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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33화 (33/184)

33화

트리샤는 제 감정을 숨기며 오히려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루카스의 살짝 비뚤어진 심보를 더 자극할 것을 계산한 터다.

“하오나, 전하…….”

“내게 그 정도의 권한도 없을까.”

“어찌, 제게 그런 자비를…….”

트리샤가 눈썹을 기울이며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루카스를 올려 봤다. 이제 루카스가 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시종장을 들라 해라!”

“예, 전하.”

잠시 후, 트리샤는 황태자의 명령으로 직속 시녀가 되었다. 루카스에겐 그럴 힘이 있었다. 그에겐 참으로 쉽고 간단한 일이다. 트리샤가 이 자리까지 기어오른 수고가 허망할 정도로 모든 일이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만 더하면 마법이 완성될 것이다.

트리샤는 루카스가 임명장에 서명하기 위해 등을 돌린 순간 옷소매에 숨겼던 가루를 루카스의 잔에 살짝 뿌렸다. 가루는 액체에 닿자마자 아무런 흔적도 냄새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트리샤는 마법을 건다.

***

악몽이 디아나의 가슴을 짓눌렀다. 지나간 일들이 악마처럼 디아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것이 꿈인 줄 알아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고, 좀처럼 이 잠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황후가 내게 말을 걸다니 별일이 다 있군.’

루카스의 옆모습은 냉정했다. 자신이 황후 디아나로 빙의한 직후였다. 황제 부부의 사이가 냉랭하다는 것은 원작을 읽어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느낀 차가운 공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모처럼 그대 기분이 좋은 것 같은데.’

사이가 좋다 나쁘다로 정의할 수 없는 관계였다. 아니, 둘의 사이는 나쁠 수가 없었다. 사이가 나빠지려면 어느 정도 가까워진 적이 있어야 하는데 줄곧 평행선을 그리듯 접점이 없는 부부였기에 나쁜 감정조차 생기지 않았다.

‘산책이나 함께할까?’

‘좋아요.’

그때의 디아나는 참으로 순진했다. 사람과 사람의 감정과 교류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책으로 들어오기 전의 디아나에게 가족은커녕 친구, 아니 지인조차 없었다. 그저 이따금 받는 동정과 고독만이 전부였다. 그래서 희망을 품었던 거다.

자신이 디아나가 되면 바꿀 수 있다고. 마음을 열고 대하면 서로를 알아 갈 수 있을 거라고. 그게 물거품 같은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루카! 내가 오는 길에 신기한 걸 발견했는데…… 어머, 황후 폐하.’

바로 드레스 자락을 올리며 예를 갖추면서도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는 오만하게도 반짝였다. 솔직히 인정한다. 그녀는 빛나고 있었다.

‘괜찮다, 넌 황후의 친구이기도 하니. 우리끼리만 있을 땐 예법은 잊자고.’

‘그래도…….’

‘리샤, 넌 우리의 친구야. 황후도 당연히 이해할 거다.’

모두가 디아나에게 이해를 강요했다. 그렇게 언제나 디아나의 평정을 멋대로 오해했다.

‘하긴, 디아나는 내 친구니까. 우리 셋이 친구라 너무 행복해.’

‘그래. 게다가 황후는 적당히 무심하고 리샤 너는 늘 톡톡 튀니까, 참 균형이 절묘하기도 하지.’

사람은 상처를 입으면 아프고, 그것은 마음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주지 않았다. 표현하지 못했던 디아나의 탓일까. 늘 쓰디쓴 감정을 혼자서 삼키고 고요한 눈동자를 했던 것이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를 정도로 나쁜 죄였을까.

‘아, 맞다. 루카 있잖아, 아까 오다가 봤는데…… 별궁의 개가 드디어 새끼를 낳았어!’

‘그 점박이 개 말이야?’

‘응, 근데 너무 신기한 게…… 각각 무늬가 다른 거 있지? 보러 가자!’

끊임없이 재잘대는 트리샤와 팔짱을 끼고 나서는 루카스. 그리고 혼자 남겨진 디아나.

그런 광경은 계속해서 반복됐다. 무시를 당할 때마다 디아나의 마음엔 더 견고한 벽이 쌓였다. 이윽고 자신이 황후의 관을 쓰기 위한 부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을 때였다.

디아나는 그저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주 조금 서툴렀다. 트리샤처럼 먼저 환하게 웃으며 재잘댈 줄을 몰랐다. 매사에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것은 좀처럼 바꿀 수 없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저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처음엔 그랬다.

점차 피폐해지는 디아나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창백해졌고 말을 하지 않는 입술은 말라 갔다. 무거운 황후의 의장을 하고 머리에 관을 쓴 채 루카스 옆에 앉은 자신은 인형이었다.

그때야 알았다. 자신은 그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음을. 그들이 내게서 생명력을 모두 앗아 갔음을.

단 한 명이라도 디아나에게 다정한 말을 걸어 주었다면. 진심으로 디아나와 눈을 맞춰 주었더라면. 디아나의 침착함을 지루하다 여기지 않고 하나의 성격이라고 이해해 줬다면. 한 명이라도. 한 번이라도…… 그랬다면, 디아나가 생명력을 잃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디아나는 죽어 갔다. 모두가 디아나를 죽였다.

아무도 몰랐다. 아무도.

디아나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것을,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하아, 하아.”

간신히 악몽에서 깬 디아나가 제 몸을 더듬었다. 지금의 자신이 열일곱이라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그 악몽은 끝났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가슴이 짓눌려 질식할 것 같았다.

“괜……찮아.”

여기는 황실이 아니다. 회귀 전의 일은 악몽이다. 악몽은 디아나를 죽일 수 없다. 디아나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두 번 다시 그곳엔 돌아가지 않아.”

디아나는 지금 주어진 것으로 안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목소리를 낼 때였다. 아프면 아프다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당신이 정말로 싫다고. 눈을 똑바로 맞추고 말할 것이다. 지금은 그런 디아나를 정면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도 있었다.

“난, 변할 거야.”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가질 거다. 욕심도 낼 거다. 부당한 대우는 참지 않을 거다. 가고 싶은 길을 걸을 거다.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 세상과 맞서야 한다면, 그래. 기꺼이 맞설 것이다.

“두렵지 않아.”

최악은 이미 겪었다. 초목같이 살던 디아나는 이제 없다. 목소리도 눈물도 아끼지 않을 거다. 실제처럼 생생했던 악몽은 두 번 다시 디아나의 발목을 잡지 못해야 한다.

“이건 내 인생이야.”

디아나가 자신을 향해 속삭였다. 이젠, 그것을 세상에 알려 줄 때다.

***

선대공비는 아직도 대공가의 모든 일을 살폈다. 에드윈이 어릴 적부터 그녀의 주도로 이끌어 온 일이었으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아직 에드윈은 스물의 젊다 못해 어린 나이였고, 보다 현명한 이의 주관이 필요했다. 오늘도 그레이스는 대공의 집무실에 행차해서 새로운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의 고운 눈썹이 찌푸려 들었다.

“가만. 새로 나온 무역선을 카를가에 내주겠다고?”

“아, 맞습니다.”

에드윈은 일부러 무심한 표정을 했다. 제 속셈을 그레이스가 알면 일이 피곤해질 것이다. 하긴, 어머니로서 지금 에드윈의 신분에 위험을 무릅쓰는 걸 좋아할 리가 없다. 그 이유가 단지 디아나라는 영애 하나뿐이라면, 더욱.

“이건, 지금의 공작이 아닌 디아나 영애를 특정한 건데…… 그 아이는 황태자비가 될 몸이 아니냐?”

“그렇죠.”

“그것도 열일곱의?”

“……네. 곧 열여덟 살이 됩니다만.”

상당히 당혹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선대공비 그레이스는 제 아들을 신용했다. 에드윈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제안을 했을 리는 없다. 적어도 그레이스는 아들을 그렇게 키웠다.

“물론, 날 설득할 만한 이유를 준비했겠지?”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강인한 턱선은 부친을 꼭 닮았다.

“디아나 영애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었지만, 유산을 갖고 있습니다.”

그레이스가 무심한 눈길로 에드윈을 응시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단 뜻이다. 당연히 에드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국혼 전에 개인의 재산을 움직이는 건 아무런 해가 안 됩니다. 상대가 황태자비가 된다면…….”

이 부분에서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말을 잠시 멈췄다.

“대공가에도 더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흐음.”

선대공비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차기 황후와 좋은 관계를 맺어 두는 건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루카스의 시대가 올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황후인 스텔라와 자매 간의 골을 메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 명쯤은…… 대공가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이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예,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그거였습니다.”

“드디어 너도 정치적인 행보라는 것을 가겠다는 것이냐.”

그레이스는 복잡한 심경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이것은 단순한 사업적 계약을 넘어선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그게 선대공비의 계획과 같은 방향인지였다. 그러나 에드윈은 고요한 미소로 그레이스의 우려를 막았다.

당장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선대공을 닮은 에드윈은 곧은 심지만큼 입도 무거웠으니, 차분히 관찰하는 게 능사였다.

“배의 대금은 오직 제국의 골드로만 받을 거다.”

“그래야죠.”

어찌 됐든 거래는 성사됐다. 남은 것은 그 거래가 가져올 결과였다.

***

곧, 디아나의 유산에서 절반가량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 실비아는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무심한 남편은 그것이 형님의 유지라는 소리만을 할 뿐, 디아나의 몫에 손을 대지 말라는 경고 외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어차피 황태자비가 되면 유산 따윈 필요도 없을 텐데!”

실비아가 누운 채로 분통을 터트렸다. 디아나는 현재의 황후가 낙점한 황태자비 후보였다. 제국의 황실에선 지참금을 받지 않는 것이 관례였고, 대부분 황실에 결혼을 통해 들어간 영애들은 제 몫을 가문에 남기고 갔다.

“그 잠깐을 못 참고 유산을…….”

디아나가 황태자비가 될 때까지만 기다리면 어떻게든 답이 생길 거라 여겼는데, 이렇게 되면 실비아의 계산이 흔들렸다. 그것도 자신의 편이라고 여겼던 그레이스 선대공비가 내준 허가라고 했다.

“내가 얼마나 아양을 떨고 재물을 갖다 바쳤는데.”

생각할수록 분했다. 우아하고 인자한 선대공비는 늘 빠져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실비아의 호의를 마다하진 않았지만, 어떤 의무도 지지는 않는 셈이었다.

“완전히 당했어!”

“마님, 고정하셔요.”

시녀장인 도나의 말에도 실비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고정을 하게 생겼어? 우리 애들 아카데미는 무슨 돈으로 보내고, 성은 뭐로 증축하냔 말이야!”

“그러니 더욱 마님이 고정하셔야지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도나의 말에 실비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실비아의 측근이었다. 지금 이렇게 누워서 열을 낼 바엔 다른 길을 타개하자는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그래.”

선대공비가 실비아의 입장을 무시한 이상 그쪽에 기댈 생각은 버려야 한다.

“어서 준비해라.”

실비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실비아가 기댈 곳은 남았다.

“바로 입궁해야겠어.”

황후에게 디아나를 소개한 것은 선대공비였지만, 그 역할은 이제 끝났다. 애초에 결정권자는 황후다. 선대공비가 없어도 일은 진행할 수 있었다. 실비아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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