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황후인 스텔라는 쉬이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 점은 언니인 그레이스를 똑 닮았다고 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우아하고 교양이 넘쳤지만, 그 머릿속은 어느 상인보다 계산적으로 돌아갔다.
“카를 공작부인이?”
“예, 폐하.”
스텔라는 부채를 살랑였다. 실비아의 목적은 다 알고 있었다. 스텔라의 목적도 어느 정도 일치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디아나를 황태자비로 만드는 것까지였다.
“만나 보지. 응접실로 들라고 해.”
“예, 폐하.”
잠시 후,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응접실에 시종장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황후 폐하 납십니다!”
그 목소리에 실비아가 일어서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황후는 그런 실비아를 흘깃 보더니 먼저 상석에 앉았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선약도 없이 찾아뵌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앉게.”
“예, 폐하.”
실비아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후에 자리에 앉았다. 둘은 초면이 아니었다. 제국의 황후와 공작부인은 동석할 기회가 꽤 많았다. 그런데도 실비아는 새삼 스텔라의 미모에 속으로만 감탄했다. 스텔라에겐 도저히 루카스 또래의 자식이 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생기가 있었다.
“무슨 일로 왔지? 난 빙빙 돌려 말하는 것엔 흥미가 없어서.”
황후의 새초롬한 목소리가 울렸다. 루카스의 직설적인 면은 분명 제 모친을 닮은 것이리라.
“황태자 전하와의…… 혼담에 관련해서입니다.”
“그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국혼 준비는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었다. 적어도 황후에게 약속도 없이 공작부인이 찾아올 문제는 없었다.
“저도 당연히 그리 생각했사옵니다만, 조금 우려되는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폐하를 뵈었습니다.”
“빙빙 돌리는 건 싫다고 했을 텐데?”
“송구합니다, 폐하.”
실비아가 다급하게 사과를 하자 스텔라의 뾰족한 눈매가 그녀를 주시했다.
“실은, 얼마 전 무역선 하나를 디아나 영애가 낙찰받았다고 합니다.”
“……뭘 받았다고?”
스텔라의 가느다란 눈썹이 휘어졌다. 날카로운 반문에 실비아는 자신이 올바른 곳에 찾아왔다고 확신했다.
***
황후가 대노를 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디아나가 황태자비 후보로 낙점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언니인 그레이스가 디아나에게 무역권을 판 것이다.
대공은 에드윈이지만, 이 일에 그레이스를 제외하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 권한을 체스터 대공가에 준 것은 바로 스텔라 자신이었다. 아버지의 종용 탓이었지만.
“도대체…… 황가의 혼약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파르르 황후의 목소리가 떨렸다.
“대공가에선 사업에 나서는 되바라진 여인을 맞이할 수 있는지 몰라도, 황실은 아니야!”
이래서 처음부터 대공가에 무역권을 주는 게 싫었다. 그레이스는 언니라는 이유로, 또한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다는 이유로 은근히 스텔라를 무시했다. 그러나 운명은 스텔라의 편이었다. 결국, 황제와 결혼하여 황태자를 낳은 것은 스텔라다.
“사사건건 이런 식이지, 늘!”
게다가 현재 황제는 병석에 누워서 거의 의식이 없는 채였다. 전권을 가진 스텔라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권유와 언니에 대한 일말의 동정으로 무역권을 넘겨준 것인데, 이건 스텔라를 향한 도전이었다.
“그대도 그렇지. 황태자비로 낙점한 영애를 어찌 관리하면 이렇게 될 수 있는 거야? 황실과의 혼약을 얼마나 쉽게 여겼으면!”
“황후 폐하, 용서하십시오……. 결코, 그런 적 없습니다. 그저 제가…… 제가 무능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
황후가 기가 찬다는 듯이 실소를 뱉었다.
“카를가는 유구한 명문가다. 그래서 낙점한 건데, 이런…… 이런 품위 없는 일을. 그것도 중대사를 코앞에 두고!”
디아나는 곧 열여덟이 된다. 그러면 정식으로 국혼을 진행할 터였다. 그 직전에 이런 짓을 벌이는 게 무슨 뜻인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제가 부족했습니다. 감히 바라건대, 현명하신 황후 폐하께서 바로잡아 주십사…….”
실비아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당장 황후의 분노를 산다고 해도 지금 멈추지 않으면 정말 이 혼약이 파탄 날 수도 있었다. 무심한 벽과 같은 남편에게 대고 이야기를 하느니 황후에게 와서 비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기도 했다.
“디아나를 입궁시켜라.”
“예, 허면 언제…….”
“지금 당장!”
황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온 응접실을 울렸다.
***
디아나는 영문도 모른 채로 황실에서 온 시종들을 맞이했다. 바쁘게 입궁할 준비를 마치고 황실에서 보낸 마차에 올랐을 때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당장 입궁하라는 말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뜻이기에 더 그랬다.
“황후 폐하…….”
그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 디아나가 황후일 때 태후였던 여인이다. 루카스의 신경질적인 기질을 물려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솔직히 이번 일을 벌일 때 어느 정도 그녀와 맞설 각오를 하긴 했지만,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디아나는 황후 앞에서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다. 이미 분위기가 싸늘한 것이 느껴졌다. 황후는 일부러인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디아나를 내버려 뒀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흘렀을 때, 탁 하고 부채를 펼쳤다.
“고개를 들어라.”
그제야 디아나는 뻣뻣해진 목을 바로 들 수 있었다. 일종의 기선제압이었다. 디아나가 황후였을 때 자주 당했던 일이다. 다만, 그 정도는 고난으로도 여겨지지 않을 만한 상황이었기에 잠시 잊고 있었다.
“내가 왜 널 불렀는지 알고 있느냐?”
“……가르쳐 주십시오.”
황후의 금색 눈동자가 디아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자신이 고르긴 했지만, 탁월한 선택이었다. 제국에서 저 정도 미모를 가진 영애는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신분까지 고귀했으며 자신의 아버지처럼 정치에 간섭할 외척도 없다.
그러니 디아나를 부른 것이다. 그 가치를 대신할 영애가 없는 이상, 황후의 선택은 바뀌지 않는다.
“무역권을 얻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디아나는 정해진 일종의 도구였다. 고귀한 혈통으로 더욱 고귀한 황실의 자손을 낳고, 기품과 품위로 다음 대의 황후로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 이상의 것은 필요치 않았다. 그게 사내들이나 하는 사업이라면 더욱, 가치도 쓸모도 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무역선을 사서 출항시켰다지? 사실이냐.”
“예, 사실입니다.”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차분한 대답은 공손했지만, 두려움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
“후…… 변명은 듣지 않겠다.”
아, 잠시 잊고 있었다. 디아나의 대답이나 의견은 중요치 않다. 그냥 존재만 하면 되는 것이다. 황실은 이런 곳이었지. 디아나는 쓴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하지만 가르침을 소홀히 할 수도 없는 법.”
황후는 감히 사내들이나 하는 무역업에 손을 댄 이 맹랑한 영애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일을 벌인 것인지, 왜 그런 것인지…… 그런 데엔 관심이 없는 것이다.
“황실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선택받은 고귀한 숙명. 굳이 지참금을 직접 벌어서 가져와야 할 정도로 하찮은 일이 아니다.”
가끔 권력의 정점에 선 자들은 돈을 하찮게 여겼다. 아니, 돈 자체는 기꺼이 즐겼지만 그 돈을 직접 버는 것을 품위 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스텔라와 그레이스의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했다.
“내일 선대공비를 입궁시켜 모든 권한을 취소하겠다.”
황후는 고민 없이 뱉고는 디아나를 봤다.
“그래, 뭐…… 아무래도 가르침이 필요한 나이겠지. 당분간은 입궁해서 신부수업을 받도록.”
지금 황후는 자신이 대단한 자비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눈동자엔 루카스가 종종 띠던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바로 자비로운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다.
이전엔 이렇게 모자가 닮은 줄 몰랐는데, 모든 것을 아는 지금은 둘의 닮은 점이 디아나의 눈에 확실히 보였다.
“시각이 늦었으니 오늘은 궁에 머물고 내일 출궁해라.”
황후가 부채를 살랑거렸다. 일단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는 느긋한 태도였다.
디아나는 말끄러미 그런 황후를 봤다. 황후는 한눈에도 화려하고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어떤 의미로는 루카스보다 더한 권위가 무섭도록 서려 있었다. 대부분은 그녀의 카리스마와 권력에 기꺼이 수긍했다. 디아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랬었다.
“왜 대답이 없지?”
막상 생각하고 다짐하는 것과 실천은 전혀 달랐다. 자신의 인생을 걷겠다고 결심했고, 목소리를 낼 거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첫걸음을 떼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아무런 연습 없이 실전에 팽개쳐진 기분이었다. 디아나와 황후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있었다. 그 장벽은 자신의 무력감과 나약함을 상기시켰다.
“됐다, 대답 따위. 이제 가 봐라.”
여기서 돌아 나가기는 쉬웠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건 정말이지 달콤한 생각처럼 느껴졌다.
꼭 오늘이 아니어도 된다. 시간은 있으니 천천히 자신의 의지를 다져 가면 되고, 또 다음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편을 늘릴 수도 있었고 도움을 청할 사람이 생길지도 몰랐다. 아무튼, 지금은 아니다. 나중에 조금 더 준비되면 그때 다시 돌아와서…….
“불가……합니다.”
그곳에서 디아나의 상념이 멈췄다. 입이 저절로 목소리를 뱉어 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끝이 파르르 떨렸다.
“뭐?”
“그럴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디아나가 눈을 들어 황후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제 도망칠 길은 없다. 오히려 그게 편한 기분이 들었다. 첫 마디를 뗐으니 이렇게 저질러 버렸으니 조용히 도망칠 기회는 사라진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디아나는 조금 전 했던 자신의 상념을 떠올렸다. 디아나는 이미 다시 돌아왔다.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 있어도 디아나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머리로는 다 알았다. 이해하고 있었다. 다짐했다. 내 인생을 위해서 내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그렇게나 결심했다.
그런데도 도망칠 뻔했다. 다음이 있을 거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질 뻔한 것이다. 순종은 쉽다. 복종은 두렵지 않다. 그렇게 살면 된다. 다음에, 다음에, 또 다음에…… 언젠가 기회가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초목처럼 말라 가면 된다.
“지금 무슨 넋 빠진 소리를 하는 게야?”
“저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꼭 지금이어야 한다. 지금 목소리를 내야 내일도 자신으로 살 수 있다.
“저는 황태자비가 될 수 없습니다.”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다소 떨리는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말했다. 그 장면을 보는 황후의 눈썹이 기울어졌다. 제 귀를 의심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저는.”
디아나는 발톱을 세운 맹수를 마주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또다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누르는 것은 역시 자신의 의지였다.
“저, 디아나 카를은…… 황태자비가 될 수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감히 무슨 말을 지껄이는 줄 알고서 하는 거냐?”
“……네,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황후의 고운 입꼬리가 뒤틀렸다. 짧은 순간임에도 시공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디아나는 물씬 한기가 들어 제 손을 꾹 말아 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손이 덜덜 떨릴 것 같았다. 모든 생, 모든 순간을 통틀어 디아나가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맞서는 것은 처음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저를 황태자비로 낙점하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
디아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누르고 말을 이었다. 1초가 너무 길었다.
“그러나 저는 적합한 여인이 아닙니다. 부디 황실을 위해서라도 결정을 거둬 주십시오.”
“허어.”
황후가 실소를 뱉었다. 아무리 공작가의 영애라고 해도 고작 열일곱인 영애가 자신에게 결정을 거두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실로 상상도 못 할 일이었기에 분노보다 황당함이 먼저 온 것이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