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31화 (31/184)

31화

“전하…….”

디아나가 아무도 모르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 순간, 에드윈은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서둘러 디아나의 뺨을 쥔 에드윈이 디아나와 눈을 맞췄다. 물기 어린 푸른 눈동자가 촉촉했다. 에드윈은 망설이지 않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디아나와의 간격을 좁히고, 그 입술을 탐하고 싶었다.

“아직도 이렇게 꿈에서 절 탐하시나요?”

문득 에드윈이 멈췄다. 갑자기 디아나의 체온이 싸늘하고 딱딱하게 느껴졌다.

“정말 나쁜 남자네요.”

싱긋, 매일 밤 에드윈을 괴롭히던 꿈속의 디아나가 아름답고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 부분에서 꿈이 끝났다. 에드윈은 식은땀을 흘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창문은 열린 채가 맞았지만, 디아나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모두 에드윈의 망상이 빚어낸 짓궂은 꿈이었으니.

“하…….”

허탈한 탄식이 침실을 공허하게 울렸다. 그의 본능과 욕망은 충실하게 디아나의 달콤한 살결을 그려 냈다. 동시에 그것을 비웃는 이성은 디아나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을 비웃었다. 둘 다 에드윈 자신의 무의식이었다.

“그런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군.”

낮은 혼잣말이 울렸다. 오늘 밤도 에드윈은 제 몸에 찬물을 끼얹어서 간신히 열기를 가라앉혀야 할 것이다. 시리고 시린 가을밤이었다.

***

공작저에도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그 후로 며칠이 흘렀다. 디아나는 책을 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책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샬롯과 그레이 집사장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런 부분에 도움을 주기엔 어려웠다.

때마침 에드윈이 좋은 날을 골라 티타임을 요청했다. 한 번 찾아온 적이 있으니 아무래도 자연스럽고 수월했다. 디아나가 기꺼이 반가운 마음으로 그 요청을 수락했다.

“공작저에 초대를 받고 오는 건 처음인 것 같군.”

에드윈은 정원의 가로수 아래 자리 잡은 티 테이블 앞에서 웃으며 첫마디를 건넸다. 디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예를 갖췄다. 일종의 심리적인 저지선이었다. 그러나 이미 에드윈의 입가엔 따스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내가 요청했으니.”

에드윈이 손을 뻗어 디아나에게 먼저 자리를 권했다. 디아나가 천천히 자리에 앉자 그제야 에드윈도 자리에 앉았다. 딱 맞게 데워진 찻주전자에서 흐린 김이 났다. 덕분에 같이 흐려진 시야 너머로 보이는 디아나에게서 지난밤의 발칙한 꿈이 떠올랐다.

“뭔가…… 새로운 소식이 있나요?”

디아나의 순수한 물음에 에드윈은 애써 욕망을 지워 냈다.

“블랑가의 사건에 대해서라면 딱히. 다만, 아직도 트리샤 블랑은 황실에 머무는 모양이야.”

“그렇군요.”

디아나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평범한 모습조차 에드윈에겐 너무 또렷했다.

“조사 과정에서 알려진 사실인데, 시녀인 그녀가 휴일도 아닐 때 집에 간 이유는 궁에서 호된 고초를 당했기 때문이라더군. 평소 황태자 전하의 분부를 따르다 당한 고초라던데.”

어쩜 이런 예상은 크게 빗나가질 않는다.

“황태자 전하께 그 이야기가 들어갔고, 당분간은 별궁에서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보살펴 주실 것 같다.”

“정말로 잘된 이야기네요.”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결국, 셋의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 나가려면 그 둘을 내버려 두는 게 나았다.

또한 동정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모로 수상한 점은 있었지만, 트리샤는 열일곱이다. 설마 그 나이에 그런 끔찍한 짓을 계획했을 리가 없고, 이 사건에 한해서는 트리샤가 피해자인 것이다.

“영애는…… 정말 황태자비의 자리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군.”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가 디아나를 담았다. 그도 그럴 게, 디아나는 황태자비로 내정된 인물이었다. 아무리 친구였다고 해도 루카스 곁에 다른 여인이 있다는 것을 저리 태연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네.”

디아나는 웃는 것도 아니고 정색하는 것도 아닌 얼굴로 에드윈을 바라봤다. 이럴 때마다 에드윈은 저 푸른 눈동자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리고 만다. 그리고 품어서는 안 될 희망을 품게 된다.

“그리고 그 방법을 찾으려 하죠, 여전히.”

디아나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와 고요하고 맑은 눈동자로 에드윈을 다루고 있었다. 그 사실을 스스로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무언가 쟁취하기 위해선, 수단이 필요했다.

어쩌면 에드윈도 그 사실을 알 것이다. 그 정도 되는 사람이 쉬이 속는다고 여길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에드윈은 자청해서 디아나가 제시하는 흐름을 따르고 있는 거였다.

“그동안, 전하의 조언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요.”

책의 기록은 정직했다. 그 역사의 기록을 따라서 디아나는 자신이 이 결혼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다.

황태자의 반려로 내정된 후 그 사실이 번복된 예는 의외로 꽤 있었다. 극단적인 역모나 당사자의 사망이 아닌, 디아나도 시도할 방법으로는, 진부하지만 건강의 문제가 있었다. 에드윈이 말했던 그대로였다.

“어릴 때부터 아주 허약한 아이였대요, 저는.”

희미하고 씁쓸한 미소가 디아나의 입술에 어렸다.

“그건 타고난 기질이었던 건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아요.”

물론 황실에서 결혼이 내정된 여인의 건강 문제까지 배려해 주진 않는다. 그들이 가장 까다롭고 필수적으로 여기는 것은 후계자의 생산이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어떤 혼약도 금세 파탄이 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전 황실의 후계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인 것 같더라고요.”

디아나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저런…… 그랬나?”

에드윈이 낮게 말했다.

“네. 이미…… 의원에게 여러 번 확인한 바랍니다.”

저명한 의원을 불러다 자꾸 진찰을 시키고 헛된 증상을 반복해서 주입했다. 어차피 이 시대의 의사는 여성의 내밀한 곳까지 진찰할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경험에서, 지난 기록에서 불임의 징조를 알고 있었다. 디아나는 자연스럽게 한두 가지 증상을 흘렸고, 일부러 이번에 찾아온 달거리를 숨겼다.

“아마 전의도 같은 진단을 내릴 거예요.”

에드윈은 디아나의 빠른 움직임에 내심 놀랐다. 이 시대의 영애가 하기엔 어려운 행동이었다. 아무리 에드윈이 힌트를 줬다고 해도 이렇게 먼저 나서 빈틈없는 대처를 한다는 것은 더욱 그랬다.

“그대는 늘 나를 놀라게 하는군. 곧 황실도 놀라겠지.”

두 가지의 이유는 달랐다. 디아나에겐 둘 다 나쁘진 않았다.

“이것은 저의 운명이겠죠.”

그리고 그 운명은 디아나 자신이 정했다. 원치 않는 결혼을 해서 입궁해도 그 너머가 어떤지는 뻔했다.

이미 한 번 보고 겪은 일이다.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루카스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지독한 환멸을 겪었던, 어찌 보면 자신을 자살까지 몰아갔던 것이 루카스다. 그 바닥을 봤는데 다시 그 결혼 생활을 재현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전 불행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어요.”

차분한 디아나의 목소리가 에드윈에게 닿았다. 디아나의 말은 그저 생각이 아닌 자신의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같은 사람의 같은 목소리라도 그 차이는 컸다.

“그대는 아직 불행을 결정짓기엔 이르다.”

“진짜 불행은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거예요.”

“마치 겪어 본 것처럼 말하는군.”

디아나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에드윈의 추측은 맞았다. 황후로서의 디아나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그럴 거라는 상상을 했어요.”

그전, 그녀는 남의 동정에 기대서 의미 없는 생을 살았다. 말 그대로 생존이었다. 가족도 재산도 없는 장애인. 정부의 지원에 기대서 살아가야만 하는 남들의 짐. 그게 자신이었다.

의원에게 불임을 암시하는 증상을 말해 주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디아나는 황후로 사는 동안 유산을 겪기도 했다. 전의들은 집요하게 디아나의 달거리와 내밀한 것들을 캐묻고, 연구거리로 삼았다. 그들이 입에 올린 심려들은 아직도 생생했다.

증상은 지어낸 것이 아니다. 두텁고 오랜 상처의 흔적을 더듬은 것뿐이다.

“저는 평생 온실 속에서 살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영애의 신분은 그런 걸 걱정할 필요가 없을 텐데.”

“대공 전하는요?”

의외의 곳에서 나온 반문이 에드윈을 찔렀다.

“전하는 아무런 걱정이 없으신가요? 미래나 자신이 나아갈 길에 대해서요.”

에드윈은 잠시 말을 멈추고 디아나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누구도 감히 대공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보통 영애였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친우라 여기는 자들에게도 무리였다.

“내겐 대공의 책무가 있지.”

딱 부러지는 대답이었다.

“돌아가신 선친의 유지를 이어야 하고 체스터 가문을 지켜야 할 의무가.”

“늘…… 고민하시지요? 성실한 분이니까요.”

에드윈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디아나의 질문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렇군. 영애도 돌아가신 선친의 유지를 잇고 싶을 텐데, 내가 너무 편협했어.”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디아나의 입꼬리에 다시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다만, 저는 다른 영애들처럼 혼인으로 유지를 이을 수 없으니…… 귀족가의 후계자가 되는 방법으로 가문을 지키고 싶어요.”

아무리 개방적인 에드윈이라지만, 그 말엔 놀란 기색을 숨기기 어려웠다.

“이상한가요?”

그런 경우는 생각지 못했다. 디아나가 나이에 비교해 무척 조숙하고 속이 깊으며 때론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도 그랬다.

순간 에드윈은 자신이 상대적으로 어리석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나뿐인 자식이 선친의 뜻을 잇고 싶다니, 이상하지 않을 일이어야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에드윈은 그나마 말이 통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의 성정도 있었지만, 그의 어머니인 선대공비가 실질적으로 체스터 대공가를 이끌고 있었다. 자연히 에드윈은 그 모습을 당연히 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대의 곁은 내 것이다. 그것만큼은 타협할 수 없어.”

“그건…… 이미 정해졌잖아요.”

싱긋, 디아나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그 미소를 보면 에드윈은 뭐든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 무역선의 자리가 하나 비었다.”

디아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에드윈을 봤다.

“제국의 무역선은 특별한 허가를 받은 자들만 가질 수 있지. 얼마 전, 그 권한을 대공이 갖기로 했다. 즉, 내가 결정하는 셈이지.”

그건 엄청난 이권이 따라오는 결정이었다. 현재 제국의 무역은 금광보다 더 많은 이윤을 낸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 무역권을 얻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흥망성쇠를 점칠 수 있다고 했으니.

“저는…… 딱히 경제적인 도움을 바란 것은 아닙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그대에게 먼저 주고 싶다.”

그건 스무 살 사내로서 에드윈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아니면, 그대가 진정 원하는 것은 따로 있나?”

“세상을 알고 싶어요.”

뜻밖에 무척이나 소녀 같은 대답이 나왔다. 그 말을 하는 디아나의 뺨은 발그레했고, 푸른 눈동자엔 꿈이 깃든 것처럼 은하수가 반짝였다.

“그 세상에서 디아나 카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이루고 싶어요.”

그것이 디아나가 찾은 정답이었다. 역사엔 그런 특별한 여성들이 실존했고, 디아나도 충분히 특별했다.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라 힘찬 걸음을 내디딜 때였다. 적어도, 지금은 자유로운 두 다리가 있으니 두려울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

“제국의 무역은 전에 없는 호황이고, 사치품 교역은 앞으로도 성장할 거다. 세상과 거래해 보는 건 좋은 기회지.”

“끌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디아나가 읽은 것은 책만이 아니었다. 현대의 신문과 비슷한 것, 호외로 골목에서 퍼져 나가는 쪽지, 하녀들의 소문들까지. 첫 발자국을 내디딜 곳이 무역이라면 그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원한다고 한 마디만 하면 돼.”

에드윈이 잠시 말을 멈추고 디아나의 기색을 살폈다. 푸른 눈동자엔 이미 강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럼, 대공 전하. 정식으로 청하겠습니다. 부끄럽지만, 제게는 선친의 유산이 있어요.”

디아나는 본론을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체스터 대공가가 최근 무역업에 관여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지요.”

에드윈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티타임은 상상과 완전 다른 방식으로 가슴을 뛰게 했다.

“무역선을 한 대만 팔아 주세요. 그리고 제가 적법하게 교역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에드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에드윈은 이 빛나는 영애를 새장 안에만 가둬 두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디아나에게 더 너른 날개를 달아 주고 싶었다. 푸른 세상을 날아가는 디아나의 미소는 훨씬 아름다우리라.

“마치 그대를 위해 남은 한 자리 같군.”

전부 그 무역권을 체스터가에 일임한 황실 덕분이다. 물론 그 뒤에는 황후와 선대공비가 친자매 간이라는 이유가 컸다. 최근 황제가 병상에 누운 후로 국정을 주무르는 것은 황후와 그 뒤의 외척, 테스 가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마주 본 두 사람의 얼굴에 똑같은 미소가 피었다. 그렇게 가을의 오후가 저물고 있었다. 따갑던 햇볕이 물러가면 곧 차가운 바람이 불 것이다. 그러다 물씬 오한을 느끼고 깨면, 그땐 겨울 이불을 내올 때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디아나 카를은 겨울에 태어났다. 다음번에 매서운 북풍이 불 때면, 디아나는 열여덟이 될 것이다. 디아나는 처음으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희망을 품었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희망이라는 불씨는 벌써 디아나의 가슴을 데워 주고 있었다. 그 불씨가 겨우내 버틸 수 있기를 바란다. 디아나의 계절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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