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30화 (30/184)

30화

며칠 새 하도 울어 댄 탓에 트리샤의 눈가가 발갛게 부었다. 처음 근위대에 발견됐을 때부터, 사건이 커져서 단순한 화재가 아닌 살해 후 방화로 가닥이 잡힌 후 황실 근위대로 넘어갔을 때도, 자신이 목격한 일을 몇 번이고 진술할 때도 붉은 눈동자에선 눈물이 흘러넘쳤다.

“이게…… 사고가 아니란 말씀이세요?”

“아무래도, 그렇단다. 너와 네 동생이 화를 피한 건 천운이었어.”

트리샤는 황실 시녀로 고된 연회의 일을 거들어 살림에 한 푼이라도 보탬이 되려는 기특한 딸이자 집에 돌아왔을 때 비극의 현장을 가장 먼저 목격한 최대의 피해자였다.

“현관 안쪽에 칼자국이 무수히 나 있었다.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을 친 모양이야. 창문가에도 불길이 거세서 달리 피할 곳이 없었던 건지…… 무엇보다, 현관이 밖에서 통나무로 막혀 있었다. 누군가 고의로…… 불을 내고 네 부모님을 가둔 것 같아.”

“네?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주위의 수상한 자들을 모아서 심문하고 있다. 우리가…… 네 부모님을 되찾아 줄 수는 없지만, 반드시 범인을 밝혀서 억울함이 없도록 하마.”

황실의 근위대에서 이번 사건을 맡은 기사는 트리샤의 아버지 또래로 무척 건장하고 성실한 인상을 줬다.

“역시, 아픈 어머니를 두고 입궁하는 게 아니었어요.”

“얘야, 넌 놀러 간 게 아니라 살림을 도우려고 간 거잖니. 네 잘못이 아니란다. 그보다…… 시녀인 네가 휴일도 아닌데 왜 집에 돌아갔는지 말해 줄 수 있겠니?”

“아, 그건…….”

트리샤가 곤란한 듯이 말끝을 흐렸다.

“괜찮다. 아무도 널 꾸짖지 않을 거다.”

“실은…… 그날 연회의 시중을 들다가 정원에 디아나 영애가 있는 걸 봤어요. 황태자비로 내정되신…… 저와 절친한 친구거든요.”

눈물로 그렁그렁한 트리샤의 눈동자가 근위병을 바라봤다. 여태 트리샤의 진술은 일관적이었다. 근위병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잔뜩 주의를 집중했다.

“천천히 말해 봐. 그냥 있었던 일만 차분히 이야기하면 된다.”

“네…….”

트리샤가 가련한 눈물을 훔쳤다.

“그런데, 디아나 영애의 표정이 어두웠어요. 저는 시녀로 입궁한 후에 황태자 전하께서…… 영애의 친구라는 이유로 이런저런 말씀을 하문하셔서…….”

트리샤가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다분히 계산적인 행동이었다. 트리샤는 끔찍한 사고의 피해자였다. 그리고 그 틈에 디아나와 루카스의 존재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전하께서 국혼 전에 디아나를 당부하신 게 떠올라서, 영애를 위로하려고 했어요.”

근위병의 미간이 다른 의미로 심각하게 기울어졌다. 일개 시녀라고 생각했는데, 황태자비로 내정된 영애의 친우이자 황태자가 따로 불러 이를 정도의 존재였다니 사실이라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다 연회장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의 눈에 띄어서…… 저는 필사적으로 사실을 말했지만, 믿어 주지…… 않았어요.”

보잘것없는, 그것도 연회에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라 고작 신입 시녀로 간 남작가의 딸이 황태자 전하와 면식이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다음엔, 자신들의 말에 대들었다는 이유로…… 연회장 뒤의 수풀로 끌고 가서 마구 때렸어요.”

“황실의 근위대가 말이냐?”

트리샤는 슬픈 듯이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직접 소매를 걷어 발에 채인 멍을 보여 주고 그 손으로 다시 제 입가에 난 상처를 짚었다.

“이 상처를 전부?”

“네…… 아마 제가 거짓말로 변명을 한다고 생각해서 화가 나신 거겠죠.”

“그래도 어찌 열일곱밖에 되지 않은 여인을!”

트리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때 비가 내렸어요. 저는 이미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배를 몇 번 걷어차이자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요. 깨어났을 땐, 이미 날이 어두웠고 절 때리던 사람들도 없어졌거든요. 그러자 황실이 무서워져서…… 무작정, 집으로 향한 거예요.”

하, 근위병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황실의 연회를 수호할 근위대는 꽤 높은 직책이어야 했다. 그런 자들이 어찌 저런 소녀를 기절할 때까지 발로 찼다는 것인가. 그것은 군인의 명예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정신을 차리고는 어서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계속 걸었어요. 자꾸 걸음이 느려져서 더 늦었겠죠.”

트리샤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처연한 눈빛을 했다. 보는 근위병도 저 또래의 딸이 있는 아버지였다. 허공을 바라보는 초점 없는 붉은 눈동자는 충분히 그의 가슴을 쓰라리게 만들었다.

“혹시 범인이 남긴 흔적은 없나요?”

근위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가엾은 소녀에게 뭐라 정확한 답을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을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건…… 앞으로도 알아낼 수 없는 건가요?”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렇단다.”

트리샤가 눈썹을 기울인 채 근위병을 봤다.

“범인이 남긴 단서조차 없다는 거예요?”

“지금은 그렇단다.”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안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어른이 들어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순진하고 처연한 눈빛이었다.

“저는 그저 황태자 전하께서 당부하신 말을 지키러…… 아니, 디아나의 위로가 되고 싶어서……. 제가 입궁하지 않았으면, 그것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라면…….”

“트리샤, 너는 아직 어려. 만일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안 됐지만, 너도 살해당했을 거다. 네 부모님도 그것만은 원하지 않으셨을 거야.”

진실은 생각보다 꽤 자주 편견에 흐려진다. 완벽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간혹 트리샤처럼 타고나기를 술수에 능란한 사람도 있다.

트리샤는 가련한 피해자였다. 끝까지 부모님의 죽음을 후회하고 자신의 탓을 하는 너무 착한 외동딸. 이 사건은 그래서 더 근위대의 주목을 끌었다.

어떻게 이 불쌍한 아이를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트리샤에겐 이제 겨우 일곱 살밖에 안된 동생 니콜라의 생계까지 달려 있었다.

“트리샤, 잘 들으렴.”

“네…….”

“늦었지만, 더 철저한 조사를 약속하마. 네게 손을 댔던 근위병들은 모두 군사재판에 넘기겠다고 장담하지. 당분간 네 동생을 돌봐 줄 곳을 마련했으니 그 부분도 안심해라.”

“아뇨, 디아나 영애에게 한눈을 판 제 잘못도…… 물론, 황태자 전하의 요청이었지만.”

“넌 아무 잘못 없어.”

그건 트리샤가 가장 잘 안다. 굳이 저 말을 반복하는 이유는 자신과 루카스의 연결 고리를 만들려는 것이다. 사람은 꽤 단순한 존재다. 자주 들을수록 아무래도 인상이 더 강렬하게 남을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정작 피해자이자 유가족인 네게 소홀했구나.”

아직 트리샤가 원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트리샤는 다음 말을 기다리며 글썽이는 눈동자로 근위병을 올려다봤다.

“그보다, 황태자 전하께서 네게 따로 부탁을 하실 정도의, 그러니까…….”

“예, 저는…… 디아나 영애의 어릴 적 친구라서요.”

트리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미천한 제가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괜찮다. 나는 네 말을 믿어. 무엇보다 황태자비가 되실 분의 친구니까 그럴 수 있겠지.”

부은 손과 직접 보여 준 상처, 무엇보다 붉은 눈동자에 가득 찬 눈물이 같은 또래의 딸을 둔 근위병의 마음을 움직였다.

“네, 전하를 몇 번 뵌 적이 있어요. 디아나 영애의 친구인 저를 좋게 봐주시고, 제게 작은 선물도 하사하셨는데…… 그 후로 딱히 감사를 드릴 수도 없던 차에 내심 디아나 영애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저 같은 게…….”

트리샤가 가쁜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소녀 특유의 울음을 참는 방법이다. 설마 그런 것까지 연기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제가 주제넘은 생각을 하는 바람에 괜히 입궁해…… 부모님을 내버려 두고…….”

그 후는 흑, 하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넌 아무 잘못이 없다.”

그보다 트리샤가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황태자궁에 사실을 확인해 달라고 사람을 보냈다. 널 의심해서가 아니라, 황태자 전하의 신분이 너무 고귀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해 주겠지?”

트리샤는 흐느끼느라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 아래로 살짝, 아무도 모를 미소가 떠올랐다 이내 사라졌다. 이제 목적은 전부 달성했다.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루카스는 아직도 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디아나의 친구인 트리샤는 기억할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렴. 내가 반드시 널 위해 최선을 다하마.”

트리샤가 사건이 일어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근위대의 초소에 머무는 이유가 있었다.

“네…….”

“황태자 전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신다면, 반드시 큰 도움을 주실 거다.”

어른이어도 한심할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이 있었다. 지금 트리샤를 위로하는 근위병이 그랬다.

“전, 그냥 부모님이 살아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흑…….”

트리샤는 영리했다.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보다 상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도록 유도하는 것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 정도로 충분히.

누구도 트리샤가 무엇을 원하는지 눈치채지 못해야 한다.

트리샤는 디아나 같은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운명으로 태어났다.

디아나가 무대 위의 디바라고 하면, 트리샤는 광대 인형이나 움직이는 장막 뒤의 초라한 보조였다. 누구도 대신할 수 있고 누구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무가치한 사람.

하지만 이제 트리샤는 운명을 원망하지 않는다. 바꿀 수 없는 것은 포기하면 된다. 사람들이 광대의 눈물에 공감할 때, 트리샤는 장막 뒤에서 소리 없이 웃으며 그들의 무지를 비웃을 것이다. 트리샤는 광대를, 관중을, 세상을 제 뜻대로 유도해 나갈 거다.

트리샤는 가장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선 기꺼이 광대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트리샤가 깨달은 삶의 교훈이었다.

본격적인 연극의 막은 이제야 겨우 오르고 있었다. 아직 결말이 정해지지 않은, 긴 투쟁의 서막이었다. 트리샤는 그 서막의 이름을 각성이라고 붙였다.

***

어떤 전조도 없는 가을밤의 바람이 청명했다. 그 바람을 느끼려 일부러 열어 둔 대공의 침실 창문에서 하얀 커튼이 펄럭였다. 마침 달빛이 무척 은은한 밤이었다.

상의를 벗은 채로 침대에 누운 에드윈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규칙적인 호흡과 함께 탄탄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간만에 그의 깊은 눈매가 평안하게 감겨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탄탄한 가슴에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으음.”

잠기운이 남은 에드윈은 본능적으로 제 가슴을 더듬던 손길을 잡았다. 그 손은 너무 여리고 부드러웠다. 그 사실이 에드윈의 눈을 띄웠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손의 주인은 디아나였다. 에드윈의 입이 살짝 벌어졌지만,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활짝 열린 창문이 디아나의 뒤에 보였다. 나머지는 까만 밤이 감춰 주고 있었다.

“쉿.”

에드윈을 내려다보던 디아나의 입술에서 비밀스러운 말이 새어 나왔다. 그 새하얀 손이 에드윈의 맨살을 타고 천천히 올라오며 목덜미를 지나 뺨을 감쌌다.

그러자 에드윈의 몸 안에서 전에 없던 열기가 치솟았다. 디아나의 손길이 닿는 모든 곳이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시선과 숨결이 닿는 곳 전부가 그랬다.

“디아나…….”

디아나는 분홍 입술을 꼭 다문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디아나의 손가락 하나가 지그시 에드윈의 입술을 눌렀다. 손끝에선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에서 맡았던 체취가 풍겼다.

에드윈은 참지 못하고 입술을 벌렸다. 그런데도 디아나의 손가락은 에드윈의 아랫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올려다본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매혹적이었다.

에드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디아나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휘청, 에드윈의 상반신 위로 쓰러지듯 디아나가 덮쳐 왔다. 그 부드러운 입술이 귓불에 닿는 느낌이 선명했다.

“전하.”

촉촉한 목소리가 에드윈의 귓가를 적시자, 하반신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디아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에드윈의 가슴골을 따라 내려가면서 단단하게 갈라진 복근을 어루만졌다. 에드윈의 앞섶이 더 부풀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안아 주세요, 전하.”

달콤한 목소리와 함께 디아나의 말캉한 가슴이 고스란히 에드윈의 상반신에 닿았다. 접촉한 피부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디아나의 풍만한 엉덩이를 꽉 쥐었다. 그러자 디아나가 한층 몸을 더 밀착해 제 가슴을 꾹, 에드윈의 상체에 눌렀다.

“하…….”

참을 수 없는 탄식이 에드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디아나의 손은 멈추지 않고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우묵한 배꼽을 지나서 수컷의 거친 수풀을 헤치는 손길에 망설임은 없었다. 에드윈은 그 순간 호흡을 멈췄다. 뜨겁게 부푼 페니스를 디아나의 차갑고 작은 손이 감싸자 척추를 타고 전율이 퍼졌다.

“디……아나.”

“전하도 이렇게 절 원하고 계시잖아요.”

단단한 페니스가 고개를 꺼떡거렸다. 디아나의 작은 손에 채 담기지 못한 귀두가 툭 튀어나왔다. 투명한 선액이 귀두를 적시는 느낌이 생생했다. 묘한 미소를 지은 디아나는 제 손으로 선액이 나오는 곳을 감싸더니 그것으로 귀두 전체를 문질렀다.

“하으…….”

제 손으로 수음할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쾌락이 에드윈을 지배했다. 페니스가 어찌나 단단해졌던지 하복부에 당기는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열기를 해소할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에드윈은 디아나의 엉덩이를 쥔 손에 더 힘을 줬다.

“으응, 전하…….”

당장, 디아나의 안에 페니스를 밀어 넣고 엉망으로 흔들어 대고 싶었다. 그건 수컷의 본능이었다. 디아나도 그것을 읽었는지 에드윈의 몸 위에 올라탄 채로 천천히 제 아래와 꺼떡거리는 페니스의 위치를 맞췄다.

“하, 디아나.”

쾌락에 시야가 흐려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운 열기였다. 에드윈은 제 위에 올라탄 디아나를 보며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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