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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32화 (32/184)

32화

황실은 해가 떠 있으나 져 있으나 상관없이 언제나 분주했다. 궁마다 그 주인이 있었고 한 명의 주인을 위해 고용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앗, 제가 거들게요.”

트리샤가 시녀의 손에 들린 먼지떨이를 낚아챘다. 시녀는 깜짝 놀라 먼지떨이를 다시 찾으려고 했지만, 트리샤가 벌써 의자까지 가져와 그 위에 올라 발돋움을 했다.

“황태자궁에선 일단 일하지 말고 계시라는 명이 내려졌어요.”

하녀가 곤란한 듯이 말했다.

“지금은 시녀의 신분도 아니고, 일종의 손님이신데…… 이런 궂은일은 하지 마세요.”

끔찍한 사건으로 부모를 잃었다는 열일곱의 소녀는 절망에 빠져 있기보단 주위의 사람들을 도우려 나섰다.

처음에 트리샤가 왔을 땐 이미 그 사건에 대한 소문이 파다해서 모두가 종기처럼 건드리지 않으려 피하기만 했는데, 어느샌가 트리샤는 그들의 사이에 녹아들었다.

“여기서 지내면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어요. 이래야 제 맘이 더 편해서 그래요.”

어쩜 저리 속이 깊은 아이가 있을까. 하녀는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트리샤가 황태자궁의 별궁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황태자궁은 루카스가 머무는 본궁과 손님을 맞이하거나 고용인들이 지내는 별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거리는 무척 가까웠지만, 목적은 완전히 다른 곳이다.

“아무튼, 트리샤 영애는…….”

“전 가만히 있는 게 더 힘들어요. 정말이에요.”

트리샤의 안타까운 사연이 황태자에게 전해지자,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이곳 별궁에 머물라는 명이 떨어졌다. 시종들과 시녀들, 아예 궂은일을 도맡은 하녀들은 그 불행한 사건의 생존자가 이곳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꺼리는 눈치였지만 지금은 모두가 트리샤를 응원했다.

“그래도 이렇게 하녀들이나 하는 일은…… 저희가 혼이 나요.”

“그래요, 트리샤 영애.”

그때, 마가렛 부인이 다가왔다. 하녀가 노골적으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트리샤는 마가렛 부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하겠다고 한 거니까 혼내지 말아 주세요.”

마가렛 부인은 그런 트리샤를 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고 말았다.

“하지만 정말로…… 손을 놓고 있는 게 어색해서 그래요.”

붉은 눈동자가 곤란한 빛을 띠었다. 마가렛 부인은 트리샤의 어머니뻘이었다. 그녀에게 자식은 없었지만, 트리샤가 안쓰러운 마음은 충분했다. 아마 저 어린 소녀는 충격적인 사건을 잊고 싶어서 일부러 몸을 혹사하려는 것 같았다. 그것을 무작정 말리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황태자 전하의 은혜로 잠시 여기에 머물고 있지만, 제 몫은 하고 싶어요.”

트리샤가 되찾은 것은 자신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었다. 회귀 이전 루카스와 친구 아닌 친구 관계를 오래 유지했던 트리샤기에 누구보다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루카스는 한없이 자기중심적이고 좁은 세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에게 현실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과 처참한 일들은 책 속의 신화보다 더 먼 이야기였다.

“비록, 전하를 직접 뵌 것은 아니지만…… 이미 큰 은혜인걸요.”

그리고 트리샤의 예상대로 루카스는 트리샤를 별궁에 머물도록 했을 뿐, 한 번도 만나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루카스에겐 그런 사건에 대해 공감할 경험도 지혜도 없었다. 게다가 루카스는 불행을 따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무관심할 수밖에.

“영애, 고개를 들어요.”

마가렛이 따스하게 말했다. 이 가엾은 아이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선물은 하나밖에 없었다.

“굳이 뭔가 일을 하고 싶다면……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뭔가요?”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마가렛 부인은 자신에게 꽤 호의적이었다. 그녀는 신분이 천한 하녀들의 사연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고 별궁 모두를 다독이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었다. 마가렛이 차기 시녀장 후보라는 것은 공공연한 소문이 아니었다.

“트리샤 영애도 알고 있겠지만, 황실에서 시녀로 일할 수 있는 것은 귀족 여성뿐이죠.”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하녀와는 달랐다. 시녀는 고귀한 신분인 황족의 곁에서 직접 시중을 들고 때론 말 상대가 되기도 했다. 자연히 그들은 귀족이어야 했다.

“네에…….”

작위가 변변치 않거나 귀족 영애이면서 사연을 가진 자들, 혹은 이혼을 한 귀족 여인들은 종종 시녀가 되어 나머지 삶을 꾸려 가곤 했다.

그러나 트리샤가 한번 당했듯이, 시녀 중에서도 신분이 갈렸다. 트리샤의 한미한 신분으로는 고작 시침 시녀가 전부였고, 그것도 겨우 루카스의 안전에서 디아나의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 벗어났다.

계획은 디아나가 황태자비가 되는 것을 기다리는 거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럼 끝이야.”

트리샤는 바로 그것을 겨냥했다. 사건이 일단락되면 트리샤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럼 루카스를 만날 기회조차 사라질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트리샤는 이미 모든 기억을 떠올렸다. 과연, 입궁할 디아나가 자신을 반갑게 생각할까.

“나한테 기회를? 네가 그럴 리가 없겠지.”

하지만 이곳에 온 걸 계기로 황태자의 시녀가 된다면…… 이미 회귀 전에 친구였던 루카스를 이끄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제 트리샤는 자신에게 확신을 가졌다.

“그러니 굳이 일을 거들고 싶다면, 하녀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시녀들이 하는 일을 거들어 줘요.”

“그래도…… 될까요?”

트리샤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본래 트리샤의 신분으로 웃전 가까이 다가서는 시녀가 되는 것은 어려웠다. 특히 여긴 황태자궁이고, 황태자처럼 특별한 신분의 곁에 설 시녀는 개중에서도 신분과 출신을 따졌다. 게다가 트리샤는 시녀로서 거의 교육도 받지 않은 상태니 사실상 가망성이 없었다.

“음, 내 일을 도와주면 좋겠군요. 아까 내가 부탁할 게 있다고 했죠?”

“앗, 네…….”

트리샤의 가슴이 기대감으로 쿵쾅거렸다.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편히 지낼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인데도 자꾸 일하겠다며 설친 것은 다 바라는 것이 있어서였다.

“황태자 전하의 간식을 가져다 드릴 시간인데, 내가 다른 일로 바빠서요.”

그 순간 트리샤는 기쁜 티를 내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제가…… 가도 될까요?”

“물론이죠. 황태자 전하도 또래와 이야기를 나누면 기분이 좋아지실 거예요.”

루카스의 기분을 맞추는 건 자신이 있었다. 다만, 그 기회를 손에 넣기 어려웠을 뿐. 그래도 트리샤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마가렛에게 자신의 인상을 좋게 심어 주기 위해 동분서주한 보람이 있었다.

잠시 후, 황태자궁의 본궁에 도착한 트리샤는 황태자가 있다는 응접실 문 앞에 은쟁반을 들고 섰다. 올망졸망 색이 어여쁜 쿠키는 이전 날을 떠오르게 했다.

“전하께 고해 주세요.”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이 고개를 끄덕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트리샤는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쟁반을 들고 루카스의 곁으로 향했다. 루카스는 정원을 보며 등을 돌린 채였다.

“황태자 전하, 간식을 내왔습니다.”

“……거기 둬라.”

루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심하게 답했다. 시녀라면 여기서 예를 올리고 방을 나서면 된다. 평범한…… 시녀라면 말이다.

“한 가지 더 드릴 것이 있습니다.”

트리샤는 용기를 냈다. 미간을 찌푸린 루카스가 감히 나서는 무례한 시녀에게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눈동자가 커졌다.

“너는…….”

“트리샤 블랑입니다, 전하.”

루카스는 아직도 제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붉은 머리카락이 주는 강렬한 인상은 희미해지지 않았다. 트리샤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선명해서 한 번 보면 거의 잊히는 일이 없었다.

“그래, 트리샤. ……아, 그래.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고 했지.”

트리샤는 시선을 떨궜다. 그러고는 최대한 가련하게 턱을 끄덕였다. 루카스는 내키는 대로 트리샤를 별궁에 두라고 했지만, 그 후로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남에게 관심이 없는 루카스에겐 그게 한계였다. 그러나 지금은 트리샤가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왜 네가 여기서 시녀의 일을 하고 있지?”

“그건…… 제가 자청했어요.”

“어째서?”

루카스의 표정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바로 본인을 만나기 위해서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뭔가를 하고 있을 때면 그나마 기분이 나아져서요.”

“아…… 그랬군.”

잠시 정적이 흘렀다. 트리샤에겐 단 1초의 정적도 치명적이다.

“아까 전하께 더 드릴 것이 있다고 한 것은…… 감사입니다.”

“응?”

“그날 일로…… 하늘 아래 기댈 곳이 하나도 없는 제게 지낼 곳을 마련해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반드시 감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아아.”

루카스가 괜찮다는 의미로 한 손을 들었다. 트리샤는 붉은 눈동자로 차분하게 루카스를 보고 있었다. 하늘 아래 기댈 곳이 없다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문득 루카스는 충동적인 감정을 느꼈다. 아주 가끔 제 기분에 따라 등장하는 동정이었다.

“함께 차나 한잔할까?”

“……영광이에요.”

둘은 티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대각선으로 앉았다. 멀고도 가까운 거리였다. 이 자리에 앉기 위해 트리샤가 얼마나 갖은 노력을 했는지 루카스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을 모두 잃었으니, 힘들겠군.”

“네, 하지만 저와 제 어린 동생은 살아남았고 전하의 자비로 근위대에서 반드시 범인을 잡아 준다고 했으니…… 그것으로 조금이나마 마음을 달랠 수 있었어요.”

루카스 덕분이 아니다. 그만큼 끔찍하고 특수한 사건이기 때문에 황궁 근위대에게 넘어간 것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진범을 잡는 일은 없다. 당연히 트리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카스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약간의 만족감이 고이는 것을 보자 안심이 됐다. 아무래도 루카스는 회귀 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모양이다.

“내가 한 것은 별로 없다.”

“아뇨, 저는 전하의 자비가 아니었으면 어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두려워요.”

루카스는 이런 식으로 자신을 확인받는 것에서 만족을 찾았다. 트리샤는 루카스의 가려운 부분이 어딘지 이미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전하, 염치가 없지만, 청을 하나 올려도 될까요.”

“뭐지?”

“어차피 제게 기댈 가족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이곳에서 시녀로서 전하를 보필할 수…… 있을까요?”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그렁그렁했다. 제 무릎 위에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트리샤는 참으로 가엾어 보였다. 게다가 루카스를 올려 보는 시선은 마치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절실했다. 마치, 루카스가 아니면 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아, 아니에요. 제가 그만 실언을 했어요.”

푹, 트리샤가 고개를 떨궜다. 루카스는 이런 상황에서 호기심을 느낄 것이다. 전에도 그랬듯이.

“저의 무례와 실수를 용서해 주세요. 너무 절박한 마음에 그만.”

“왜? 뭐가 실수라는 거지?”

“저처럼 보잘것없는 신분이…… 어찌 감히 전하처럼 귀한 분을 곁에서 모실 수 있겠어요. 저는 그저 하녀라도 좋으니, 전하의 은혜를 갚으며 살 수만 있다면 좋아요.”

그러고 보니 트리샤의 집안은 한미했다. 겨우 잘 쳐줘서 이름만 귀족이라는 정도다.

“제가 이뤄질 수 없는 소원을 빌어 버렸네요. 잊어 주세요.”

루카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누가 이뤄질 수 없다고 했지?”

“……네?”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가련하고 애절하게.

“황태자인 내가 고작 시녀 하나 마음대로 들이지 못할 리가 없잖나.”

“아, 제가…… 실언을…….”

“아니다.”

루카스는 자존심이 대단했다. 태생부터 그랬고, 그것을 과시하는 성격이다. 트리샤는 그것을 아주 살짝만 긁은 거다.

“너는 불행한 일을 겪었지. 제국의 황태자로서 그 정도도 품을 수 없다면 안 될 말이야.”

“전하…….”

“게다가 우린 이미 면식이 있다. 넌 비록 신분이 한미하더라도 디아나 영애의 절친한 친구이니 그보다 더 확실한 보증은 없지.”

울컥, 트리샤의 마음 한구석이 북받쳤지만, 표정에 드러내진 않았다. 어쨌든 디아나는 이곳에 없고 트리샤의 보증수표로서 도구의 역할만 하는 것이니 트리샤가 이긴 거다.

“내 당장 황태자의 권한으로 널 나의 직속 시녀로 삼겠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루카스의 오만한 선언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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