을 거라고 각오했다. 땅에 닿은 무릎이 아프고 온몸에 한기가 파고들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아무리 추위가 엄습해도 두 팔로 몸을 껴안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혹여라도 황후가 창 너머로 그런 디아나를 비웃는 것을 상상하면 한 치도 흐트러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것은 디아나가 치를 대가였다.

“난, 굴종하지 않아.”

그것만이 디아나의 마음에 있는 불씨였다. 아무리 찬물을 끼얹어도 이 추위가 아무리 디아나를 괴롭혀도 이 마음은 꺾을 수 없다. 그리고 반드시 아침은 올 것이다.

그 후로 몇 번이고 하녀들이 와서 물을 끼얹었다. 얼음장처럼 차게 느껴지던 물도 이젠 감각이 거의 없었다.

어느 순간 그다지 춥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로감이 디아나를 엄습했다. 깜박,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을 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는 것을 디아나는 몰랐다.

***

모니카는 황후의 전속 시녀장이었다. 가히 황실 최고의 권력을 곁에서 모시는 역할이다. 그러니 자신이 어떤 처신을 해야 할지 잘 알 수 있었다. 제 주인의 표정만 봐도, 숨소리만 들어도, 그 뜻을 읽고 재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모니카의 역할이었다.

“전하께선 아직 깨어 있으시지?”

검은 밤을 달려 모니카가 향한 곳은 황태자궁이었다. 이 날씨에 밤을 새웠다간 딱 봐도 허약해 보이는 영애가 병에 걸리게 생겼다. 그렇다고 모니카가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하지만 루카스는 달랐다. 게다가 이 방법은 황후가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기에 뒤탈도 없을 것이다.

“예, 아직 침소에 들지 않으셨지만…….”

“그럼, 고해 줘. 어서.”

“어, 그게…… 지금 한창 즐겁게 지내고 계신지라. 급한 일입니까?”

모니카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이 잠시 고민하다가 문을 열고 모니카가 왔음을 고했다.

그 후, 모니카가 본 광경은 퍽 기묘했다. 매사에 까탈스러운 루카스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소리를 내어 웃고 있었다. 오죽하면 자신이 왔다는 시종장의 기별도 못 들은 것 같았다. 그 맞은편에는 붉은 머리카락을 한 소녀가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뇨, 그쪽이 아니라…… 이렇게 뒤집으셔야 해요!”

소녀의 목소리는 머리카락만큼이나 톡톡 튀었다. 자세히 보니 루카스의 손에 걸린 것은 털실이었다.

“그렇죠, 여기서 이 틈으로…… 아, 됐어요! 탑이에요!”

“오, 그럴싸한데?”

“전하는 처음이신데도 정말 잘하시네요.”

“뭐, 이런 하찮은 놀이 정도로…….”

어느 부분을 지적해야 좋을지 혼란스러웠다. 황태자가 낯선 소녀와 마주 앉아서 웃는 모습? 몸소 실뜨기하면서 즐거워하는 표정? 오래도록 황후를 보필한 모니카였지만, 루카스의 저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저, 전하. 황후궁의 모니카입니다.”

모니카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여기 온 목적을 떠올렸다.

“뭐냐, 한창 재밌게 노는데.”

“전하께 급히 고할 일이 있어서 왔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루카스의 입이 비죽 나왔다. 곧 제 어머니를 빼닮은 신경질적인 시선이 모니카에게 꽂혔다.

“어마마마껜 내가 이미 침소에 들었다고 해라.”

“그것이 아니오라…….”

그러나 루카스는 이미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의 소녀는 제 머리카락처럼 붉은 실로 복잡한 모양을 자아내고 있었다. 까르르, 소녀의 웃음소리가 울린다. 지금 물을 맞은 채 꿇어앉은 영애가 떠올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카를 공작 영애께서 황후궁에 오셨습니다.”

우연인지, 웃음소리가 뚝 멎었다. 루카스는 그제야 모니카를 제대로 봤다.

“디아나 영애가? 왜 내게 알리지 않았지?”

“황후 폐하께서 급히 부르셨습니다.”

“어째서?”

루카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제 어머니가 급하게 디아나를 불렀다는 것 자체가 수상쩍었다.

“소인이 내막은 모르오나, 황후 폐하께서 영애께 노하시어 가르침을…… 내리셨습니다.”

“뭐?”

성마른 소리를 내며 루카스가 벌떡 일어섰다. 툭, 실 뭉치가 떨어지고 그럴싸한 모양을 자아내던 형태가 단번에 무너져서 엉망으로 엉켰다.

“정확히 뭘 지시하셨는지 말해라!”

“황후 폐하께오선…… 오늘 밤은 비가 오니 영애께서 머리를 식히기 좋을 것이라 하셨사옵니다.”

하, 루카스의 입에서 불쾌한 탄식이 흘렀다.

“……어디냐.”

모니카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아니다, 내게도 익숙한 장소지.”

루카스가 의자에 걸린 로브를 휘둘러서 걸쳤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황후궁을 향했다. 루카스가 떠난 자리엔 붉은 실들만 초라하게 엉켜 있었다. 그리고 붉은 눈동자의 소녀도 함께였다.

“또…… 디아나야?”

실을 쥔 소녀의 손에 핏기가 가실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하, 하하…….”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남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루카스가 마시기 직전에 약초 가루를 타는 것은 꽤 힘들었다. 그 짓을 세 번 성공하고 나자 루카스는 트리샤와 함께 있을 때만 웃음이 늘고 자유로워진다는 착각을 하게 됐다. 이젠 점차 신체 접촉을 늘려 가는 단계였다.

트리샤는 목숨을 걸고 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 계단, 한 계단 제 목숨을 걸고 나아갈 각오였다.

“넌 왜 그렇게 뭐든 쉬운 거니.”

디아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저 이름이면 된다. 트리샤는 제 이름을 몇 번이고, 만날 때마다 루카스에게 다시 알려 줘야 했지만, 디아나의 이름은 이 밤중에 그의 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핫, 하핫, 하…….”

트리샤의 공허한 웃음이 울렸다. 정작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뱉는 트리샤의 얼굴에선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굳은 입꼬리와 허공을 멍하니 주시하는 눈동자뿐이었다.

“정말…… 싫다.”

싸늘한 한 마디만이 오래도록 트리샤 곁에 남았다.

***

루카스는 정원을 가로질러 가다가 하녀들이 물동이를 이고 가는 것을 봤다. 그러자 걸음이 한층 빨라졌다. 제 어머니의 성격은 보통이 아니었다. 황태자인 루카스에게도 체벌하던 어머니가 디아나라고 봐줄 리는 없었다.

“빌어먹을.”

드물게 루카스가 뛰기 시작했다. 황족이라는 신분을 생각하면 참 흔치 않은 일이었다. 덕분에 루카스는 하녀들이 물동이를 들고 오기 전에 가까스로 디아나 곁에 섰다.

하도 오랜만에 뛰는지라 숨이 턱까지 찼지만, 그보다 디아나의 꼴을 보니 확 마음이 구겨지는 것같이 속상했다.

“디아나!”

루카스가 이름을 불렀지만, 디아나는 꿇어앉아 고개를 앞으로 푹 숙인 채 미동이 없었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야…….”

초조한 혼잣말이 울렸다. 오늘 밤은 가을치고는 바람이 참으로 쌀쌀했다. 방금 나온 루카스도 추위를 느낄 정도인데 여기서 물을 맞고 있었다면 한겨울보다 시린 추위를 느꼈을 거다. 그 고통은 루카스 자신도 똑똑히 기억했다.

“영애, 디아나 영애, 정신 차려라.”

루카스가 디아나의 어깨를 흔들었다. 디아나는 반쯤 넋이 나간 것처럼 루카스가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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