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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29화 (29/184)

29화

디아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런 대낮에 이름을 대고 찾아올 줄은 몰랐다. 샬롯은 그런 속내는 전혀 모른 채 디아나의 동요를 단지 갑작스러운 인물에 대한 놀라움으로 해석했다.

“저도 모르겠지만, 아가씨를 위로하기 위해 오셨다더군요.”

대공이 공작 영애를 방문하기엔 어떤 화제가 필요했다. 지금은 그 화제가 있었다.

“그냥 돌아가시라고 할까요?”

“……아냐, 무례를 범할 수는 없지.”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상대를 파악할 여지는 있었다. 디아나는 거울을 보고 흐트러진 곳이 없는지 점검한 후에 에드윈이 기다리는 1층의 응접실로 향했다.

“영애께서 들어오십니다.”

그레이 집사장의 중후한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이번에도 에드윈은 몸소 일어서서 디아나를 맞이했다. 신분은 에드윈이 훨씬 높았지만, 레이디를 대하는 신사의 예의였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의 검은 눈동자엔 디아나만이 자리했다.

“초대도 없이 온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에드윈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전하.”

곧 차를 내온 집사장이 자리에서 비켜 줬다. 단둘이 남자, 그제야 에드윈이 입을 열었다.

“큰 사건이 있었다더군. 그대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어서 밤을 기다릴 수 없었다.”

“전…… 괜찮아요.”

겨우 찾은 말이 고작 이거다. 그러나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는 확고하게 그 자리에서 디아나를 주시했다. 디아나는 잠시 그런 에드윈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약간 충격적이긴 했지만…….”

“놀랐을 거라 생각했다.”

디아나는 뻔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에드윈의 얼굴을 봤다. 그의 검은색 눈동자는 진지하고 올곧게 디아나를 보고 있었다.

“블랑 남작가의 사건은 흔치 않은 일이야. 그리고 그대와 친분이 있다고 들었다.”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전…… 이제 그 아이와 친구라고 생각지 않아요.”

“상관없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그의 눈동자는 디아나의 숨결 하나까지 놓치지 않을 것처럼 집요했다.

“전 괜찮아요. 사건은 카를가에 일어난 게 아니니까요.”

디아나의 반응은 에드윈의 예상보다 담담했다. 그러자 에드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문득 제 모습이 우습게 여겨졌다. 무엇을 기대한 걸까.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두려움에 떠는 디아나의 모습이라도 보려고 했을까.

“그대보다 내 마음이 약했군.”

오히려 평정심을 잃고 미성숙하게 군 것은 에드윈 자신이었다. 그의 입에 쓴맛이 고였다.

“그리고 사실, 저와 전하는 지금 그 불행한 사건을 이용하고 있지요.”

디아나의 말이 차분하게 울렸다. 에드윈은 예기치 않은 말에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디아나의 친구에게 일어난 불행한 사건을 위로하기 위해서란 명분으로 찾아온 에드윈이다. 그 핑계로 앞으론 서찰을 보내도 좋았다.

“비겁한 행동을 한 건 나다. 그대가 아니라.”

에드윈이 선뜻 제 마음을 인정하고 선을 그었다.

“그 핑계로라도 그대를 보고 싶었지.”

굳이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가 체온으로 이미 느낀 터다. 괜히 서투른 말로 그것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저는 전하를 비겁하게 만드는 원흉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대의 탓은 아무것도 없다.”

에드윈의 시선이 곧았다. 마치 그의 말처럼. 디아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고 입술을 열었다. 모든 순간이 에드윈에게는 무척 길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고요한 디아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걱정은 그대의 몫이 아니야. 전부, 내가 결정한 거다.”

에드윈은 잠시 디아나를 주시했다.

에드윈 한 명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 커다란 응접실이 꽉 찬 것 같았다. 그에게선 타고난 기품과 당당함이 풍겼다. 긴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조차 우아했고, 깊은 눈매는 대공가 특유의 나른한 매력이 묻어났다.

“당당히 그대를 보러 온 것은 좋았으나, 조금 아쉬운 점도 있군.”

에드윈의 말이 둘만의 비밀스러웠던 만남을 떠올리게 했다. 남의 눈을 피해 만난 둘은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체온을 나눴다.

“솔직히, 내가 누군가에게 구애를 하게 될 줄 몰랐다.”

에드윈에게 여인이란 낯선 존재였다. 여태까진 그랬다. 딱히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고 그리 좋은 인상을 품을 수도 없었다. 대공가에서 자란 에드윈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주위의 여성은 대개 선대공비인 그레이스처럼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여인들이었고, 나머지는 또래의 한창 꾸미기 좋아하고 부끄럼을 타며 에드윈의 눈짓에 발을 동동 구르는 영애들이었다. 몸을 무기로 천박한 유혹을 해 오는 여인들도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경우가 있었지만, 디아나만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대를 본 후에 내가 오만했음을 깨달았지.”

아직 에드윈이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다. 디아나가 직접 보고 들으며 안 것은 그가 스물의 정직하고 시선이 무척 올곧은 남자라는 것이었다. 짙은 체취와 가끔 보이는 나른한 미소, 체온과 숨결이 아주 뜨겁다는 것도 알았다.

“저 때문에 전하께서 위험해지시는 건 아닌지…….”

디아나가 말끝을 흐렸다. 처음엔 에드윈의 존재가 마냥 든든하고 의지가 됐다. 디아나의 처지에선 절실한 같은 편이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이제 한 명의 남자로서 디아나의 마음에 자리매김을 했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를, 그 낮은 목소리를 이미 좋아하게 됐다. 그렇게 마음이 자라자 처음엔 없었던 걱정이 생겼다. 에드윈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할 몫이다.”

에드윈은 강인하게 잘랐다. 디아나의 걱정을 다 아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 마음을 디아나가 읽지 못할 리 없었다.

“전, 저로 인해 전하가 다치는 걸 원치 않아요.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전 저를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그 말은 내가 하고 싶군.”

에드윈은 디아나의 우려가 깃들 틈을 없애 버렸다.

“나는…… 기회가 있어 감사했다. 그대가 기꺼이 황태자비가 되고 싶어 했다면, 아마 내 마음은 시들어 갔겠지.”

에드윈의 목소리엔 진심이 묻어났다. 디아나는 그 사실이 안타깝고 미안하면서도, 의지가 됐다. 젊은 대공에겐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았다. 황태자비가 될 여인을 마음에 품지만 않았으면 앞으로도 그랬으리라.

그는 저돌적인 남자였지만, 그건 디아나가 에드윈의 마음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디아나가 황태자비가 되려고 하는 평범한 영애였다면 그는 디아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대가 내게 오는 길을 돕는 건, 나 자신을 돕는 것. 그저 그뿐이다.”

“만약에 제가…… 황태자비의 길에서 벗어난 후에도 전하의 곁에, 가지 않는다면요?”

디아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돌려줬다. 에드윈은 잠시 눈을 들어 디아나를 봤다.

“내가 싫다면, 언제든.”

“아뇨, 싫어져서가 아니라. 전하의 비가 되는 것보다 카를가의 공작이 되고자 한다면……에 대해서 여쭈는 겁니다.”

이 순간만큼은 매일 밤 스물의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게 하는 꿈속의 디아나가 아니었다. 여인의 색정적인 향기가 아니라 디아나라는 사람 자체의 존재감이 에드윈을 이끌고 있었다.

“그렇군.”

미처 생각지 못한 경우였다. 하지만 디아나의 상황에선 가능한 미래이기도 했다.

“그대는 특별한 사람이었지.”

평범한 영애였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다. 에드윈은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고는 고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난 어쩔 수 없다.”

에드윈은 솔직한 사람이었다. 디아나가 공작위를 쟁취해서 독립하는 것도 대견한 일이겠지만, 당장 제 비가 되는 것보다 나을 리는 없었다.

“그대가 무엇을 하겠다고 해도, 난 말릴 수가 없어. 이미 그렇게 됐지.”

먼저 반한 것은 에드윈이다. 더 사랑하게 된 것도 에드윈이었다. 권위적인 대공은 디아나의 앞에선 당연한 오만함과 자존심까지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내에게 내주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았어요.”

“그래.”

디아나의 마음이 있으면 그걸로 됐다. 지금은 그랬다.

“그대는 이미 나의 연인이니.”

달콤한 단어가 디아나의 귓가를 울렸다.

“누구에게도 내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황태자라도, 예외는 없었다. 디아나 카를은 이미 에드윈의 연인이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에드윈은 국혼을 깨트릴 각오까지 있었다.

“그대의 눈빛은 언제나 맑고 고요한 호수 같군.”

말끄러미 에드윈이 디아나의 눈을 응시했다. 마음 같아선 손을 잡고 품에 안고 싶었지만, 공식적인 만남의 한계였다. 디아나는 같은 눈동자를 두고 두 남자가 이리도 다른 것을 느꼈다.

에드윈은 디아나의 내면이 정확히 누군지 몰랐다. 그런 그에게 열일곱의 영애가 가진 신비함은 확실히 각인됐다. 에드윈의 본능과 이성 모두 호기심과 이끌림으로 디아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오늘 밤에도 창문을 열어 주지 않겠나.”

에드윈이 자신의 연인에게 속삭였다. 디아나는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에드윈은 디아나만의 미래를 인정하면서도, 둘의 관계를 깨트리지 않았다. 그로서는 무척 관대한 처사였다.

이렇듯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미래를 바꿀 것이다. 지금 디아나가 살아가는 생은 이전과 달랐다.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 디아나가 자신의 인생을 찾고 미래를 걸어갈 때까지, 그 길은 디아나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

***

에드윈이 다녀간 후, 잠깐 선잠에 들었다가 깼다. 지난 생의 일들이 짧은 장면으로 휙휙 스쳐 가는 꿈이었다. 에드윈이 남긴 온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가슴이 무거운 돌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침착해야 해.”

디아나가 배운 것은 고독과 허무함만이 아니었다. 그에 따른 보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미미하지만, 삶의 교훈을 파악한 것이다.

“우선 내 자리를 만들어야 해.”

최근 생각에 잠긴 시간이 늘었다. 자연히 황후였던 디아나의 삶을 되새기게 됐다. 처음엔 상처와 아픔 증오와 배신감이었지만, 수도 없이 머릿속으로 반복하는 동안 마치 책 속의 이야기처럼 어느 정도 객관화를 할 수 있었다.

디아나의 추락과 몰락. 아니, 시작부터 낭떠러지의 바닥에 있었던 삶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거듭해야 했을까. 너무 많은 요소가 있었지만, 하나씩 불행이 겹쳐서 완전히 홀로 남은 것이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것. 그로 인해 진정 디아나의 행복을 생각해 준 사람이 없었다는 점. 다소 어린 나이에 황후가 되어서 지대한 책임을 짊어지게 됐다는 것과 남편인 루카스의 무관심과 그 자리를 메운 트리샤의 존재.

하지만 디아나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근원적인 문제를 찾고 싶었다.

열일곱의 디아나로 회귀해서 살펴본 현실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부모님은 없었지만, 부모님이 남겨 주신 유산이 있었다. 샬롯과 그레이 집사장처럼 믿을 만한 측근도 있었다.

아름다운 공작가의 영애. 차기 황후가 되기 손색없는 고귀함과 평판.

“그것뿐이었지.”

디아나가 냉정하게 잘랐다. 어린 디아나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모두의 말처럼 초목 같은 사람도 아니었지만, 온실에서 찬바람 한 번 맞지 않았던 인생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 순진무구함이 자신을 추락시키는 것도 모른 채 황후라는 지위에 매여 제대로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며 하루하루 자신을 죽여 갔다. 바로 자신의 선량함과 순수함이 독이 된 것이다.

“디아나는 자신의 삶을 산 적이 없어.”

그게 결론이었다. 모든 문제는 거기에서 출발했다. 트리샤의 존재는 방아쇠였지,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될 수는 없었다.

“그걸 바꿔야 미래를 바꿀 수 있어.”

디아나는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남편의 지위에 매여서 사는 것은 싫었다.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자 조금씩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도 특별한 여인이 되면 돼.”

책에서 봤던 아주 특별한 여인들은 실제로 존재했고 남편이 없이도 고귀한 신분을 혼자서 거머쥐었다. 벌써 주눅이 들 필요는 없다.

디아나는 한때 황후였고, 열일곱 살로 회귀한 지금은 황태자비로 내정된 신분이었다. 그러나 그 길을 걷어차고 보란 듯이 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젊은 대공은 디아나의 편이었고, 굳건한 연인으로 디아나의 마음까지 지켜 줬다.

디아나는 이미 특별한 존재다.

그 특별함을 어떻게 사용할지도 온전히 자신의 판단이었다.

적어도, 디아나는 이제 순진하지 않았다. 그것은 결정적인 운명의 차이를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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